임달식(45) 신한은행 감독
[36.5℃ 데이트] 3년연속 통합우승 임달식 신한은행 감독
허재 폭행사건으로 코트 추방
정규리그 승률 0.925 ‘경이적’
“농구 싫어 이민가려 짐싸기도” 여자프로농구 3년 연속 통합우승을 달성한 임달식(45) 신한은행 감독은 최근 ‘미스터 9할’이라는 새 별명을 얻었다. 정규리그 37승3패, 승률 0.925의 경이적인 기록을 세운 뒤다. 이 승률은 국내 프로스포츠에서 유일한 기록이다. 그것도 6개월 동안 40경기나 치른 장기 레이스에서 나왔다. 임 감독은 또 여자프로농구 사상 최다인 25연승 기록도 이어가고 있다. 농구인생 최고의 전성기를 누리고 있지만, 그의 역정은 파란만장하다. 휘문고-고려대-현대(실업) 등 ‘농구명가’를 거쳐 국가대표 슈팅가드로 이름을 날리다가 1989년 농구대잔치 기아와의 결승에서 허재(44·현 KCC 감독) 폭행사건으로 코트에서 ‘추방’됐다. 자격정지 1년을 받은 뒤 복귀했지만 그의 이름은 팬들의 기억에서 사라져갔다. “농구가 싫어서 캐나다로 이민가려고 짐까지 다 쌌죠. 부모님이 눈물로 말려 포기했어요.” 그는 한정식집에 손을 댔다. 그러다 단골손님이던 프로골퍼 최광수 등과 친해지면서 골프채를 잡았다. 슈터 출신답게 손감각이 있어서인지 단숨에 세미프로골퍼 자격증까지 땄다. 프로골퍼로 제2인생을 준비했지만 언제부턴가 실력은 정체됐고, 생계를 걱정할 처지에 몰렸다. 그는 “보증금 500만원짜리 월셋방에 세 식구가 산 적도 있다”고 털어놨다. 송충이는 솔잎을 먹고 살아야 한다고 했던가. 농구판을 떠난 지 10년 만에 2001년 조선대 감독으로 코트에 돌아왔다. 그러나 말이 대학팀이지, 조선대는 2부 대학에서도 하위권으로 ‘아마추어 동호회’ 수준이었다. 연고도 없는 광주에서 그런 팀을 맡아 3년 만에 1부로 끌어올렸고, 전국대회 6강, 전국체전 준우승도 일궜다. 임 감독은 “‘2부 대학 출신 주제에 …’라는 편견과 싸우는게 제일 힘들었다”고 돌이켰다. 2007년엔 조선대 농구사상 최초로 프로선수 2명을 한꺼번에 배출하기도 했다. 농구계에선 ‘조선대 신화’라며 찬사를 보냈다. 사실 잡초 근성이 몸에 밴 그에게 스타군단 ‘레일 신한’은 어울리지 않는다. 그래선지 그는 신한은행을 끈끈한 수비와 조직력의 팀으로 만들었다. “스타 선수가 빠져도 지지 않는다. 하지만 조직력이 무너지면 진다”는 게 그의 지론이다. 지난 시즌 초 최윤아·전주원·하은주가 부상으로 한꺼번에 빠졌어도 임 감독이 버틸 수 있었던 힘이었다. 그의 도전은 끝이 없다. 최근 여자프로농구 시상식에서 2년 연속 지도상을 받은 그는 “선수들의 땀으로 받은 상”이라며 “조선대 시절의 근성으로 다음 시즌엔 여자프로농구 연승 ‘신화’에 도전해 보겠다”고 했다.
김동훈 기자 cano@hani.co.kr
정규리그 승률 0.925 ‘경이적’
“농구 싫어 이민가려 짐싸기도” 여자프로농구 3년 연속 통합우승을 달성한 임달식(45) 신한은행 감독은 최근 ‘미스터 9할’이라는 새 별명을 얻었다. 정규리그 37승3패, 승률 0.925의 경이적인 기록을 세운 뒤다. 이 승률은 국내 프로스포츠에서 유일한 기록이다. 그것도 6개월 동안 40경기나 치른 장기 레이스에서 나왔다. 임 감독은 또 여자프로농구 사상 최다인 25연승 기록도 이어가고 있다. 농구인생 최고의 전성기를 누리고 있지만, 그의 역정은 파란만장하다. 휘문고-고려대-현대(실업) 등 ‘농구명가’를 거쳐 국가대표 슈팅가드로 이름을 날리다가 1989년 농구대잔치 기아와의 결승에서 허재(44·현 KCC 감독) 폭행사건으로 코트에서 ‘추방’됐다. 자격정지 1년을 받은 뒤 복귀했지만 그의 이름은 팬들의 기억에서 사라져갔다. “농구가 싫어서 캐나다로 이민가려고 짐까지 다 쌌죠. 부모님이 눈물로 말려 포기했어요.” 그는 한정식집에 손을 댔다. 그러다 단골손님이던 프로골퍼 최광수 등과 친해지면서 골프채를 잡았다. 슈터 출신답게 손감각이 있어서인지 단숨에 세미프로골퍼 자격증까지 땄다. 프로골퍼로 제2인생을 준비했지만 언제부턴가 실력은 정체됐고, 생계를 걱정할 처지에 몰렸다. 그는 “보증금 500만원짜리 월셋방에 세 식구가 산 적도 있다”고 털어놨다. 송충이는 솔잎을 먹고 살아야 한다고 했던가. 농구판을 떠난 지 10년 만에 2001년 조선대 감독으로 코트에 돌아왔다. 그러나 말이 대학팀이지, 조선대는 2부 대학에서도 하위권으로 ‘아마추어 동호회’ 수준이었다. 연고도 없는 광주에서 그런 팀을 맡아 3년 만에 1부로 끌어올렸고, 전국대회 6강, 전국체전 준우승도 일궜다. 임 감독은 “‘2부 대학 출신 주제에 …’라는 편견과 싸우는게 제일 힘들었다”고 돌이켰다. 2007년엔 조선대 농구사상 최초로 프로선수 2명을 한꺼번에 배출하기도 했다. 농구계에선 ‘조선대 신화’라며 찬사를 보냈다. 사실 잡초 근성이 몸에 밴 그에게 스타군단 ‘레일 신한’은 어울리지 않는다. 그래선지 그는 신한은행을 끈끈한 수비와 조직력의 팀으로 만들었다. “스타 선수가 빠져도 지지 않는다. 하지만 조직력이 무너지면 진다”는 게 그의 지론이다. 지난 시즌 초 최윤아·전주원·하은주가 부상으로 한꺼번에 빠졌어도 임 감독이 버틸 수 있었던 힘이었다. 그의 도전은 끝이 없다. 최근 여자프로농구 시상식에서 2년 연속 지도상을 받은 그는 “선수들의 땀으로 받은 상”이라며 “조선대 시절의 근성으로 다음 시즌엔 여자프로농구 연승 ‘신화’에 도전해 보겠다”고 했다.
김동훈 기자 cano@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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