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양희 기자의 맛있는 야구 / 그의 가을은 잔인했다. 신고선수로 프로 입단 뒤 늘 그랬다. 찬 바람이 불면 방출 명단에 포함될까 마음을 졸이고 또 졸였다. 하지만 올해 가을은 다르다. 프로야구 선수들이 갈망하는 가을 야구 무대에 선다. 1군 3경기 6타석 만에 주어진 ‘믿을 수 없는’ 기회이다. 롯데 오장훈(25)은 신고 선수로 3년을 보냈다. 2006년 말 신고 선수 테스트를 통해 투수로 롯데에 입단했지만 2007년에 단 한 번도 마운드에 오르지 못했다. 홍익대 시절 받은 두 차례 팔꿈치 수술이 문제였다. 그해 가을, 방출 위기를 겨우 넘기고 결심했다. 공을 던질 수 없다면 쳐보자고. 곧바로 박정태 2군 타격코치에게 매달렸다. “저 좀 야구하게 해주세요.” 현역 시절 ‘악바리’로 통했던 박 코치와 새벽 1시까지 특훈을 했다. 박 코치는 힘들어도 힘든 내색을 안 하는 그를 더 세게 몰아붙였다. 그게 그에게 생존본능을 심어줄 거라 믿었다. 타자 변신 첫해. 타격 기회는 쉽게 오지 않았다. 경기에 한번 출장하면 다음날에는 쉬는 날이 반복됐다. 2군이기는 하지만 지명받은 선수와 다르게 취급받는 게 신고선수다. 아쉬움을 뒤로한 채 2008년 겨울에는 더 매몰차게 방망이를 휘둘러댔다. 흔치 않은 신고선수 3년차. 양상문 2군 감독의 눈에 띄었다. 양 감독은 “힘은 있지만 정밀성은 떨어졌던” 그를 줄곧 4번 타자로 기용했다. 4번 타자로 꾸준하게 출장하면서 상대 투수의 변화구 대처 능력을 서서히 배워갔다. 결국 그는 2군 남부리그에서 타격 6관왕(타율·타점·홈런·최다안타·득점·장타율)에 올랐다. 돌이켜보면, 그는 어릴 적부터 강단이 있었다. 제주도 서귀포 출신으로, “야구가 너무 하고파서” 초등학교 6학년 때 혈혈단신으로 야구부가 있는 서울 학교로 전학 왔던 그다. 부모님은 막내인 그가 한달 안에 울면서 집으로 돌아올 것이라고 믿었다. 하지만 감독 집과 야구부 동기 집을 몇년째 전전하면서도 그는 고향으로 내려가지 않았다. 잡초 근성은 그때부터 자라났다. 그는 이제 가을 야구를 한다. 한 번도 서보지 않았던 3만 관중 그라운드가 낯설기는 하다. 그래도 그는 다짐한다. ‘타석에 설 때마다 목숨 걸고 하겠다’고. ‘돌하르방 뚝심으로 찬란한 가을을 한번 만들어 보겠다’고. 김양희 기자whizzer4@hani.co.kr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