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동훈 기자의 슬램덩크
김동훈 기자의 슬램덩크 / 어머니는 농구를 극구 반대했다. 하지만 피는 속일 수 없었다. 어린 이민형은 농구에 유난히 소질을 보였다. 그의 아버지는 1960년대 국가대표 센터로 이름을 날린 이경우씨. 아버지는 그가 초등학교 2학년 때 뇌졸중으로 갑자기 세상을 떠났다. 서른여섯의 젊은 나이였다. 키도 쑥쑥 자랐다. 어머니도 더는 반대할 수 없었다. 서울 여의도중학교 2학년 때 농구 명문 용산중학교로 전학을 갔다. 허재, 한만성, 이삼성, 김형균 등 쟁쟁한 동기들을 만났다. 그리고 용산고 전성시대를 열었다. 1984년 서울에서 열린 아시아청소년선수권대회에서 사상 처음 중국을 꺾고 정상에 오르는 데 주역이 됐다. 그는 아버지의 흔적을 따라 고려대와 실업 기업은행에서 뛰었다. 대학 4학년 때는 연세대와의 정기전에서 종료 5초 전 결승골을 넣었다. 고려대 응원단은 자지러졌다. 아버지가 그랬듯이 그도 국가대표 센터로 태극마크를 달았다. 은퇴를 생각할 무렵 프로농구가 생겼다. 외국인 선수가 가세했다. 정통 센터였던 그가 설 자리는 없었다. 서른 살이 넘어 파워포워드로 변신을 시도했다. 쉴새없이 외곽슛 훈련을 거듭했다. 그리고 에릭 이버츠와 호흡을 맞춰 프로농구 나산 플라망스 돌풍을 일으켰다. 그렇게 프로에서 3년을 더 뛰고 은퇴했다. 지도자 생활은 험난했다. 늘 코치였고, 40대 중반이 되도록 번번이 감독 후보에서 밀렸다. 마침내 지난 연말 모교 고려대에서 감독을 맡아달라는 연락이 왔다. 가슴이 벅찼다. 이내 아버지가 떠올랐다. 아버지 역시 1970년을 전후해 고려대 감독을 지냈다. 김동광, 한영남, 김길호, 박형철 같은 이들이 아버지의 제자다. 팀은 엉망이었다. 4년 동안 감독이 네 차례나 바뀌었다. 졸업을 앞둔 4학년 5명의 진로부터 걱정이었다. 한 명이라도 더 프로팀에 보내려고 온 힘을 다해 뛰었다. 지난 4일 프로농구 신인선수 드래프트가 열렸다. 4명이 1·2라운드에 지명됐고, 1명은 2군으로 모두 프로팀 유니폼을 입게 됐다. 안도의 한숨이 나왔다. 이제 팀을 추스를 차례였다. 반목과 갈등을 빚었던 선수들을 하나로 모았다. ‘화합으로 추락한 고려대의 명성을 되찾자’는 게 그가 내건 구호다. 안암골에 다시 우렁찬 함성이 들리고 있다. 40년 만에 대를 이은 고려대 사령탑. 그가 고려대의 명성을 꼭 되찾아야 하는 이유다. 김동훈 기자cano@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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