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동훈 기자의 슬램덩크
어머니는 또 학교를 찾아가 용서를 구했다. 박상오가 다시 숙소를 뛰쳐나갔기 때문이다. 이번이 벌써 몇 번째이던가. 결국 그는 농구를 그만두기로 결심하고 학교 문을 나섰다. 서울 신림동 집까지 오는 길에 자꾸 눈물이 났다. 버스 안에서도 눈물은 하염없이 쏟아졌다. 집에 돌아온 아들을 보고 어머니도 함께 울었다.
2000년 봄, 박상오는 꿈을 안고 중앙대에 입학했다. 광신정보산업고 시절 혼자 30~40점씩 넣으며 활약했던 터라 대학에서도 자신을 알아줄 것으로 믿었다. 그런데 예상은 완전히 빗나갔다. 코트에 나서기는커녕 엔트리 12명 안에도 들지 못했다. 당시 중앙대에는 4학년 송영진, 3학년 김주성과 손준영, 2학년 석명준 등 기라성 같은 빅맨들이 많았다. 2학년이 됐지만 1년 후배 김광원까지 센터 자원은 여전히 즐비했다. 그는 생각했다. “농구는 내 길이 아니다.”
농구를 그만둔 박상오는 병무청을 찾아갔다. 그리고 이듬해 봄 현역병으로 자원 입대했다. 그가 맡은 보직은 3군수 지원사령부의 전투식량병. 창고와 트럭을 오가며 짐을 실어나르는 일이었다. 그는 “노가다와 다를 바 없었다”고 했다.
어느 날 어머니가 면회를 왔다. 고교 시절 은사였던 정덕영 코치와 중앙대 김영래 코치가 우연히 만났다가 박상오 얘기가 나왔다는 것이다. “자질이 아까운 선수”라고 입을 모은 두 사람은 어머니에게 “제대하면 다시 농구부에서 테스트를 받아보라”는 말을 전했다. 어머니는 너무 기뻐 단숨에 부대까지 달려온 것이다.
박상오는 마음이 찡했다. 그때부터 남몰래 체력훈련을 시작했다. 체력단련실에서 러닝머신, 역기 등 온갖 기구들과 씨름했다. 25개월의 군복무를 마친 그는 다시 중앙대 유니폼을 입었다. 3학년 때 봄철 대학연맹전에 나가 팀을 준우승으로 이끌었고, 자신은 우수선수상을 받았다. 그리고 2007년 1월, 3살 어린 후배들과 신인 드래프트에 나서 1라운드 5순위로 부산 케이티에프(지금의 케이티)에 입단했다.
박상오는 지난해 7월 김지나씨와 결혼했다. 그는 “장인어른이 내년(2011년) 봄에 하라고 했는데 예쁜 아내를 빼앗길까 불안해 서둘렀다”며 웃었다. 그의 농구인생은 이번 시즌 활짝 피었다. 지난 세 시즌 동안 평균 8.1점에 머물던 득점이 올 시즌엔 16.4점으로 두 배나 높아지며 팀의 에이스로 거듭났다. “출장시간이 늘어나니 자신감이 생긴 덕분”이라고 했다. 박상오는 2일 원주 동부전에선 호쾌한 슬램덩크까지 꽂았다. 예비역 병장의 인생역전을 알리는 신호탄 같다.
김동훈 기자 cano@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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