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농구 3점슛왕 상명대 임상욱
대학농구 3점슛왕 상명대 임상욱
중·고때 `벤치’…대학도 2번 옮겨
가난 짓눌려 운동 포기하고 군입대
눈물의 훈련…신인 드래프트 기대 딱 “웃고 있어도 눈물이 난다”는 유행가 가사다. 인터뷰 내내 탤런트 송일국을 닮은 스물일곱 청년은 환하게 웃었다. 하지만 그의 입에선 슬픈 사연이 흘러나왔다. 커다란 눈망울에선 금세라도 눈물이 흐를 것 같았다. 알코올중독 아버지와 혼자 생계를 책임진 어머니, 명절 때도 만나지 못하는 형…. 농구 인생도 지독히 풀리지 않았다. 대학을 세 곳이나 전전했고, “다 때려치우고 싶어” 군대를 다녀왔다. 그러나 미련이 남아 다시 농구공을 잡았다. 마침내 대학리그 3점슛왕에 등극했다. 임상욱(27·상명대)의 삶은 파란만장하다. ■ 3류 선수로 시작하다 소년은 농구에 꽂혔다. 드라마 <마지막 승부>와 만화 <슬램덩크>에 푹 빠졌다. 틈만 나면 농구공을 가지고 운동장으로 나갔다. 부산 장전중학교 2학년 때 농구 명문 동아중학교를 찾아갔다. 꿈에 그리던 유니폼을 입었다. 하지만 그의 포지션은 벤치였다. 프로농구 스타 김태술(안양 한국인삼공사·현 상무)이 동기이고, 강병현(전주 KCC)이 1년 후배다. 쟁쟁한 선수들 틈에서 그가 설 자리는 없었다. 부산 중앙고에 진학했다. 고2 때 감독이 불렀다. “운동 그만둬라” 임상욱은 오기가 생겼다. “계속하겠습니다.” 오라는 대학이 없었다. 2년제 경북과학대에 들어갔다. 거기서 한상호 감독을 만났다. 2부 대학리그에서 원없이 코트를 누볐다. 그는 “경기에 많이 출전하다 보니 감이 생기고 농구에 눈을 떴다”고 했다. 기회가 왔다. 1부 대학 명지대에 3학년으로 편입했다. 하지만 중·고교 때 포지션으로 돌아갔다. 벤치였다. 어느 날 종료 8초를 남기고 3점 뒤지고 있던 상황에서 감독이 그를 불렀다. 그는 감독의 의도대로 버저비터 3점슛을 꽂았다. 동점이었다. 연장에서도 3점슛 2개를 더 꽂았다. 그날 승리는 순전히 그 덕분이었다. 관중석의 어머니는 감격에 겨워 눈물을 흘렸다. 그의 이름이 처음 신문 기사에 등장했다. ■ 2류 환경을 이겨내다 아버지는 알코올중독으로 요양원 신세를 지고 있다. 형은 군 제대 뒤 충북 청주에서 따로 살고 있다. 1년에 한두 번 만나는 게 고작이다. 많지 않은 네 식구가 다 모이기도 힘들다.
그가 어렸을 때 아버지는 쌀 도매상을 했다. 행복은 잠시뿐이었다. 아버지는 언제부턴가 무위도식했다. 중학교 때 가세는 급격히 기울었다. 부모는 별거를 했다. 어머니 혼자 억척스럽게 두 아들을 키웠다. 대학 신입생 때 회비가 없었다. 어머니는 “주눅 들지 말라”며 저금통을 깼다. 10원짜리 동전까지 탈탈 털어서 회비를 냈다. 명지대에서 반짝했지만 앞이 보이지 않았다. 가난도 계속 그를 짓눌렀다. 어머니의 돈벌이도 시원치 않았다. “빨리 돈이나 벌자”고 생각했다. 공사판 막노동부터 엑스트라, 광고 모델까지 닥치는 대로 일을 했다. 그러다 입영 영장이 나왔다. 강원도 철원 6사단 ‘땅개’(보병)였다. 어느 날 부대로 경북과학대 은사인 한 감독이 찾아왔다. 상명대 사령탑으로 자리를 옮긴 그는 “나랑 농구 계속하자”는 말을 남기고 떠났다. 가슴이 벅찼다. ■ 1류 선수를 꿈꾸다 하루 훈련을 마치면 파김치가 됐다. 하지만 임상욱은 그게 끝이 아니었다. 야간 자율훈련 시간에 다시 체육관으로 나갔다. 아무도 없는 캄캄한 체육관에서 500개씩 슈팅 훈련을 했다. 이따금 설움이 복받쳤다. 흐르는 눈물을 훔치며 슛을 쏘고 또 쐈다. 500개를 다 쏘고도 200개를 더 채워야 직성이 풀렸다. 2009년 문화방송(MBC)배 대학농구 2부 리그에서 최우수선수상을 받았다. 난생처음 받는 큰 상이었다. 2부 대학에 더는 적수가 없었다. 상명대도 지난해 1부 대학으로 승격했다. 중앙대, 연세대, 고려대 등 12개 팀이 참가한 대학농구리그에서 임상욱은 3점슛왕이 됐다. 21경기에서 71개를 꽂았다. 2위와의 격차도 컸다. 경기당 평균 3개(3.4개)가 넘는 유일한 선수였다. 한 감독은 “약팀이라 오픈 찬스가 많이 안 나는데 정말 대단한 기록”이라고 평가했다. 득점도 평균 17.8점으로 전체 5위에 올랐다. 자꾸 좋은 일이 생긴다. 잘생긴 외모 덕분에 학교 홍보 포스터에도 등장했다. 이제 열흘 뒤에는 프로농구 신인 드래프트가 열린다. 초조하지만 기대가 크다. 그에게 장점이 뭐냐고 물었다. 주저 없이 “끈기와 투혼, 그리고 열정”이라며 또 함박웃음을 터뜨렸다.
천안/김동훈 기자 cano@hani.co.kr, 사진 상명대 제공
가난 짓눌려 운동 포기하고 군입대
눈물의 훈련…신인 드래프트 기대 딱 “웃고 있어도 눈물이 난다”는 유행가 가사다. 인터뷰 내내 탤런트 송일국을 닮은 스물일곱 청년은 환하게 웃었다. 하지만 그의 입에선 슬픈 사연이 흘러나왔다. 커다란 눈망울에선 금세라도 눈물이 흐를 것 같았다. 알코올중독 아버지와 혼자 생계를 책임진 어머니, 명절 때도 만나지 못하는 형…. 농구 인생도 지독히 풀리지 않았다. 대학을 세 곳이나 전전했고, “다 때려치우고 싶어” 군대를 다녀왔다. 그러나 미련이 남아 다시 농구공을 잡았다. 마침내 대학리그 3점슛왕에 등극했다. 임상욱(27·상명대)의 삶은 파란만장하다. ■ 3류 선수로 시작하다 소년은 농구에 꽂혔다. 드라마 <마지막 승부>와 만화 <슬램덩크>에 푹 빠졌다. 틈만 나면 농구공을 가지고 운동장으로 나갔다. 부산 장전중학교 2학년 때 농구 명문 동아중학교를 찾아갔다. 꿈에 그리던 유니폼을 입었다. 하지만 그의 포지션은 벤치였다. 프로농구 스타 김태술(안양 한국인삼공사·현 상무)이 동기이고, 강병현(전주 KCC)이 1년 후배다. 쟁쟁한 선수들 틈에서 그가 설 자리는 없었다. 부산 중앙고에 진학했다. 고2 때 감독이 불렀다. “운동 그만둬라” 임상욱은 오기가 생겼다. “계속하겠습니다.” 오라는 대학이 없었다. 2년제 경북과학대에 들어갔다. 거기서 한상호 감독을 만났다. 2부 대학리그에서 원없이 코트를 누볐다. 그는 “경기에 많이 출전하다 보니 감이 생기고 농구에 눈을 떴다”고 했다. 기회가 왔다. 1부 대학 명지대에 3학년으로 편입했다. 하지만 중·고교 때 포지션으로 돌아갔다. 벤치였다. 어느 날 종료 8초를 남기고 3점 뒤지고 있던 상황에서 감독이 그를 불렀다. 그는 감독의 의도대로 버저비터 3점슛을 꽂았다. 동점이었다. 연장에서도 3점슛 2개를 더 꽂았다. 그날 승리는 순전히 그 덕분이었다. 관중석의 어머니는 감격에 겨워 눈물을 흘렸다. 그의 이름이 처음 신문 기사에 등장했다. ■ 2류 환경을 이겨내다 아버지는 알코올중독으로 요양원 신세를 지고 있다. 형은 군 제대 뒤 충북 청주에서 따로 살고 있다. 1년에 한두 번 만나는 게 고작이다. 많지 않은 네 식구가 다 모이기도 힘들다.
그가 어렸을 때 아버지는 쌀 도매상을 했다. 행복은 잠시뿐이었다. 아버지는 언제부턴가 무위도식했다. 중학교 때 가세는 급격히 기울었다. 부모는 별거를 했다. 어머니 혼자 억척스럽게 두 아들을 키웠다. 대학 신입생 때 회비가 없었다. 어머니는 “주눅 들지 말라”며 저금통을 깼다. 10원짜리 동전까지 탈탈 털어서 회비를 냈다. 명지대에서 반짝했지만 앞이 보이지 않았다. 가난도 계속 그를 짓눌렀다. 어머니의 돈벌이도 시원치 않았다. “빨리 돈이나 벌자”고 생각했다. 공사판 막노동부터 엑스트라, 광고 모델까지 닥치는 대로 일을 했다. 그러다 입영 영장이 나왔다. 강원도 철원 6사단 ‘땅개’(보병)였다. 어느 날 부대로 경북과학대 은사인 한 감독이 찾아왔다. 상명대 사령탑으로 자리를 옮긴 그는 “나랑 농구 계속하자”는 말을 남기고 떠났다. 가슴이 벅찼다. ■ 1류 선수를 꿈꾸다 하루 훈련을 마치면 파김치가 됐다. 하지만 임상욱은 그게 끝이 아니었다. 야간 자율훈련 시간에 다시 체육관으로 나갔다. 아무도 없는 캄캄한 체육관에서 500개씩 슈팅 훈련을 했다. 이따금 설움이 복받쳤다. 흐르는 눈물을 훔치며 슛을 쏘고 또 쐈다. 500개를 다 쏘고도 200개를 더 채워야 직성이 풀렸다. 2009년 문화방송(MBC)배 대학농구 2부 리그에서 최우수선수상을 받았다. 난생처음 받는 큰 상이었다. 2부 대학에 더는 적수가 없었다. 상명대도 지난해 1부 대학으로 승격했다. 중앙대, 연세대, 고려대 등 12개 팀이 참가한 대학농구리그에서 임상욱은 3점슛왕이 됐다. 21경기에서 71개를 꽂았다. 2위와의 격차도 컸다. 경기당 평균 3개(3.4개)가 넘는 유일한 선수였다. 한 감독은 “약팀이라 오픈 찬스가 많이 안 나는데 정말 대단한 기록”이라고 평가했다. 득점도 평균 17.8점으로 전체 5위에 올랐다. 자꾸 좋은 일이 생긴다. 잘생긴 외모 덕분에 학교 홍보 포스터에도 등장했다. 이제 열흘 뒤에는 프로농구 신인 드래프트가 열린다. 초조하지만 기대가 크다. 그에게 장점이 뭐냐고 물었다. 주저 없이 “끈기와 투혼, 그리고 열정”이라며 또 함박웃음을 터뜨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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