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동훈 기자의 슬램덩크]
#장면1. 시작은 미약했다. 대구 오리온스는 프로농구 초창기 꼴찌를 두번이나 했다. 주전 선수들이 대거 군에 입대한 1998~1999시즌에는 32연패의 수모도 당했다. 명문 구단으로 가는 길은 아득해 보였다.
추일승 감독의 시작도 미약했다. 홍대부고 2학년이던 1979년 단지 키(1m86)가 크다는 이유로 체육교사의 눈에 띄어 농구부에 들어갔다. 같은 재단인 홍익대를 거쳐 실업팀 기아자동차에 입단했다. 하지만 센터치고는 키가 작았고 한기범, 김유택의 그늘에 가려 선수 생활은 변변치 못했다.
#장면 2. 오리온스에 기회가 왔다. 드래프트 3순위로 뽑은 김승현이 대박을 터뜨렸고, 두 외국인 선수 마르커스 힉스와 라이언 페리맨이 펄펄 날았다. 2001~2002 시즌 정상은 오리온스(당시 동양 오리온스) 차지였다. 이듬해에도 정규리그 우승에 이어 챔피언결정전에 진출했지만 아쉽게 준우승에 그쳤다. 그래도 2006~2007 시즌까지 당시로선 국내 최초로 6년 연속 플레이오프에 진출하며 ‘농구 명가’의 기반을 닦았다.
추일승 감독에게도 기회가 왔다. 2003년 6월, 여수 코리아텐더 감독으로 프로팀 사령탑을 맡았다. 이듬해 부산 케이티에프(KTF)에 인수된 팀을 정규리그 4위, 4위, 3위로 이끌며 3년 연속 플레이오프에 진출시켰다. 2006~2007 시즌에는 전문가들의 예상을 깨고 챔피언결정전까지 올라 울산 모비스와 7차전까지 가는 명승부를 펼쳤다. 비록 3승4패로 우승 문턱에서 주저앉았지만 ‘명장’의 기반을 닦았다.
#장면 3. 오리온스에 시련이 찾아왔다. 오리온스는 최근 4년 연속 10위, 9위, 10위, 10위를 기록했다. ‘김승현 파동’으로 입길에 올랐고, 2007년부터 2년 동안 3명의 감독을 갈아치우기도 했다. ‘감독들의 무덤’이라는 비난도 들었다.
추일승 케이티에프 감독에게도 크나큰 시련이 찾아왔다. 2008~2009 시즌 최하위에 머물렀다. 프로농구 현역 명장들도 해마다 좋은 성적을 내는 것은 아니다. 누구나 최하위권으로 곤두박질쳐 본 경험이 있다. 그런데 추 감독은 딱 한번 좋지 못한 성적을 냈다. 추 감독이 “동료 선수의 영혼을 깨우고 심장을 뛰게 하는 선수”라고 칭찬했던 조성민과 김도수가 군에 입대한 틈이었다. 부상 선수마저 속출하며 추 감독 특유의 공수 전환을 빨리하는 ‘트랜지션 게임’을 구사할 수 없었다. 그런데 하필 3년 계약이 끝나는 해였다. 한마디 변명도 하지 않았고 감독직에서 조용히 물러났다.
‘닮은꼴’ 오리온스와 추일승 감독이 만났다. 추 감독은 “선수단을 장악할 시간(4년)과 권한”을 요구했고 심용섭 오리온스 단장은 이를 받아들였다. 심 단장은 “구단 경영의 한 축으로 생각하고 운영 전반에 걸쳐 역할을 맡기겠다”고 했다. 절치부심하며 명예회복에 성공하는 것도 닮을지 궁금하다. 김동훈 기자 cano@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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