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경률 선수는 20대의 나이에 세계 당구계를 제패해 세계를 깜짝 놀라게 했다. 당구의 종주대륙이 아닌 비유럽권 선수로서는 무척 이례적인 일이었다. 지난해 11월 서울 잠실종합운동장 체조관에서 열린 제67회 세계 스리쿠션 선수권 대회에서 김 선수가 경기를 하고 있다.(위) 맨 위 작은 사진은 2012년 김경률 선수가 빌리어즈 매거진의 사진 촬영에 응한 모습. 빌리어즈 매거진 제공
[토요판] 뉴스분석, 왜?
당구왕 고 김경률
당구왕 고 김경률
▶ 22일 설 연휴 마지막날 당구계 거물 김경률 선수의 부고 소식이 전해졌습니다. 전도유망한 선수의 갑작스런 죽음에 국내외 당구계가 큰 충격에 빠졌고 애도를 표하고 있습니다. 김경률 선수가 그간 이뤄낸 당구의 업적은 놀라움 그이상이었습니다. 김 선수를 오랫동안 지켜봐온 당구 매체 <빌리어즈 매거진> 김주석 편집장이 김 선수의 과거를 재조명했습니다. 김경률은 이렇게 보내기엔 너무 아까운 선수였습니다.
지난 22일 불의의 사고로 안타깝게 숨진 김경률(35) 선수는 한국 당구 역사상 가장 위대한 선수로 평가받는다. 그는 가슴에 태극마크를 단 한국 국적의 당구선수로는 월드컵에서, 그것도 한국이 아닌 유럽에서 열린 월드컵에서 최초로 챔피언이 되었다.
전통의 유럽 강자들 중심에서 벗어나지 못한 세계 스리쿠션(3 cushion·흰색 공을 쳐서 첫번째 목적구를 맞힌 뒤 다시 흰색 공이 당구대 쿠션에 세번 이상 맞은 다음 두번째 목적구를 맞히는 경기) 당구계의 한계를 뛰어넘은 몇 안 되는 선수 중 한 명으로 인정받고 있다. 김경률과 함께 세계 스리쿠션의 판세에 영향을 미쳤던 비유럽권 선수로는 1990년대에 이름을 날렸던 이상천(2004년 56살의 나이로 별세) 대한당구연맹 전 회장이나, 70~80년대에 활동했던 일본의 고바야시 노부아키 정도를 손에 꼽는다. 김경률이 이 전 회장보다 기술이 좋다거나, 고바야시처럼 화려한 세계대회 입상 경력을 갖고 있지는 않지만 그들보다 더 높이 평가를 받는 데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다.
이 전 회장이나 고바야시는 40대에 두각을 나타내며 전성기를 이룬 반면, 김경률은 20대 중반의 어린 나이에 챔피언이 되었다. 스리쿠션 종목의 특성상 경험이 부족한 20~30대 선수는 세계 무대에서 주목받기가 어렵다. 더구나 그는 뒤늦게 당구를 시작했는데도 불과 데뷔 4년 만에 세계 정상권에 진입했다.
이상천 전 회장이나 고바야시 같은 선수는 물론이고, 스리쿠션의 ‘4대 천왕’이라 불리는 딕 야스퍼르스(네덜란드), 다니엘 산체스(스페인), 토르비에른 블롬달(스웨덴), 프레데리크 코드롱(벨기에)의 ‘빅4’ 조차도 상당히 오랜 시간 트레이닝을 거쳐 그 자리에 올라섰다. 김경률은 타고난 재능과 열정, 노력의 삼박자가 맞아 탄생한 당구계의 거목이었다.
이상천과 김경률, 그리고 최성원
지난 24일 한국 선수로는 최초로 세계캐롬당구연맹(UMB)에서 선정하는 ‘올해의 선수상’을 수상하기 위해 벨기에로 출국했던 최성원(37·부산시체육회)이 급하게 귀국했다. 고양시의 명지병원 장례식장으로 곧장 달려온 최성원은 끝내 참았던 눈물을 쏟았다.
김경률과 최성원은 서로 의지했다. 그들의 인연은 무척 깊다. 최성원은 20살이던 96년 고등학생 김경률과 부산에서 처음 마주쳤다. 이제 막 당구를 배우기 시작한 풋내기 고등학생 김경률은 부산 아마추어 중에서 이름깨나 날리던 최성원에게 감히 범접하지 못했다. 그때는 김경률이 최성원을 넘어서기 위해 노력했다. 김경률을 한참 아래로 생각했던 최성원은 그의 성장을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얼마 뒤 김경률은 최성원을 비롯한 부산의 잘나가는 아마추어를 모조리 꺾고 최성원에게 당구선수가 되자고 제안했다. “성원이 행님, 서울로 안 갈래예?”
김경률은 서울로 와 당구선수가 되고 싶어했다. 2002년 부산에서 열렸던 아시안게임에서 황득희 선수와 이상천 전 회장의 결승전을 본 뒤 꼭 당구선수가 되어서 저 자리에 올라가겠노라고 결심한 터였다. 최성원은 그때까지 당구선수가 될 마음은 없었고, 부산을 떠나는 것도 싫었다.
김경률이 먼저 서울로 올라와 2003년 2월 당구선수가 되었다. 7개월 뒤 김경률은 ‘에스비에스(SBS) 한국당구 최강전’ 3차대회 결승전에 올라가 텔레비전에 나왔다. 아쉽게 패했지만, 당시 23살이었던 김경률의 준우승은 화제를 모았다. 7개월 전 한낱 지방의 아마추어에 불과했던 김경률은 어느새 전국에 이름을 알리게 되었다. 이상천에서 김경률, 다시 김경률에서 최성원으로 이어지는 한국 스포츠 당구의 계보는 여기서부터 출발한다.
지난 10여년의 시간은 130여년 한국 당구 역사상 가장 큰 변화를 맞은 역동의 시기였다. 조선 말 개항기 일본을 통해 한국에 들어온 당구는 철저히 상업성을 띠었다. 그 뒤 당구는 한국에서 130여년 동안 오락으로만 인식되었다. 이런 당구가 스포츠로 진화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었다. 당구선수는 음지에서 설움을 받아야 했고, 연맹체를 구성하고 대한체육회의 정식 가맹 단체가 되기까지 숱한 시행착오를 겪었다.
2000년대 들어서 스포츠로 본격적인 도약을 도모한 당구는 그동안의 이미지를 씻어줄 ‘스타 플레이어’가 필요했다. 그런데 막상 그 역할을 해줄 선수가 없었다. 당시에 혜성처럼 등장한 사람이 있었는데, 그가 바로 20년 만에 미국에서 돌아온 이상천 전 회장이다. 세계적 스타플레이어 출신인 이 전 회장이 2004년 초 한국으로 건너와 대한당구연맹 회장직을 맡았다. 한국 당구는 모든 게 바뀌기 시작했다.
장기적인 안목으로 미래를 내다본 이 전 회장은 자신의 뒤를 이을 후배 선수의 필요성을 인식하고, 한국의 후배 당구선수들을 키우기 위한 구조를 본격적으로 구축했다. 그때 당구선수가 된 지 1년밖에 되지 않은 김경률이 이 전 회장의 눈에 들어왔다. 이 전 회장은 김경률의 재목을 알아보고 모 당구대 회사의 스폰서 계약부터 연결해주었다.
첫 스폰서가 생긴 김경률은 훈련에만 집중할 수 있게 되었다. 매일 새벽 6시에 일어나 밤 10시까지 규칙적인 프로그램을 따라 훈련에만 몰입했다. 이상천 전 회장은 그런 김경률을 직접 데리고 다니며 경험을 쌓을 수 있게 도와주기도 했다. 김경률은 하루가 다르게 성장했다.
김경률은 대한당구연맹 등록선수가 된 지 3년 만에 2006 도하 아시안게임 국가대표로 선발되었다. 불과 데뷔 3년 만에 대한민국 ‘스리쿠션 1인자’가 되었다는 이야기다. 당구처럼 정신력과 체력의 복합적 요소가 세밀한 부분까지 영향을 미치는 스포츠도 드물다. 경기에서 상대해야 할 경쟁자는 국내에만 무려 800여명이나 된다. 대회에서 우승을 하려면 꼬박 사흘 동안 8~9경기 이상을 소화해야만 한다. 어떤 엘리트 개인종목보다도 전국대회에서 우승하는 것이 쉽지 않다.
그런 상황에서 김경률이 선수가 된 지 3년 만에 국가대표가 되었다는 것은 놀라운 일로 평가받는다. 김경률은 나아가 데뷔 4년 만에 세계 정상권의 대열에 올라섰다. 2010년 2월에는 터키 안탈리아에서 열린 스리쿠션 월드컵에서 딕 야스퍼르스(당시 세계랭킹 1위)를 3-2로 꺾고 한국 선수 최초로 월드컵 챔피언이 되기도 했다. 8년차인 2011년 2월에는 세계랭킹 2위에 올라 세계 당구계를 놀라게 만들었다.
김경률은 2000년대 이후 10여년이라는 오랜 시간 동안 스리쿠션 ‘세계 톱랭커 12인’에서 밀려나지 않은 유일한 비유럽권 선수였다. 세계 당구사에서도 당구의 종주대륙인 유럽에 소속되지 않은 선수 중에 이렇게까지 활약한 선수는 아직 김경률 말고는 없다.
이런 그를 두고 당구인들은 ‘백년에 한 번 나올까 말까 한 선수’라고 극찬을 아끼지 않는다. 지난해 나와 인터뷰했던 한 국내 톱 랭커는 “김경률에게 한두 경기를 이길 수는 있어도 절대로 따라갈 수 없다”고 표현하기까지 했다. 경기에서 김경률의 카리스마에 기가 눌리고 멘탈이 무너지는데 도무지 원인을 알 수 없다고 말했다.
통역도 없이 혼자 다녔던 선수
20대 중반에 세계를 제패했다
스리쿠션 4대천왕들도 못했던 일
‘톱랭킹 12위’ 10여년 유지는
비유럽권으로선 김경률이 처음 2003년 김경률이 등장하기 전
한국 당구는 40~50대가 주선수층
세계 무대 출전 주저해 스스로
변방 머물렀지만 김경률은 달랐다
한국 당구 모든 것을 바꾼 김경률 그로 인해 당구는 ‘스포츠’로 거듭났다 단언컨대 한국 당구는 ‘김경률 이전과 이후’로 나뉜다. 김경률 이전의 한국 당구는 성장통을 앓는 미생의 스포츠에 불과했지만, 김경률 이후 한국 당구는 완전한 스포츠로 거듭났다. 당구선수들이 활동을 시작한 80년대부터 김경률이 데뷔한 2003년 이전까지 20년 넘게 한국 당구는 40대부터 50대까지의 선수들이 두각을 나타냈다. 상위권에 올라 있던 그들은 국내에 만족할 뿐 세계 무대에는 좀처럼 도전하지 않았다. 선수들이 세계 무대에 도전하여 성적을 올리고 언론을 통해 대중에게 당구라는 스포츠와 선수의 존재를 알려야 하는데, 세계 무대에 아예 나가지를 않으니 당구의 스포츠화는 점점 늦춰졌고, 세계적인 선수와도 실력 차가 계속 벌어졌다. 2000년대 중반까지는 벌어진 실력 차가 너무 커서 영원히 따라잡지 못할 것이라는 의견이 우세했다. 이런 현실을 뜯어고치고자 애썼던 이상천 전 회장이 2004년 말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나자 그들은 다시 우물 안으로 모여들기 시작했다. 한국 당구는 과거로 돌아갔고 미래가 불투명해졌다. 그때 갑자기 김경률이 혼자서 세계 무대를 두드리기 시작했다. 말도 안 통하는 유럽에서 통역도 없이 혼자 손짓 발짓의 의사소통을 하며 월드컵에 출전하기 시작했다. 워낙 넉살 좋고 낙천적이며 겁 없는 성격을 가진 김경률이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때부터 세계 당구계는 김경률과 한국 당구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매년 5~7회 열리는 월드컵 투어 성적과 세계선수권대회, 각 대륙별선수권대회, 국내 랭킹을 반영하여 산정되는 세계 랭킹에서 김경률은 2007년 한국 선수 최초로 12위 안에 진입했다. 세계 랭킹 12위 안에 들어가면 월드컵 본선에 직행할 수 있는 시드 배정과 함께 항공권, 호텔비 등이 제공된다. 월드컵 출전 비용에만 매년 1000만~2000만원이 필요했기 때문에 김경률은 ‘톱 랭킹 12’에 꼭 들어가야 했다. 김경률은 그 후 무려 10년 동안이나 그 자리에서 내려오지 않았다. 김경률 이후 한국 당구계는 스스로 진화했다. 한참 비상해 있는 김경률을 목표로 최성원이 선수 데뷔를 했고, 허정한, 조재호, 이충복, 강동궁과 같은 걸출한 젊은 선수들도 두각을 나타내며 나이 많은 선배들을 하나둘 밀어내기 시작했다. 이런 젊은 선수들을 중심으로 당구는 다시 활기를 찾았다. 모든 선수들이 언론 인터뷰 때 김경률을 언급했다. 모두 김경률을 이기고 싶어했고, 김경률과 함께 그가 닦은 길을 가는 것이 그들의 최종 목표였다. 당구는 2011년 전국체전 정식종목이 되었고, 서울시청과 수원시청, 충남당구연맹 등에 사상 첫 실업팀이 구성되기도 했다. 어린 학생 선수들이 당구를 치기 시작하며 2011년부터 한국체육대학과 국민대에서 매년 당구 특기생을 뽑고 있다.
‘우승상금 1억원 대회’ 만들려던 꿈
김경률에게는 꿈이 있었다. 1층에는 식당, 2층에는 당구클럽, 3층부터 5층까지는 원룸으로 된 건물을 갖고 싶다고 했다. 그는 동료 선수들에게 더 이상 생계 걱정 하지 않고 배불리 먹고, 맘껏 당구 치고, 편하게 쉴 수 있는 공간을 만들어주고 싶어서 건물을 갖고 싶다고 했다.
그래서 그는 지난해 중순부터 본격적인 사업을 시작했다. 한국 당구의 시스템이 진화하지 못하고 있는 것에 대한 안타까움에 직접 돈을 벌어서 후배와 동료 선수들에게 ‘우승 상금 1억원’ 대회를 만들어주는 것이 소원이었다. 그렇게 좋아하는 당구를 많이 치지 못하는 것조차 감수하고 열심히 뛰어다녔지만, 결과가 그리 좋지 않았다. 김경률은 최근 다시 본업인 당구선수로 돌아왔다.
“행님, 내한테 일주일이면 다 됩니다.” 김경률은 항상 이런 자신감을 표출했다. 일주일이면 다시 예전처럼 당구 실력이 돌아온다는 얘기였다. 이번 설 명절 전 김경률은 동료와 관계자들에게 ‘사업 다 접고 다시 열심히 당구선수로 활동하겠다’는 뜻을 전했다.
그런데 설 연휴 마지막날인 지난 22일 오후 3시5분, 뜻하지 않은 비극이 일어났다. 그의 부모님 댁 아파트 20층 베란다에서 김경률은 추락했다. 자살이냐, 사고사냐를 놓고 경찰과 유족의 의견은 다르다. 김경률을 아는 사람은 절대로 자살할 이유가 없다고 했고, 경찰은 아파트 베란다에서는 일부러 뛰어내리지 않는 한 떨어질 수 없다며 자살로 추정했다. 사업 실패로 빚더미에 앉았다는 근거없는 이야기까지 퍼졌다.
유족에 따르면 김경률은 지금까지 당구용품 판매, 당구클럽 운영 등 당구와 관련된 사업에 주로 투자해왔다. 이번 사업 역시 비슷한 형태로 김경률이 투자하여 만든 당구클럽을 소속 선수들이 관리하고 운영하는 사업이었다. 그리 크지 않은 규모여서 진 빚도 별로 없는 것으로 전해졌다. 김경률은 현재 10억원이 넘는 자산이 남아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경제적으로 전혀 어려울 게 없다는 것이 유족 쪽의 이야기다.
게다가 그의 아내는 현재 임신 4개월 중이고 어머니는 유방암 수술 뒤 암이 다른 장기로 전이돼 투병 중이어서 평소 김경률의 성격을 볼 때 도저히 자살할 수 없는 상황이라고 덧붙였다. 그의 아내는 “어머니가 아프셔서 어머니와 같은 동네에 살려고 이사를 검토하고 있었다. (남편이) 방 청소를 하고 베란다 청소를 한 것도 명절 연휴 끝나고 새집 구해질 때까지 어머니와 같이 살기로 했기 때문”이라며 자살설을 부인했다.
김경률이 과연 스스로 삶을 포기했을까? 암 투병 중인 어머니와 어린 딸, 그리고 뱃속의 아이를 생각하고도 20층 아래로 스스로 몸을 던질 수 있을 만큼 모질었을까? 큐대 한 자루를 들고 세계를 누비며 목표를 이루기 위해 10년 동안 쉬지 않고 달렸던 김경률이 돈 몇 푼 따위에 나약해진 마음으로 그 모든 꿈을 포기하고 남은 이를 등질 만큼 어리석었을까?
2015년 불의의 사고를 당해 한국 당구의 전설로 남게 된 김경률 선수의 명복을 빈다.
김주석 <빌리어즈 매거진> 편집장
24일 세계캐롬당구연맹(UMB) 공식 누리집 첫 화면에 게재된 김경률 선수 추모 사진. 연맹 누리집 갈무리
20대 중반에 세계를 제패했다
스리쿠션 4대천왕들도 못했던 일
‘톱랭킹 12위’ 10여년 유지는
비유럽권으로선 김경률이 처음 2003년 김경률이 등장하기 전
한국 당구는 40~50대가 주선수층
세계 무대 출전 주저해 스스로
변방 머물렀지만 김경률은 달랐다
한국 당구 모든 것을 바꾼 김경률 그로 인해 당구는 ‘스포츠’로 거듭났다 단언컨대 한국 당구는 ‘김경률 이전과 이후’로 나뉜다. 김경률 이전의 한국 당구는 성장통을 앓는 미생의 스포츠에 불과했지만, 김경률 이후 한국 당구는 완전한 스포츠로 거듭났다. 당구선수들이 활동을 시작한 80년대부터 김경률이 데뷔한 2003년 이전까지 20년 넘게 한국 당구는 40대부터 50대까지의 선수들이 두각을 나타냈다. 상위권에 올라 있던 그들은 국내에 만족할 뿐 세계 무대에는 좀처럼 도전하지 않았다. 선수들이 세계 무대에 도전하여 성적을 올리고 언론을 통해 대중에게 당구라는 스포츠와 선수의 존재를 알려야 하는데, 세계 무대에 아예 나가지를 않으니 당구의 스포츠화는 점점 늦춰졌고, 세계적인 선수와도 실력 차가 계속 벌어졌다. 2000년대 중반까지는 벌어진 실력 차가 너무 커서 영원히 따라잡지 못할 것이라는 의견이 우세했다. 이런 현실을 뜯어고치고자 애썼던 이상천 전 회장이 2004년 말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나자 그들은 다시 우물 안으로 모여들기 시작했다. 한국 당구는 과거로 돌아갔고 미래가 불투명해졌다. 그때 갑자기 김경률이 혼자서 세계 무대를 두드리기 시작했다. 말도 안 통하는 유럽에서 통역도 없이 혼자 손짓 발짓의 의사소통을 하며 월드컵에 출전하기 시작했다. 워낙 넉살 좋고 낙천적이며 겁 없는 성격을 가진 김경률이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때부터 세계 당구계는 김경률과 한국 당구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매년 5~7회 열리는 월드컵 투어 성적과 세계선수권대회, 각 대륙별선수권대회, 국내 랭킹을 반영하여 산정되는 세계 랭킹에서 김경률은 2007년 한국 선수 최초로 12위 안에 진입했다. 세계 랭킹 12위 안에 들어가면 월드컵 본선에 직행할 수 있는 시드 배정과 함께 항공권, 호텔비 등이 제공된다. 월드컵 출전 비용에만 매년 1000만~2000만원이 필요했기 때문에 김경률은 ‘톱 랭킹 12’에 꼭 들어가야 했다. 김경률은 그 후 무려 10년 동안이나 그 자리에서 내려오지 않았다. 김경률 이후 한국 당구계는 스스로 진화했다. 한참 비상해 있는 김경률을 목표로 최성원이 선수 데뷔를 했고, 허정한, 조재호, 이충복, 강동궁과 같은 걸출한 젊은 선수들도 두각을 나타내며 나이 많은 선배들을 하나둘 밀어내기 시작했다. 이런 젊은 선수들을 중심으로 당구는 다시 활기를 찾았다. 모든 선수들이 언론 인터뷰 때 김경률을 언급했다. 모두 김경률을 이기고 싶어했고, 김경률과 함께 그가 닦은 길을 가는 것이 그들의 최종 목표였다. 당구는 2011년 전국체전 정식종목이 되었고, 서울시청과 수원시청, 충남당구연맹 등에 사상 첫 실업팀이 구성되기도 했다. 어린 학생 선수들이 당구를 치기 시작하며 2011년부터 한국체육대학과 국민대에서 매년 당구 특기생을 뽑고 있다.
2012년 김경률 선수가 빌리어즈 매거진의 사진 촬영에 응한 모습. 빌리어즈 매거진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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