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집 대한체육회 고문
김성집 대한체육회 고문 타계
일본인 압도 역도 기량에도
36년 베를린 올림픽 출전 좌절
60년대 이후 체육행정가 길
일본인 압도 역도 기량에도
36년 베를린 올림픽 출전 좌절
60년대 이후 체육행정가 길
올림픽 영웅이자 체육계의 큰 별인 김성집 대한체육회 고문이 20일 오후 노환으로 별세했다. 향년 97.
고 김성집 고문은 역도선수로 1948년 런던올림픽에 출전해 우리나라에 해방 이후 첫 메달을 안겼고, 현역에서 은퇴한 뒤에는 체육 행정가로 큰 족적을 남겼다.
1919년 서울 출생인 김 고문이 역도와 인연을 맺은 것은 휘문고등보통학교(중고등학교) 때였다. 15살이던 2학년 때 체육교사인 서상천 선생이 운영하는 중앙체육연구소에 발을 들여놓으면서 그의 운명은 바뀌었다. 김 고문은 국내에 역도를 처음 도입한 서상천 선생의 지도를 받으며 실력을 키웠다. 그해 전조선 역기대회 경체급에서 5위를 기록했고, 2년 뒤에는 중체급에서 국내 챔피언에 올랐다.
김 고문은 1936년 베를린올림픽을 앞두고 조선은 물론 일본 선수들을 넘어서는 기량을 보였지만 올림픽에는 출전할 수 없었다. 일본역도연맹이 ‘만 18살이 되지 않은 미성년자는 안 된다’며 올림픽 출전을 막았다. 김 고문은 당시 올림픽 조선 예선대회에서 우승을 차지했고, 전일본 역기선수권대회에서도 우승자보다 55㎏을 더 들어올렸지만 끝내 올림픽에는 나갈 수 없었다.
김 고문의 올림픽 출전 꿈은 이후에도 10년이 넘도록 미뤄졌다. 1940년과 1944년 올림픽이 제2차 세계대전의 영향으로 무산됐기 때문이다. 1945년 해방 이후 모교인 휘문중에서 역도부 후배들을 가르치던 김 고문은 1948년 런던올림픽에서 마침내 태극기를 달고 첫 도전에 나섰다. 남자역도 미들급에서 합계 380㎏의 기록으로 동메달을 획득하면서 해방 이후 올림픽 첫 메달을 기록했다. 김 고문은 한국전쟁 중이던 1952년 헬싱키올림픽에서는 선수 겸 감독으로 출전해 75㎏급에서 또다시 동메달을 목에 걸었다.
1956년 멜버른올림픽 5위를 끝으로 현역에서 은퇴한 김 고문은 1960년 대한체육회 이사가 되면서 행정가의 길을 걸었다. 체육회 사무총장과 태릉선수촌장, 체육회 부회장 등을 역임했다. 특히 역대 최장수(13년7개월) 선수촌장을 역임하며 후배들을 지도했다. 일선에서 물러난 뒤에도 2001년부터 체육회 고문을 맡아 지금까지 체육계를 위한 고언을 아끼지 않았다. 빈소는 서울아산병원에 마련됐다. 발인은 23일 오전 8시. (02)3010-2263.
이찬영 기자 lcy100@hani.co.kr
남자역도 미들급에서 합계 380㎏의 기록으로 동메달을 획득하면서 해방 이후 올림픽 첫 메달을 기록한 김성집 대한체육회 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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