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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상] ‘20세기 최고의 복서’ 무하마드 알리 떠나다

등록 2016-06-04 13:50수정 2016-06-05 11:25

무하마드 알리. 사진 AP연합
무하마드 알리. 사진 AP연합
향년 74세…1960~1970년대 풍미 헤비급 복서
은퇴 후 1984년 파킨슨병 진단 받고 투병
20세기 최고의 프로권투 헤비급 세계챔피언 무하마드 알리가 3일(현지시간) 세상을 떠났다. 향년 74살.

그의 대변인 밥 거닐은 이날 성명을 통해 “32년 동안 파킨슨 병을 앓은 끝에 알리가 사망했다”고 밝혔다.

알리는 미국 애리조나주 피닉스의 한 의료기관에서 생명보조 장치에 의존해 투병해왔고 가족들은 그의 임종을 지켰다.

알리는 금세기 최고의 권투선수였다.

■ 캐시어스 클레이 시절

1942년 켄터키주 루이빌에서 태어난 알리는 본명이 캐시어스 클레이로 12살 때 60달러짜리 자신의 자전거를 잃어버린 뒤, 도둑을 혼내주겠다며 처음 권투 도장을 찾으면서 권투를 시작했다. 천부적인 소질을 타고난 그는 승승장구 하면서 1960년 로마올림픽에서 미국 대표선수로 라이트헤비급 금메달을 땄다. 그의 아버지는 금의환향한 아들을 위해 파티를 열면서 성조기를 내걸고 미국 국가를 불렀다. 18살의 알리도 한동안 금메달을 목에 걸고 다녔다. 그러던 중 우연히 백인식당에 들어갔다가 “검둥이한테는 음식을 팔지 않는다”는 말을 듣고 충격에 빠진 상태에서 불량배들이 자신의 금메달을 빼앗으려 하자, 이를 뿌리친 뒤, 스스로 오하이오강에 금메달을 던져버렸다. 미국을 위해 나섰지만, 인종차별이 극심한 당시 미국 사회의 모순에 저항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는 “더이상 검둥이로 살지 않겠다”고 맹세하며 프로로 전향했다.

프로 전향 이후에도 승리를 거듭하는 그는 190cm의 큰 키와 빠른 발놀림, 그리고 쉴새없이 퍼붓는 컴비네이션 블로와 상대방 공격할 때 그 빈틈을 찌르는 카운터펀치 등이 주특기였다.

미국의 전설적인 헤비급 복서 무하마드 알리가 3일(현지시간) 향년 74세로 별세했다. 그의 대변인 밥 거닐은 이날 성명을 통해 “32년 동안 파킨슨 병을 앓은 끝에 알리가 사망했다”고 밝혔다. 사진은 2012년 2월 22일 피닉스 소재 신경외과 병원 BNI(Barrow Neurological Institute)에서 포즈를 취한 알리의 모습. 연합뉴스
미국의 전설적인 헤비급 복서 무하마드 알리가 3일(현지시간) 향년 74세로 별세했다. 그의 대변인 밥 거닐은 이날 성명을 통해 “32년 동안 파킨슨 병을 앓은 끝에 알리가 사망했다”고 밝혔다. 사진은 2012년 2월 22일 피닉스 소재 신경외과 병원 BNI(Barrow Neurological Institute)에서 포즈를 취한 알리의 모습. 연합뉴스

그는 1964년 당시 막강한 세계챔피언이었던 소니 리스튼에게 도전한다. 도박사들은 7대 1의 확률로 22살 애송이 알리보다는 리스튼의 승리를 점쳤다. 그러나 시합 전 기자회견에서 알리는 쉴새없이 지껄이며 자신이 이긴다고 큰 소리쳤다. 그의 트레이드 마크가 된 “나비처럼 날아서 벌처럼 쏘겠다”(Float like a butterfly, sting like a bee)는 말은 이때 처음 나왔다.

막상 시합이 시작되자, 예상과 달리 패기넘친 알리의 발과 주먹이 빛나면서 리스튼은 7회 경기를 포기하고, 링 위에서 알리는 펄쩍펄쩍 뛰면서 세계챔피언 등극을 자축한다. 신화가 시작되는 순간이다.

■ 무하마드 알리의 탄생

이듬해 리스튼과의 재대결에서 알리는 1회 KO승을 거두고 드러누운 리스튼을 향해 “일어나라 이 곰아”라고 외친다. 이후 그는 ‘노예의 이름을 버리겠다’며 자신의 이름을 자신이 존경했던 흑인 행동주의자 말콤 엑스를 본따 ‘캐시어스 엑스’로 바꾼다. 이후 이슬람으로 개종하면서 ‘무하마드 알리’가 된다.

알리는 1967년까지 계속 도전자를 물리치면서 왕좌를 지켜나간다. 그러나 베트남전이 그를 가로막았다.

당시 미국은 베트남전을 위해 징집제를 실시해 당시 최고의 인기스타였던 엘비스 프레슬리도 징집병으로 월남전에 참전하기도 했다. 그러나 당시 젊은이들처럼 베트남전을 반대하던 알리는 “베트콩은 나를 검둥이라고 무시하지 않는데, 내가 왜 베트남 사람들을 죽여야 하느냐”며 병역을 거부했다.

그러자 알리는 세계챔피언을 박탈당했고, 선수 자격정지에 법원으로부터 5년의 실형을 언도받기도 했다. 권투선수로서 사형선고를 받은 그는 그러나 계속 법정투쟁을 벌여나갔다. 그리고 1970년 무죄 판결을 받아냈다.

알리는 3년만에 링에 다시 올랐다. 그러나 가장 최전성기를 누렸을 20대 후반을 날려보냈고, 그 사이 세계챔피언 자리는 불세출의 인파이터 조 프레이저가 차지하고 있었다. 1971년 알리는 프레이저와 뉴욕 매디슨스퀘어 가든에서 맞붙었다. 둘 다 무패였다. 그러나 알리는 이 시합에서 첫 다운과 첫 패배를 당한다. 이후 알리는 신예 켄 노튼과의 대결에서 턱이 부서지는 수난을 겪으며 또 패한다. 알리도 이미 서른을 넘어섰다.

미국의 전설적인 헤비급 복서 무하마드 알리가 3일(현지시간) 향년 74세로 별세했다. 그의 대변인 밥 거닐은 이날 성명을 통해 “32년 동안 파킨슨 병을 앓은 끝에 알리가 사망했다”고 밝혔다. 사진은 1975년 10월 1일 필리핀 마닐라에서 알리(오른쪽)가 라이벌인 조 프레이저와 세계 헤비급 챔피언 타이틀전을 벌이고 있는 모습. 연합뉴스
미국의 전설적인 헤비급 복서 무하마드 알리가 3일(현지시간) 향년 74세로 별세했다. 그의 대변인 밥 거닐은 이날 성명을 통해 “32년 동안 파킨슨 병을 앓은 끝에 알리가 사망했다”고 밝혔다. 사진은 1975년 10월 1일 필리핀 마닐라에서 알리(오른쪽)가 라이벌인 조 프레이저와 세계 헤비급 챔피언 타이틀전을 벌이고 있는 모습. 연합뉴스

■ 권투황제, 제2의 신화

1974년 알리는 자이레 킨샤사에서 당시 무적의 세계챔피언 조지 포먼과 맞붙는다. 모든 사람이 32살 도전자보다 26살 챔피언의 KO승을 예상했다. 조지 포먼의 당시 전적은 39전39승(36KO)였고, 알리에게 첫 패배를 안겼던 조 프레이저가 포먼에게 6번이나 다운당하는 수모를 겪으면서 2회에 KO패 했다. 그러나 알리는 20대 시절의 힘 대신 30대의 노련미를 더했다. 초반 기세를 무력화 시키며 라운드를 더해간 뒤, 현저히 스피드가 떨어진 포먼을 중반 이후 몰아붙이기 시작했다. 포먼은 워낙 강펀처여서 대부분 경기를 초반에 끝내버려 중반 이후까지 시합을 해본 적이 거의 없었다. 알리는 이 점을 노린 것이다. 결국 포먼은 8회에 고목나무 쓰러지듯 알리의 맹폭에 거꾸러졌고, 알리는 7년만에 자신이 갖고 있던 헤비급 세계챔피언 자리에 다시 올랐다.

알리는 이후에도 계속 방어전에서 승리를 거듭했고, 그 가운데는 숙명의 라이벌 조 프레이저, 조지 포먼에 맞먹는 강펀처 대머리 어니 세이버스 등도 포함됐다.

그러나 알리의 진가는 링 바깥에서 더 빛났다. 알리는 단순히 권투만 잘하는 선수가 아니었고, 풍부한 쇼맨십, 링 아나운서의 마이크를 빼앗은 채 쉴새없이 지껄이는 화려한 언변 등으로 그는 1970년대 미국 대중문화의 아이콘으로, 만능 엔터테이너로 떠올랐다. 그리고 인종차별에 대한 당당한 항의 등이 흑인 청년들에게 자신감을 불어넣어줬고, 인종을 통틀어 권위에 대한 저항으로 비춰지기도 했다.

그는 1976년 일본의 레슬러 안토니오 이노끼와 도쿄에서 세기의 대결을 벌이기도 했다. 당시 바닥에 누워 알리를 끌어당기려 했던 이노끼와 선 채로 이노끼를 상대하려 했던 알리의 시합은 싱겁게 끝났고, 알리는 “누워서 돈 버는 건 창녀 밖에 없다”며 특유의 독설을 날리기도 했다. 이 시합 뒤, 알리는 한국을 방문해 당시 서울 시민들이 카퍼레이드를 벌인 알리에게 꽃다발을 걸어주며 환영하기도 했다.

그러나 권투선수로서 알리는 쇠잔한 기운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KO보다는 판정승이 많아졌고, 경기도 예전같은 박진감은 덜해졌다. 그러던 중 1978년 무명의 레온 스핑크스(80년대 세계챔피언 마이클 스핑크스의 형)에게 알리가 패하는 이변이 일어났다. 알리는 곧바로 스핑크스와의 재대결에서 이겨 3번째로 헤비급 세계챔피언 자리에 오르지만, 당시 언론들은 ‘늙은 나비의 피곤한 승리’ 라는 관전평을 쏟아내기도 했다.

알리는 이 시합 이후 타이틀을 반납하고 은퇴한다. 통산 19차례 방어였다.

그런데 1980년 다시 재기에 나선다. 과거 자신의 스파링파트너로 자신과 경기스타일이 흡사한 래리 홈스와의 세계타이틀 매치가 재기전이었다. 누구나 38살의 알리의 패배를 예상했으나, 늘 예상을 뒤엎는 알리였기에 ‘혹시나’하는 기대가 아주 없진 않았다. 그러나 그러기엔 너무 세월이 흘렀다. 알리는 10라운드 경기가 끝난 뒤, 링으로 나오지 않았고, 그렇게 패배했다. 다운을 당하지는 않았지만, 기권이었기에 유일한 KO패로 기록된다.

이듬해 알리는 트레버 버빅과 한 차례 대결에서 또 패한 뒤, 링을 떠났다. 통산 전적 61전 56승(37KO) 5패.

■ 조용한 말년

알리는 은퇴 3년만인 1984년 파킨슨병 진단을 받았다. 알리는 상대방의 주먹을 피하는 스타일이어서 상대적으로 주먹을 덜 맞는 편이었으나, 오랜 기간 최강의 선수들과 상대하면서 누적된 펀치드링크의 영향이 큰 듯 보인다는 분석이 나왔다. 아마 이 병이 아니었으면 은퇴 이후 알리의 삶은 또 다르게 펼쳐졌을 지도 모른다.

알리는 조용히 잊혀져 가는 와중에 1996년 미국 애틀랜타 올림픽 개막식에 성화 점화자로 등장해 다소 불편한 몸짓으로 성화를 들고 트랙을 돌면서 전 세계인들에게 ‘멈추지 않는 도전정신’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며 감동을 줬다. 이후 알리는 간간이 과거 숙명의 라이벌이었던 조 프레이저(1944~2011년)와 만나 우정을 나누기도 하면서 조용한 말년을 오랫동안 보냈다. 그의 딸 라일라 알리가 2000년대에 여자권투 슈퍼미들급 세계챔피언으로 활약하기도 했다. 아버지와 권투 스타일이 똑같았다.

알리는 최근 인종차별 발언을 서슴지 않는 공화당 대선 후보 도널드 트럼프를 향해 일침을 놓기도 했다.

알리는 2014년 12월에는 폐렴으로, 지난해 1월에는 요로 감염으로 입원 치료를 받는 등 수년간 수차례 병원을 찾았다. 알리는 올해 4월 9일 피닉스에서 열린 파킨슨병 치료 기금 모금 행사에 참석했으나 많이 쇠약해진 모습이었다. 7남 2녀를 둔 알리는 1986년 재혼한 4번째 부인 로니와 함께 최근 피닉스 인근에서 특별한 외부활동 없이 조용한 나날을 보내왔다. 그는 가족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숨을 거뒀다.

■ 무하마드 알리의 화려한 경기

권태호 기자 ho@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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