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0년 시드니올림픽 개막식 때 남북 선수단의 공동기수였던 정은순(왼쪽) 한국 여자농구대표팀 선수와 박정철 북한 유도대표팀 감독. 대한체육회 제공
“18년 전 제가 공동입장 기수를 맡아서인지 이번엔 제가 맡는 것도 아닌데 벅찬 느낌이 듭니다.”
남과 북이 평창겨울올림픽 개회식에 공동으로 입장한다는 소식을 접한 정은순(47) <케이비에스엔>(KBSN) 해설위원은 감회가 새롭다. 정 위원은 2000년 시드니올림픽 때 남북 최초의 올림픽 공동입장 당시 북한의 박정철 감독(유도)과 함께 기수를 맡았던 주인공이다.
정 위원은 10일 <한겨레>와 한 통화에서 “단일팀이 메인 스타디움에 입장할 때 전세계에서 온 관중들이 기립박수를 치고 환호했던 순간을 잊을 수 없다”며 “통일이 우리나라만의 문제가 아니라는 사실을 그때서야 깨달았다”고 말했다.
처음 남한 대표 기수로 뽑혔을 당시 정 위원은 개회식 참석을 고사했었다. “여자 농구가 8강 목표를 달성하려면 개회식 다음날 열리는 폴란드와의 첫 경기를 꼭 이겨야 했기에 컨디션 조절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했다”며 “하지만 당시 대표팀 유수종 감독이 ‘가문의 영광으로 알라’며 설득해 참석했다”고 회상했다.
남북 첫 공동입장 기수를 맡았던 정 위원과 박 감독이 만난 건 개회식날 딱 하루뿐이었다. 정 위원은 “원래 다른 선수가 북쪽 기수로 나오기로 했는데 남쪽에서 키(185㎝)가 큰 제가 기수라는 사실에 북한에서 기수를 변경했다”며 “당시 북한이 농구, 배구에서 출전권을 못 따서 키 큰 박 감독님을 기수로 선정했다더라”고 소개했다. 박 감독의 키는 178㎝로 알려졌다.
두 사람은 외국 선수들의 입장을 지켜보며 이런저런 일상적인 대화를 나눴다. “서로 ‘시합이 언제냐’, ‘기수로 뽑힌 건 언제 알았느냐’ 같은 대화였다. 그땐 어릴 때라 박 감독에게 ‘(기수를) 하라니까 하는 거다’, ‘기수인 나 때문에 팀 일정이 바뀌었다’ 그런 애기를 했던 기억이 난다”고 전했다. 그는 이어 “선수와 감독이라는 신분의 차이가 있어 당시 그분을 ‘감독님’으로 불렀다. 올림픽이 끝난 후에도 박 감독님 소식은 듣지 못했다”고 아쉬워했다.
정 위원은 이번 올림픽 때 공동입장 기수를 맡게 될 후배에게 “시드니올림픽 때 나처럼 얼마나 대단한 영광인지 모를 수 있다”며 “평생 자부심을 느끼고 살아도 될 만큼 ‘가문의 영광’이라고 생각하고 기수 역할에 성실히 임해줬으면 좋겠다”고 당부했다.
선담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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