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스포츠의 불모지였던 우리나라의 겨울올림픽 참가는 도전과 개척의 역사였다. 체력과 체격의 한계 때문에 결코 넘어설 수 없을 것 같던 ‘세계의 벽’을 하나하나씩 뛰어넘으며 겨울올림픽에서 차지하는 대한민국의 ‘영토’는 꾸준히 확장됐다.
우리나라의 겨울올림픽 첫 출전은 1948년이었다. 장크트모리츠(스위스) 대회에 스피드스케이팅 선수 3명, 임원 2명의 초미니 선수단을 파견했다. 겨울올림픽 출전은 한국전쟁 중이던 1952년을 제외하고 꾸준히 이어졌다. 1988년 캘거리(캐나다) 대회까지는 ‘참가하는 데 의미’를 둔 시기였다.
1992년 알베르빌(프랑스) 올림픽에서 첫 메달이 나왔다. 간판 스프린터 김윤만이 남자 스피드스케이팅 1000m에서 1위와 0.01초 차이로 은메달을 따낸 것이다. 실내 링크 하나 없는 빙상 후진국에 날아든 낭보였고 당시 한 신문에서는 겨울올림픽 사상 첫 메달이라는 의미를 강조하며 ‘44년 한풀이’라는 제목을 달았다. ‘김윤만의 은메달 쾌거’의 감동이 사그라들기도 전에 곧바로 남자 쇼트트랙 1000m에서 김기훈이 금메달, 이준호가 동메달을 수확했고 이틀 뒤에는 쇼트트랙 남자 5000m 계주에서 또 금메달을 거머쥐었다. 겨울올림픽에서 일찍이 경험할 수 없었던 무더기 메달 사냥이었다.
알베르빌 올림픽 때부터 정식종목이 된 쇼트트랙은 체구는 작지만 순발력이 좋은 한국 선수들에게 안성맞춤이었다. 첨단 훈련기법과 두터운 선수층을 보유한 한국은 금세 쇼트트랙 최강국의 지위에 올랐다. 1994년 릴레함메르 대회부터 2006년 토리노 대회까지는 쇼트트랙의 원맨쇼였다. 이 기간 치러진 4차례 올림픽에서 우리나라는 쇼트트랙에서만 금메달 15개, 은메달 7, 동메달 5개를 따냈다.
‘쇼트트랙 메달 편중’ 현상은 2010년 밴쿠버(캐나다) 올림픽에서 기분 좋게 해소됐다. 스무살을 갓 넘긴 스피드스케이팅 3총사(이상화·모태범·이승훈)가 깜짝 금메달을 따낸 것이다. 특히 폭발적인 스피드가 필요한 단거리 종목에서 이상화·모태범이 처음으로 시상대 맨 위에 오른 건 의미가 컸다. 밴쿠버올림픽의 피날레를 장식한 건 ‘불세출의 영웅’ 김연아였다. 2006년 토리노올림픽 때 나이 제한에 걸려 아쉽게 출전할 수 없었던 김연아는 더욱 원숙해진 기량으로 세계 최고점수(쇼트·프리 합계 228.56점)를 기록하며 ‘피겨 여왕’에 등극했다. 풀 한 포기 나지 않을 것 같던 ‘겨울스포츠 불모지’ 대한민국이 쇼트트랙에서 기반을 다지고 스피드스케이팅을 거쳐 피겨까지 정복하며 겨울스포츠의 영토를 크게 확장해 나간 것이다.
빙상 종목에서 영역을 넓혀온 우리나라는 이번 평창올림픽에서 또 한번의 도약을 꿈꾼다. 새로운 개척자는 썰매 종목에서 탄생할 가능성이 크다. 스켈레톤 세계랭킹 1위 윤성빈은 썰매 종목 첫 올림픽 금메달을 노린다. 봅슬레이 2인승 원윤종-서영우도 메달 사냥을 벼르고 있다. 설상(스키) 종목 개척자로는 사상 첫 메달을 노리는 스키 스노보드 이상호와 모굴스키 최재우 등이 거론되고 있다.
김태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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