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유가 아닌 경험, 이른바 ‘스트리밍 시대’입니다. 스트리밍은 실시간 재생 기술로, 마치 물이 흐르는 것처럼 데이터가 처리된다는 뜻입니다. <스트리밍 스포츠>에서는 새로운 흐름에 따라 시시각각 변하는 다양한 스포츠의 세계를 소개합니다.
“저희는 중계병을 가진 사람들입니다.”
이승원(46) 해설은 ‘주식회사 중계진’(이하 중계진)을 이렇게 소개했다. 중계진은 스타크래프트를 중계했던 박상현(39), 임성춘(41), 이승원(일명 ‘막청승’)씨가 중심이 된 일종의 ‘중계 플랫폼’이다. 이승원 해설은 “플랫폼도 거창하고, 동아리 정도”라고 했지만, 성장세가 가파르다. 지난해 5월 첫 방송 뒤 1년도 되지 않아 유튜브 구독자 6만명을 넘었다. 아프리카티브이(TV)에서 하는 생방송에는 평일 밤에도 수천 명의 시청자가 찾아든다. 인기의 비결이 뭘까? <한겨레>는 20일 서울 송파구에 있는 중계진 사무실에서 이들을 만났다.
서울 송파구 사무실에서 만난 중계진의 모습. 왼쪽부터 임성춘 해설, 박상현 캐스터, 이승원 해설.
■ ‘끝장전’으로 돌아온 중계진… 9-0 안 당하게 조심하셔야 할 것 같아요
다른 스포츠에 비해 이스포츠는 중계진의 인기가 많다. 스포츠에 많은 명경기가 존재하지만, 해설까지 그 명경기의 일부로 꼽히는 경우는 드물다. 그러나 이스포츠에는 유난히 그런 경기가 많다. 그중에서도 박상현, 이승원, 임성춘으로 이루어진 ‘막청승’ 조합은 팬들에게 15년째 사랑을 받으며 그 자체로 하나의 브랜드가 됐다.
사실 여기까지 오는 길은 험난했다. 특히 2010년대 들어 후속작 출시와 승부조작 사건 등으로 스타리그에 위기가 찾아왔고, 결국 리그가 폐지됐다. 세 사람도 게임단 감독, 리그오브레전드 중계 등 다른 분야와 종목에서 활동해야 했다.
중계진 스튜디오와 임성춘 해설, 박상현 캐스터, 이승원 해설의 모습.
중계진 스튜디오의 모습. 중계진은 이 화면을 통해 경기를 보며 중계를 한다.
세 사람을 다시 뭉치게 한 건 ‘팬심’이었다. 리그 폐지 뒤 전직 프로게이머들이 개인방송으로 진출했고, 이들의 경기에 목말라했던 팬들이 모여들었다. 2015년 스타리그가 부활했고, 팬들은 중계진을 다시 불러냈다. 이들이 중계하는 아프리카티브이 스타리그(ASL)는 현재 9시즌째 열리고 있다.
주식회사 중계진도 이런 성원에 힘입어 시작했다. 처음에는 걱정도 있었다. 과거와 팬 구성이 많이 달라진 게 고민이었다. 새로운 팬들은 세 사람이 활동하던 시절 경기가 아닌 개인방송에서 활동하는 전직 게이머들을 보고 팬이 된 10대가 많았다.
콘텐츠로 승부를 내야 했다. 주 콘텐츠 스타크래프트 ‘끝장전’은 팬들의 마음을 정확히 읽었다. 끝장전은 두 명의 선수가 나와 스코어에 상관없이 무조건 9번 맞붙는 대회다. 기존 5전3선승제 대회에서는 3-0이 나오면 그대로 끝나기 때문에 선수들의 경기를 더 볼 수 없다는 아쉬움이 컸다. 그러나 끝장전에서는 8-0이 나와도 마지막 경기까지 치른다. 최고 수준의 선수들을 섭외하기 때문에 경기의 질도 좋은 편이다.
개인방송에서 새롭게 생긴 선수들의 이야기도 콘텐츠에 녹여냈다. ‘환장전’이 그런 콘텐츠다. 끝장전에 나오기엔 실력이 부족하지만, 캐릭터가 독특하고 라이벌 관계인 선수들이 9경기를 치른다. 팬들은 경기 내용 자체보다도 선수들에 얽힌 이야기에 열광했다. 이들 콘텐츠는 유튜브 조회수가 많게는 50만을 넘는다. 10대 팬들도 구독자의 20%를 차지한다. 이승원 해설은 “저희 생각보다 더 많은 사랑을 받고 있다”고 했다.
주식회사 중계진의 주 콘텐츠 끝장전. 유튜브 갈무리
■ ‘여러분들은 중계진을 왜 좋아하십니까?’ 라고 물어보면은…
중계진의 가장 큰 매력은 팬과의 소통. 실시간으로 올라오는 채팅을 통해 중계진과 시청자가 대화를 나누며 경기를 본다. 박상현 캐스터는 “함께 소통하며 경기를 보기 때문에 시청자들도 단순히 방송을 보는 사람이 아닌 ‘주식회사 중계진’의 일원으로서 소속감을 느끼는 것 같다”고 했다. 임성춘 해설도 “과거 케이블 방송 때는 시청자의 의견을 뒤늦게 확인할 수밖에 없었다”면서 “확실히 달라진 중계방식”이라고 말했다.
팬들의 말과 행동이 콘텐츠가 되기도 한다. 팬들은 중계진의 이름을 이용해 ‘박상현미경’, ‘이승원숭이’, ‘임성충기생춘’, ‘중계진사갈비’ 등 닉네임을 만드는데, 이런 말장난이 방송 콘텐츠의 일부로 자리 잡았다. 이승원 해설은 “저희 셋이 오래 중계를 했기 때문에 팬들에게 주는 익숙함이 있고, 그 부분에서 매력을 느끼는 게 아닐까 생각한다”고 말했다.
중계진은 경기 대진에 상관없이 중계진을 보러 현장에 오는 팬들이 있을 정도로 인기를 끌고 있다. 유튜브 갈무리
사실 <엠비시 게임>의 해설은 전문성으로 이름이 높았다. 이승원 해설은 “<온게임넷>과 라이벌 구도가 있었고, 그쪽은 스토리 위주로 중계한다면 우리는 경기 위주로 중계하자는 암묵적 룰이 있었다”며 “상대적으로 딱딱한 중계가 많았고, 주로 마니아층을 공략하는 전략이었다”고 설명했다. 그러나 지금은 시청자들이 중계진의 ‘만담’을 즐기러 올 정도로 성격이 변했다. 이승원 해설은 “세월이 지나다 보니 여러 가지가 다 섞여 있는 게 저희 중계진의 모습이 된 것 같다”며 “그런 방향을 추구하고 있기도 하다”고 설명했다.
■ 다른 종목 중계에도 도전하고 싶어… 무엇보다 오랫동안 하는 게 목표
지금은 이스포츠가 아시안게임 시범종목으로 채택될 정도로 위상이 높아졌지만, 과거에는 이스포츠를 스포츠로 볼 수 있는지에 대한 논란도 많았다. 중계진은 어떻게 생각할까?
이승원 해설은 “스포츠를 어떻게 정의하느냐에 따라 달라지겠지만, 동일한 룰을 갖고 공정하게 두 선수가 승부를 가른다는 점에서 스포츠라고 생각한다”고 했다. 박상현 캐스터는 “스포츠 선수 중에도 많은 사랑을 받는 선수들은 그 종목에서 최고 실력을 보여주는 선수들”이라며 “이스포츠에서도 경이로울 정도로 실력이 좋은 선수들이 있고, 이들의 플레이를 보며 팬들이 ‘이게 스포츠고, 이게 드라마다’라는 생각을 하는 것 같다”고 말했다.
중계진은 어떤 목표를 바라보고 있을까? 이승원 해설은 “지금은 스타크래프트와 배틀그라운드만 다루지만, 다른 스포츠나 소싸움, 혹은 정말 엉뚱한 것들도 중계해보고 싶다”고 밝혔다. 또한 “2001년도에 데뷔를 했는데, ‘스타크래프트 중계가 언제까지 가능하겠냐’는 말도 많이 들었다”며 “사람들의 예상보다 훨씬 오랫동안 중계를 하는 게 목표”라고 말했다.
이날 세 사람은 인터뷰가 끝난 뒤 열린 도재욱과 김성대의 경기에서 도재욱의 승리를 예상했다. 그러나 결과는 김성대의 5-4 승리. “전성기 때도 승자 예측은 항상 틀렸다”던 이승원 해설의 말대로였다. 비록 승자 예측은 틀렸지만, 20년 전 이들이 예상했던 이스포츠의 성공은 들어 맞았다. 20년 뒤에도 중계하고 싶다는 이들의 바람은 어떻게 될지가 궁금해졌다.
글·사진 이준희 기자
givenhappy@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