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광고

광고닫기

광고

본문

광고

스포츠 스포츠일반

깜짝 시범경기 뒤 더 놀라운 사건이 벌어졌다

등록 2021-01-30 17:32수정 2021-01-30 17:39

[토요판] 남북탁구단일팀 코리아
(1) 운명의 시계

남북 정상 ‘판문점선언’ 닷새 뒤
세계탁구선수권대회 남북격돌 전
남북 선수 깜짝 단일팀 시범경기

한반도 평화물결 분위기 타고
바이케르트 ITTF 회장 돌발 제안
“남북단일팀 당장 못할 건 뭐냐”

6시간 만에 분초 다퉈 정부 설득
유승민 IOC 위원 덕에 마감 연장
남쪽 승인은 떨어졌지만 북쪽은…
세계선수권대회에 참가한 남북한 탁구 선수들이 2018년 5월2일(현지시각) 스웨덴 할름스타드의 튈뢰산드호텔에서 깜짝 남북 단일팀 시범경기를 펼쳤다. 사진은 한국의 서효원(왼쪽)과 북한의 김남해. 대한탁구협회 제공
세계선수권대회에 참가한 남북한 탁구 선수들이 2018년 5월2일(현지시각) 스웨덴 할름스타드의 튈뢰산드호텔에서 깜짝 남북 단일팀 시범경기를 펼쳤다. 사진은 한국의 서효원(왼쪽)과 북한의 김남해. 대한탁구협회 제공

#1 D-6. 2018년 4월27일 판문점 평화의 집.

“한반도에서 더 이상 전쟁은 없을 것이며 새로운 평화의 시대가 열렸음을 겨레와 세계에 엄숙히 천명합니다.”

파란 넥타이를 맨 문재인 대통령과 줄무늬가 있는 검은색 인민복을 입은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은 평화의 집 앞에 설치된 단상에 나란히 섰다. 두 정상은 새로운 한반도의 역사적 이정표 앞에서 긴장된 모습이 역력했지만 목소리는 확신에 차 있었다. 이날 두 정상은 3개 조 13개 항으로 만들어진 ‘한반도의 평화와 번영, 통일을 위한 판문점 선언’을 함께 발표했다.

#2 D-4. 2018년 4월29일 스웨덴 할름스타드

스웨덴 남서부에 위치한 작은 해변 할름스타드에 전세계 탁구인들이 모여들었다. 2018년 세계탁구선수권대회 개막식. 한국과 북한 선수들이 각각 한국과 북한의 다른 국기를 가슴에 달고 출전했다.

#3 D-2. 2018년 5월1일 스웨덴 할름스타드

한국 여자 단체팀은 예선 전승으로 8강에 진출했다.

#4 D-1. 2018년 5월2일 스웨덴 할름스타드

북한이 16강에서 러시아를 꺾으며 다음날 남북 맞대결을 펼칠 상황. 불과 닷새 전, 남북의 두 정상이 함께 한반도의 새로운 역사를 천명했지만 스포츠 세계대회에서 남북이 서로 적으로 만나야 하는 상황이었다.

북한이 8강에 올라오며 다음날 한국과 맞붙는 상황을 전해 들은 토마스 바이케르트 국제탁구연맹(ITTF) 회장 머릿속엔 의문이 생겼다. ‘왜 한국과 북한은 함께 경기에 나가지 못하고 서로 적으로 맞붙어야 하지?’

깜짝 단일팀 시범경기

이날 저녁 7시, 아이티티에프는 재단 창립식이라는 중요한 행사를 앞두고 있었다. 아이티티에프 재단 초대 홍보대사로 한국의 유승민 국제올림픽위원이 임명됐다. 2004년 아테네올림픽 금메달리스트이기도 한 유승민은 2016년 35살이란 젊은 나이에 국제올림픽위원회(IOC) 선수위원이 되며 스포츠 행정가로 화려하게 제2의 인생을 살고 있었다.

당시 관계자들을 취재한 바를 종합하면, 토마스 바이케르트 회장은 재단 창립식을 흥행시킬 방법을 고민했다. 그는 유승민 위원에게 물었다. “한반도에 평화의 물결이 보기 좋게 일고 있는데, 우리도 뭔가 퍼포먼스가 필요하지 않겠소?” 유승민 위원은 불과 며칠 전 남북의 두 정상이 판문점에서 만난 모습을 떠올리며 답했다. “한국과 북한 선수 모두가 현지에 와 있는데 창립식에서 남북 선수들이 함께 이벤트로 시범경기를 해보는 것은 어떨까요?” 1991년 일본 지바 세계탁구선수권대회에서 처음 꾸려졌던 남북 단일팀은 여자 단체전에서 우승을 거두었고, 이는 스포츠 역사에서 남북 평화의 상징으로 지금까지 남아 있다.

2018년 5월2일 저녁 7시. 재단 창립식이 시작되자 스웨덴 할름스타드의 튈뢰산드호텔에는 전세계의 난다 긴다 하는 탁구 인사들이 하나둘 모여들었다. 한국 국가대표 서효원과 양하은, 북한의 최현화와 김남해 선수가 행사장에 깜짝 등장했다. 누구도 예상치 못한 등장이었다. 특별 심판으로 나선 마영삼 국제탁구연맹 심판위원장이 말했다. “양하은과 최현화는 ‘코리아연합1’조, 서효원과 김남해는 ‘코리아연합2’조로 복식경기를 시작하겠습니다.” 마치 장난처럼 진행된 이벤트 경기는 3분가량 진행됐다.

결과는 3 대 3. 마 위원장이 “공동 우승!”이라고 외쳤다. 저녁 7시에 시작한 재단 창립기념식은 8시 이벤트 경기가 끝나고도 8시 반까지 계속 이어졌다. 8시쯤 끝날 줄 알았던 행사가 점점 길어졌다.

예상보다 길어진 행사에 점점 조바심이 나기 시작한 한 사람이 있었다. 바로 주정철 북한탁구협회 서기장이었다. 주 서기장은 북한탁구협회 회장이자 선수단장 자격으로 북한 선수들을 이끌고 스웨덴에 왔다. 북한 여자 선수들은 다음날 오전 10시 남한 선수들과 8강을 치러야 했다. 주 서기장은 그 자리에 있는 최현화와 김남해 선수의 컨디션이 나빠질까 염려가 컸다.

주 서기장은 바이케르트 회장에게 말했다. “내일 10시 시합이라 선수들 컨디션도 있고 하니 행사를 빨리 끝내줬으면 좋겠습니다. 선수들이 적어도 내일 8시 반이나 9시에는 경기장엘 가야 합니다.” 바이케르트 회장은 유승민 아이오시 선수위원, 박창익 대한탁구협회 전무와 함께 기대 이상의 성공적인 행사장 분위기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던 참이었다.

2018년 5월3일(현지시각) 스웨덴 할름스타드에서 남북 탁구 단일팀 구성을 주선한 토마스 바이케르트 국제탁구연맹(ITTF) 회장(오른쪽)과 유승민 국제올림픽위원회(IOC) 선수위원이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할름스타드/EPA 연합뉴스
2018년 5월3일(현지시각) 스웨덴 할름스타드에서 남북 탁구 단일팀 구성을 주선한 토마스 바이케르트 국제탁구연맹(ITTF) 회장(오른쪽)과 유승민 국제올림픽위원회(IOC) 선수위원이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할름스타드/EPA 연합뉴스

바이케르트 회장은 그 자리에서 남북 탁구 실무진인 세 사람에게 예상치 못한 제안을 했다. “남북 분위기도 좋은데 진짜 시합에서 남북 단일팀으로 출전해보는 건 어떻겠소? 내일 남북 경기는 안 하고 말이오.” 뜬금없이 남북 단일팀이라니. 70여년 분단의 역사 동안 각종 스포츠 경기에서 단일팀 논의는 꾸준히 이어져왔다. 하지만 대부분 복잡한 정치적 이해관계가 엮여 일이 틀어지기 일쑤였다.

“그게 가능할까요? 지금 저녁 8시고, 내일 10시가 게임인데.” 유 위원이 바이케르트 회장에게 반문했다. “못 할 건 뭐요.” 바이케르트 회장이 별일 아니라는 듯 말했다. “다른 나라들의 동의는 우리가 받아줄 테니 새벽 4시까지 한국과 북한에선 각각 정부의 동의를 받아주시오. 단, 1개 국가라도 반대한다면 추진하지 않겠소.”

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은 국무위원장, 한국과 북한의 두 정상이 판문점에서 만난 것이 불과 닷새 전인 2018년 4월27일이었다. 두 정상은 판문점에서 한국과 북한을 나누는 군사분계선을 손잡고 자유롭게 넘나들었고, 한국과 북한 국민들의 가슴속에 깊숙하게 박힌 분단의 가시에도 균열이 가기 시작했다. 결국 흐름이었다. 흐름을 타는 것이 중요했다. 역사는 항상 예상하는 한 방향으로 쓰이지 않았고, 어느 포인트에서 불현듯, 또 우연찮게 소용돌이치며 한순간 흐름이 바뀌기도 했다.

스웨덴 할름스타드 현지시각 밤 10시. 한국 시각 새벽 6시. 정부의 동의를 받아야 하는 데드라인은 현지시각 기준 다음날 새벽 4시. 바이케르트 회장은 남북 단일팀에 대한 각국의 동의를 얻기 위해 서둘러 자리를 떴다. 그가 동의를 받아야 하는 회원국은 한국을 빼고 모두 7개 나라였다. 회장이 떠난 자리엔 유승민 위원과 주정철 북한탁구협회 서기장, 박창익 대한탁구협회 전무 등 남북의 실무진이 남았다. 예상치 못한 황당한(?) 미션에 그 자리에 있는 누구 하나 “할 수 있다”는 말을 섣불리 할 수 없었다.

유승민의 노력으로 얻은 추가 시간

결국 남북 단일팀의 총대를 멘 것은 유승민 위원이었다. 남북 단일팀 추진이 결정되고 그는 가장 먼저 남북 단일팀 결성의 당사자인 선수들이 있는 곳으로 향했다. 유 위원은 아이티티에프 재단 신임 홍보대사이기 이전에 스포츠 선수의 이해관계를 대변하는 아이오시 선수위원이었고, 단일팀 추진 과정에서 선수들의 동의가 얼마나 중요한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유 위원은 선수들이 있는 훈련장으로 향했다. “내일 10시 북한과의 경기에서 남북 단일팀 논의가 진행되고 있습니다. 하지만 여기에 있는 분 중 한명이라도 남북 단일팀을 거부한다면 단일팀 논의를 멈추겠습니다.” 그의 갑작스러운 말에 선수들은 선뜻 입을 떼지 못했다. 선수들에게 남북 단일팀은 예민한 이슈였다. 남북 단일팀이 성사될 경우 두 팀이 하나의 팀으로 합쳐지는 만큼 선수 중 누군가는 경기에 뛰지 못하는 엔트리 문제가 발생할 수 있기 때문이다.

유 위원은 이어 말했다. “단, 단일팀을 추진해도 선수 전원 엔트리와 메달 수를 보장할 것으로 약속하고 단일팀을 추진하겠습니다. 그러니 내 눈치를 볼 것도 없고, 감독 눈치를 볼 것도 없이 편하게 의견을 얘기해주세요.” 다음날 10시 한국팀은 8강에서 북한과 맞붙어야 했다. 북한은 만만한 적수가 아니었고, 8강에서 맞붙는다면 두 팀 중 한 팀은 떨어져야 했다. 하지만 한국팀과 북한팀이 단일팀으로 꾸려진다면 4강 자동 진출이었고, 당시 3·4위전은 따로 열리지 않아 4강전에서 지더라도 동메달을 획득할 수 있었다. 거기에 엔트리와 메달 수가 보장된다면 선수 중 누구 하나 손해 볼 것이 없는 상황이기도 했다. 답이 모아지고 있었다.

현장에 있던 선수 전원은 유승민 위원의 제안에 동의했다. “스포츠 선수라면 더 높은 곳으로 올라가고 싶죠. 북한 선수랑 함께 힘을 합치면 전력이 더 강해질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북한의 김송이 선수도 올림픽 동메달 선수고, 저희 쪽에도 잘하는 선수들이 있으니까요. 한국과 북한이 따로 하기보다 함께 하면 힘이 더 커질 것 같아 욕심이 났습니다.” 훗날 따로 인터뷰를 했을 때 서효원 선수는 이렇게 말했다.

선수들의 동의를 얻은 유승민 위원과 탁구 실무진은 가보지 않은 길이라는 불확실성 속에서 남북 단일팀을 향해 조용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유승민 위원은 곧장 이유성 탁구협회 부회장에게 전화해 현지 남북 단일팀 추진 상황을 보고했다. 한국에선 아침부터 대한체육회와 문화체육관광부, 통일부, 청와대까지 각 라인이 숨 가쁘고 발 빠르게 움직였다. 정치적으로 남북관계가 급진전된 상황에 한국의 주무부처 역시 탁구인들의 남북 단일팀 논의에 대한 건을 특별사항으로 다뤄 신속하게 대응했다.

5월3일 깜깜한 새벽, 유승민 위원과 박창익 전무, 심재구 대한탁구협회 사무처장은 할름스타드의 호텔 로비에 마주 앉았다. 인적 없는 호텔 로비엔 적막감이 감돌았다.

째깍.

째깍.

째깍.

째깍.

숨소리마저 크게 들리는 새벽 호텔 로비, 바이케르트 회장이 제시한 남북 단일팀 정부 승인 데드라인인 새벽 4시가 점점 다가왔다. 기다리던 정부의 승인 전화는 끝내 걸려오지 않았다. ‘역시 안 되는 것인가?’ 새벽 4시, 한국 정부 승인도 북한 정부의 승인도 없었다. 새벽 내내 밤을 지새웠던 한국과 북한 실무진의 노력이 수포로 돌아가려는 순간.

‘조금만 더….’ 차마 여기서 끝낼 수 없었던 유승민 위원은 아이티티에프 측에 달려가 애원했다. “지금까지 고생한 게 너무 억울합니다. 딱 1시간만 시간을 주십시오. 그때도 연락이 오지 않는다면 포기하겠습니다.”

유 위원의 노력으로 추가 시간을 얻었고, 그로부터 30분이 지난 새벽 4시30분. 드디어 한국으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정부 승인이 떨어졌습니다.” 꿈같던 남북 단일팀이 첫번째 고비를 넘은 순간, 하지만 아직 끝이 아니었다. 남북 단일팀은 한쪽 정부가 승인을 낸다고 이뤄질 수 있는 것이 결코 아니었다. 북한에선 여전히 아무 소식이 없었다.

새벽 4시40분… 41분… 42분… 43분… 44분….

1분 1초가 가슴 졸이는 순간. 시곗바늘이 새벽 4시45분을 가리켰다. 그리고 호텔 로비 멀리 주정철 서기장의 모습이 나타났다.

남북한 탁구 선수들이 2018년 5월3일(현지시각) 세계탁구선수권대회에서 단체전 남북 단일팀 구성에 전격 합의한 뒤 함께 사진을 찍고 있다. 여자 단체전은 이날 8강전에서 남북 대결이 예정됐으나 남북이 단일팀 구성에 합의하면서 8강전 없이 4강에 진출했다. 할름스타드/EPA 연합뉴스
남북한 탁구 선수들이 2018년 5월3일(현지시각) 세계탁구선수권대회에서 단체전 남북 단일팀 구성에 전격 합의한 뒤 함께 사진을 찍고 있다. 여자 단체전은 이날 8강전에서 남북 대결이 예정됐으나 남북이 단일팀 구성에 합의하면서 8강전 없이 4강에 진출했다. 할름스타드/EPA 연합뉴스

(2회에 계속)

공동기획 팩트스토리

▶ 스포츠는 정치와 국경을 넘을 수 있는가. 30년 전인 1991년에 이어 2018년 또다시 남북 탁구 단일팀이 꾸려졌다. 그해 봄, 남북 두 정상이 판문점에서 만난 직후였다. 30년 전 단일팀 선수들은 감독과 스승이 되었고, 그들의 제자들이 바통을 이어받았다. ​남북관계가 안개에 싸인 지금, 새 시대를 열었던 단일팀의 이야기를 다시 돌아본다. 이 기획은 영화사 명필름과 팩트스토리가 함께 했고, 명필름이 다큐멘터리 영화를 제작 중이다. 필자 김지나 <뉴스핌> 기자는 르포논픽션 작가로도 활동 중이다.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
언론 자유를 위해, 국민의 알 권리를 위해
한겨레 저널리즘을 후원해주세요

광고

광고

광고

스포츠 많이 보는 기사

여자배구 연봉 8억 시대…FA 선수 18명 중 6명 이적 1.

여자배구 연봉 8억 시대…FA 선수 18명 중 6명 이적

골키퍼 김정훈 신들린 선방, 공격수 이영준 ‘멀티골’…황선홍호 중국 꺾고 2연승 2.

골키퍼 김정훈 신들린 선방, 공격수 이영준 ‘멀티골’…황선홍호 중국 꺾고 2연승

‘신태용 매직’ 인도네시아, 호주 꺾고 8강행 희망 3.

‘신태용 매직’ 인도네시아, 호주 꺾고 8강행 희망

이정후, 10경기 연속 안타…시즌 7번째 멀티 히트 4.

이정후, 10경기 연속 안타…시즌 7번째 멀티 히트

여성 주심 밀친 K리그2 전남 김용환, 14일 출장 정지 5.

여성 주심 밀친 K리그2 전남 김용환, 14일 출장 정지

한겨레와 친구하기

1/ 2/ 3


서비스 전체보기

전체
정치
사회
전국
경제
국제
문화
스포츠
미래과학
애니멀피플
기후변화&
휴심정
오피니언
만화 | ESC | 한겨레S | 연재 | 이슈 | 함께하는교육 | HERI 이슈 | 서울&
포토
한겨레TV
뉴스서비스
매거진

맨위로
뉴스레터, 올해 가장 잘한 일 구독신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