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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심정 마음산책

안중근 파면한 뮈텔대주교 옹호한 추기경

등록 2010-03-26 20:11

  안중근 의사 순국일인 26일 한국 가톨릭 최고지도자인 정진석 추기경이  100년 전 안중근 의사의 가톨릭 신자 자격을 박탈했던 뮈텔 대주교의 당시 처신을 옹호하는 발언을 해 논란을 빚고 있다.

 

 정 추기경은 이날 오후 6시 명동성당에서 한 ‘안 의사 순국 100돌 추모미사’ 강론에서 “안의사의 독립투쟁과 의거는 신앙의 연장선상에 있었다”면서 “오늘 미사는 안 의사의 가톨릭 신자 신분을 공식적으로 확인하는 의미를 지닌다”고 말했다.

 정 추기경은 이어 “당시 교구장인 뮈텔 대주교님의 소극적인 처신을 비난하는 사람도있지만, (안의사에게 종부성사를 한 빌렘신부에게) 비교적 가벼운 직무정지를 명하고 출국시킨 것도 오히려 사제를 보호하기 위한 최선의 방법이란 생각이 들고, 빌렘 신부님은 안 의사의 고해성사를 들은 사람이라는 것만으로도 위험할 수 있는 상황이어서 당시 교회 상황으로 봐 뮈텔 대주교가 교회와 사제, 신자인 안중근 토마스  모두를 돌보는 방법을 고심해 최선의 선택을 내린 것이라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고 말했다.

 이에 대해 우리신학연구소 박영대 소장은 “1911년 안중근의 사촌동생 안명근 야고보로부터 데라우치 총독 암살 계획을 들은 빌렘신부의 보고를 받고 이를 총독부에 제보해 독립지사 105인이 잡혀가게 한 것만으로도 식민지 백성에 대한 뮈텔 대주교의 당시 인식을 알 수 있다”면서 “빌렘 신부가 출국한 것은 안의사가 순국한지 4년이나 지난 1914년이었다는 것만으로도 앞뒤가 맞지않는다”고 밝혔다.

 안 의사가 이토 히로부미를 처단할 당시 한국 가톨릭 최고지도자였던 뮈텔 대주교는 안 의사가 황해도 신천성당 총대(사무국장)로 활약할 당시 주임이었던 빌렘신부의 안 의사 면회를 불허하고, 사형 직전 안 의사를 찾아 종부성사를 한 빌림센부에 대해 2개월간 성무집행금지 조처를 내렸다. 천주교에 헌신적이며 절대적인 신앙심을 죽는 순간까지 잃지않았던 안 의사와 뮈텔대주교의 악연은 이것이 처음은 아니었다. 황해도에서 초기 천두교 신자 확대에 가장 큰 공을 세웠던 안 의사는 천주교회를 통해 학교를 세워서 민족 동포들을 교육시켜 깨우려했으나 뮈텔대주교는 이마저 불허했다. 하지만 안의사는 이에 굴하지않고 사재를 털어 학교를 세워서 민족 동포를 깨워 미래를 도모하고자했다.

 일제는 한국 독립지사들을 처형하면서 유해를 작은 항아리에 고개를 꺽고 몸도 구부려 넣어, 죽어서도 일제 앞에 무릅을 꿇게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당시 주검이 들어가기엔 너무 작아서 주검을 구부려야 들어갈 수 밖에 없는, 한국인 사형수를 담던 항아리가 지금까지도 전해지고 있다.  당시에도 사형수의 유해는 유족들에게 넘겨주는게 당연한 일이었지만 일제는 안의사의 유해를 유족들에게 넘겨주지않아 10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안 의사의 무덤조차 찾지못하고 있다. 이토오 히로부미의 추도식에 참여했던 뮈텔 주교는 일제가 안의사의 유해를 유족들에게 넘겨주지않은 것에 대해서도 "당연한 일"이라고 말한 것으로 전해졌다. 

 조현 종교전문기자cho@hani.co.kr

 

<강론 전문>

친애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여러분 모두에게 하느님의 은총과 평화가 함께 하시기를 기원합니다.

 

   오늘은 안중근 토마스 의사가 순국한지 꼭 100주년이 되는 뜻 깊은 날입니다. 안 의사의 추모미사를 봉헌할 수 있도록 안배해 주신 하느님께 감사드립니다.

   오늘 우리가 안중근 토마스 의사를 추모하는 것은 그분의 삶이 숭고했기 때문입니다. 그분의 신앙과 민족 운동이 우리에게 큰 귀감이 되기 때문입니다.

 

   안중근 의사는 항일 독립투쟁의 대명사와 같은 분입니다. 안중근 의사 하면 1909년 10월 26일 하얼빈 역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한 의거만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안중근 의사는 민족자존과 국권 수호, 정의 실현을 위해 생명까지 아낌없이 바친 애국자였습니다. 

   또한 안 의사는 평화주의자였습니다. 그분은 세계 열강들이 자국의 이익만을 위해 제국주의적 팽창을 시도하는 혼란스런 시대에 살았습니다. 그분은 동양의 평화, 더 나아가 세계의 평화를 고민하고 모색했습니다.

 

   이러한 안 의사의 고민과 노력은 비록 미완성이지만 옥중에서 집필한 ‘동양 평화론’으로 고스란히 남아 있습니다. 그분은 놀랍게도 아시아를 하나의 공동체로 보았고, 진정한 평화는 공동의 가치 발견과 공동선 추구로 가능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경제가 중요한 역할을 할 것이라 생각하여 아시아 공동화폐 발행과 아시아 개발은행 설립을 역설했던 그분의 혜안과 통찰력이 놀라울 뿐입니다.

 

   또한 안 의사는 인권운동가였습니다. 그분은 인권회복과 사회정의를 위해 적극적으로 투신했습니다. 억눌리고 소외된 사람들을 위해서는 먼 길을 마다하지 않고 다니면서 그들의 권익을 찾아 주고자 노력했습니다.

 

   안 의사는 언제나 인간에 대한 신뢰와 사랑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의병활동을 할 때 독립군 부대의 위치와 전력이 노출될 위험을 무릅쓰고 일본인 포로들을 무기까지 내주어 석방하였습니다. 그분의 고매한 인격 때문에 의거 후 감옥의 일본 관리들도 그를 깊이 존경했던 것입니다.

 

   안중근 의사는 구국을 위한 교육사업에 투신하였습니다. 진남포 성당에서 운영하던 돈의학교를 인수해 교장에 취임하고 구국영재들을 배출했습니다. 자비를 털어 용정동에 삼흥학교를 설립하기도 했습니다.

 

   안중근 의사는 무엇보다도 가톨릭 세례명이 토마스인 철저한 신앙인이었습니다. 사실 안중근 의사의 삶은 그분의 신앙을 빼놓고는 바르게 이해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오늘 우리가 안 의사를 추모하는 미사를 봉헌하는 가장 중요한 이유입니다.

 

   안 의사는 19세 때인 1897년 빌렘 신부님에게 토마스라는 세례명으로 영세했습니다. 그후 6, 7년간 황해도 일대를 돌며 전교활동을 했고 주임 사제 빌렘 신부님의 복사(服事)로도 활동했습니다. 안 의사와 그분의 부친이신 안태훈 베드로 회장님의 적극적인 전교 활동은 그분들이 개척하신 청계동 공소를 황해도 내에서는 두 번째 본당으로 설정되도록 하였습니다. 본당설정 후 불과 2년 만에 25개 공소에 1천 4백여 명의 신자라는 경이적인 전교 성과를 가져오게 하였습니다. 실제로 안중근 의사의 옥중 자서전인 ‘안응칠 역사’ 중에는 안 의사가 천주교 교리를 전했던 강연내용이 16쪽에 걸쳐 상세하게 적혀 있습니다. 이처럼 그분의 삶에는 하느님을 향한 신앙이 깊게 깔려 있었습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우리 가톨릭교회는 오랫동안 안중근 의사를 신앙인으로 올바르게 평가하는데 소극적이었습니다. 또한 당시 교구장인 뮈텔 대주교님의 소극적인 처신에 대해 비난을 하는 사람들도 많았습니다.

   그러나 당시 교회 상황으로 보아 교회 책임자의 묵인내지 내적 협조 없이 주임사제가 사목지를 이탈해 성사를 집전한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는 일입니다. 나중에 비교적 가벼운, 몇 개월간의 직무정지를 명하고 빌렘 신부를 외국으로 출국시킨 것도 오히려 교구장이 사제를 보호하기위한 최선의 방법이란 생각이 듭니다. 당시 어려움에 처한 한국 전체 교회를 책임져야 하는 교구장의 심정은 다른 사람들이 이해하기 어렵다고 생각합니다. 더구나 빌렘 신부님은 안 의사의 고해성사를 들은 사람이라는 것만으로도 위험할 수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뮈텔 대주교님의 입장에서는 교회와 사제, 그리고 신자인 안중근 토마스 모두를 돌보는 방법을 고심하며 최선의 선택을 내린 것이라는 생각을 지울 수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 가톨릭교회가 광복 이후로도 오랫동안 안 의사를 잊고 있었던 것은 사실입니다. 안 의사가 천주교인으로서 다시 조명된 것은 1993년 김수환 추기경님을 통해서입니다. 김 추기경님은 “일제치하의 교회가 안 의사의 의거에 대한 바른 판단을 내리지 못하고 여러 과오를 범한 것에 연대 책임을 느낀다”며 “그분의 의거는 일제의 무력 침략 앞에서 독립전쟁을 수행하는 과정에서의 행위였으므로 정당방위이며 의거로 보는 것이 마땅하다”고 선언했습니다. 교회의 역사를 바로 잡은 셈입니다.

   저 역시 전임 교구장인 김수환 추기경님의 말씀에 전적으로 공감합니다. 따라서 오늘 이 추모미사는 안중근 토마스 의사의 가톨릭 신자 신분을 공식적으로 확인하는 의미를 지닙니다.

 

   안 의사는 그분의 애국충절뿐 아니라 열심한 신앙인으로도 교회 안에서 마땅한 존경을 받아야 합니다. 안 의사는 순국하시기 직전에 자신의 변호를 맡았던 일본인 변호사에게 가톨릭 신앙을 가질 것을 권하셨습니다. 자신이 이루지 못한 사제직의 꿈을 장남 분도를 통해 이루기를 소망하며 유언으로 남기기도 했습니다. 성직자들에게는 민족 복음화를 위한 노력을 유언으로 당부하셨습니다.

   안 의사가 의거 후 제일 먼저 한 일도 기도였습니다. 자신의 행동이 천주교 신앙과 교리에 어긋남이 없다고 확신했기에 한 점 부끄러움이 없었습니다. 1910년 3월 26일 순국 당일에도 여순 감옥에서 10분간 기도를 올리고 당당히 형장에 걸어 들어갔습니다. 참으로 그분은 자신의 생애를 그리스도의 생애와 일치시키고자 노력 하셨던 분이었습니다.

 

   이처럼 그분의 독립투쟁과 의거는 신앙의 연장선상에 있습니다. 또한 안 의사께서 중요시했던 인권과 사회 정의, 민권 수호 활동과 애국 계몽 운동도 그리스도적인 사랑과 정의에 바탕을 둔 것이었습니다. 안 의사의 삶은 그리스도인의 완전한 모범을 보여줍니다. 우리도 안중근 의사처럼 평화의 도구로 살아야 할 것입니다. 진정한 평화는 결코 누구 혼자의 힘으로 이루어지 않습니다. 모든 이가 한마음으로 공동의 가치를 발견하고 공동선을 위해 함께 노력해야 합니다.

 

   안중근 의사 순국 100주년이 그분의 숭고한 애국애족의 삶과 정신을 되새기는 계기가 되기를 바랍니다. 특별히 많은 청소년들이 안중근 의사의 모범을 따라, 개인적 안위만이 아닌 나라와 민족 더 나아가 세계 평화와 인류의 공동선을 위한 원대한 꿈을 갖기를 기원합니다.

 

 1.    “자비로우신 하느님! 신앙인의 모범이며 조국의 독립과 동양 평화를 위해 투신한 안중근 토마스가 하느님 나라에서 영원한 안식을 누리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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