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기 4341년(2008년) 태백산 영봉천제단에서 제천의식을 거행하는 무용단
지난 2002년 월드컵 때 환웅중 한분인 치우천왕을 그린 기를 들고 응원하는 붉은악마응원단
오늘은 개천절이다. 하늘이 열린 날이란 뜻이다. 우리 민족이 시작된 날이란 뜻이기도 하다. 대표적인 친일사학자 이병도도 “개천은 단군의 고조선 개국을 의미하는 것”이라 했다. 정인보가 지은 개천절 노래는 “우리가 물이라면 새암이 있고 우리가 나무라면 뿌리가 있다. 이 나라 한아버님은 단군이시니…”라고 시작한다. 국어학자 이희승은 단기 4319년(1986년) ‘개천절에 부친 글’에서 이렇게 썼다.
“우리는 단군 어른이 나라를 세워 주신 은덕에 감사하며 그 자손으로서 국조 단군에 대한 숭모의 정은 마음속에서 우러나는 도의적 의무감과 인간적 정의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단군 이야기는 오래 전부터 우리 겨레 사이에 뿌리박혀 온 것으로 그분을 제쳐놓고는 그 어디에서도 구심점을 찾을 수 없다는 것을 깊이 깨닫게됩니다. 단군에 대한 진실은 3·1독립선언서에도 조선 개국 4252년이라고 기록하였는데, 이는 우리 건국정신의 기원이 단군의 개국에 있다는 것을 말합니다. 먼 옛날부터 우리 조상이 단군이라는 것에 확신을 가지고 반만년의 역사를 이어온 것도 우리 민족의 확신과 신성한 합의에 의한 것입니다.” 유대인은 2천년 넘게 나라 잃고 떠돌려면서 민족 정체성을 잃지않았지만, 한국인은 불과 나라 잃은 36년간 민족의 정체성을 송두리째 잃어버렸다. 물론 자기가 딛는 땅을 도외시한체 신앙의 신화는 떠받들면서 자기 민족의 역사는 미신시하는 외래 종교인들의 사대적 태도가 큰 영향을 미쳤다.
개천절을 맞아 생각나는 인물이 이동식 선생이다. 지난해 한 정신과 의사로부터 전화를 받았는데, 지난해 94세로 세상을 뜬 이동식 선생의 제자라고 했다. 내가 몇년 전 이동식 선생을 인터뷰를 하느라 허심탄회하게 얘기를 나눈 적이 있는데, 그 뒤로 이동식 선생님이 제자들과 함께 한 자리에서 여러차례 내 얘기를 하더라는 것이었다.
이동식 선생은 대구의학전문학교를 졸업하고 경성제국대학(서울대) 의대 신경정신과, 미국 뉴욕대 신경정신과 등에서 일하고, 대한신경정신의학회 회장과 이사장, 한국정치료학회 회장, 아시아태평양정신치료학회(APAP) 명예회장을 지냈다. 그 분은 한국전쟁 직후인 미국에서 유학을 해 서양의 학문을 접하면서 비로서 우리 문화의 우수성을 깨닫고, 동양철학과 서양의 정신의학을 융합한 ‘도(道) 정신치료’를 창시한 인물이다. 그는 해방이 되고도 이승만 정부에 의해 반민족을 청산할 기회를 놓치고, 이것이 박정희 정권에 의해 그대로 계승됨으로써 한국문호, 한국역사, 한국인의 성격, 한국인은 무조건 부정적으로 보는 엽전사상이 무의식 속에 잠재하게 됐다고 안타까워했다. 그는 나와 우리, 주체성을 잃어버린 민족을 평생 슬퍼했다.
그러면서 미국 유학중 서양학문을 접하는 중 자신이 발견한 한국문화, 한국역사, 한국문화의 상대적 위대성을 강조하며 한국인의 주체성 정립을 주창했다. 그는 기득권에 아부나 해서 자리 보전이나 하고 대접이나 지식인 부류가 아니었다. 그가 신군부 전두환 독재시대인 1985년 <광장>에 쓴 글을 보자. “한말과 일제의 잔재와 해방후 비민주적, 특히 박정권 하에서의 언론탄압과 독재로 인한 전국민의 비민주적 사고로 인한 해독을 청산해야 한다. 그 해독은 민주화를 부르짖고 독재를 반대하는 야당이나 지식인·학생들까지도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비민주적이고 독재적인 방법을 쓰려는 것에서 잘 나타나고 있기 때문이다.
한국은 21세기의 주역과 태평양시대의 주역이 될 수 있는 천재일우가 아니라 만재일우의 호기가 한민족을 찾아왔다는 사실을, 남북의 우리 동포뿐만 아니라 전세계에 나가 있는 동포들이 깨달아야한다. 나는 정신치료를 하는 의사로서 세계각국의 사람들을 관찰한 결과 우리 민족만큼 인간적인 민족이 없다는 것을 발견했다. 우리는 무한한 가능성을 가지고 있는데 그 가능성은 우리의 민족적인 성격과 전통적인 유산에서 나온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된다. 라이샤워 교수가 금년 초에 지적했듯이, 21세기에는 태평양시대가 분명히 도래한다. 그리고 과거에는 서양문명과다른 문명이 접촉하면 서양문명이 침투되었을 뿐 새로운 문명이 탄생하지 않았지만, 태평양시대에는 새로운 문명이 탄생한다는 것이다. 새로운 문명의 탄생은 서양의 과학적인 문명과 동양의 도와의 만남에서 이루어진다는 것을 나는 주장한다. 물질세계에서 소립자물리학에 해당하는 것이 정신세계에서는 도라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전통적인 생각으로는 사람이 하는 모든 것에 도가 있었다.”
정신과의사 이동식 박사(왼쪽)와 고대사 연구학자 최태영 박사(오른쪽)
또 한분이 최태영(1900~2005) 선생이다. 이 분은 서울법대 학장, 중앙대 대학원장, 부산대 인문대학장 드응ㄹ 지낸 법학자이자 학술원 회원인데 우리 민족 고대사 연구에 남다른 열정을 불태웠다. 또한 한국 고대사 연구를 통해 이병도 교수의 고대사관을 바꾸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고, 그와 공저로 <한국상고사입문>을 냈다. 최태영은 “일제 강점기에 우리 역사가 일제의 의도에 따라 날조 조작돼 우리의 역사, 지지, 사상에 관한 모든 서적을 초등교과서에 이르기까지 거둬들여 없애 벌니 일은 나의 기억에도 생생하다”며 “타국의 간섭 아래 눈치를 보아가며 남긴 우리 조상들의 기록과 외국의 불공정한 필법에 의해 조작된 불확실하고 간접적인 자료인 외사가 지금 우리 고대사의 주된 자료가 되어버려 원형을 찾기 어렵게 해놓았다”고 통탄했다. 그러면서 수많은 고서를 탐독해 고대사의 원형을 이렇게 밝혔다. “단군의 고조선이 건국되기 전에 환국(桓國)이 있었다. 우리의 아주 오랜 조상족은 서기전 3천여 년경 백두산(태백산)에 이르러 그 산 북방의 평원, 즉 송화강 유역과 북경 부근, 한반도에 정착해 원주민과 융합하면서 그곳을 근거지로 하여 발전했다. 환웅까지의 오랜 신시(神市)시대를 거쳐 민족통합자 단군이 조선이란 광역강대한 나라를 세우고 민족적 이동을 개시했다. 고려 때 김일연이 쓴 <삼국유사>는 <고기>(古記>를 인용해 단군이 나타나기 직전의 환국 신시시대를 설명하고 있다. 우리 조상의 주류는 옛날에 이동해 북몽고족에 속하는 종족으로서, 알타이어족의 말을 쓰는 사람들이다. 신채호는 ‘조선이나 만주, 몽고, 터키 등은 수천 년 전에는 같은 혈족이었으리라’ 추측하면서 ‘중국의 한(漢)족을 조선족과 동족으로 볼 수 없다’고 했다. 몽고족은 오랜 옛날 우리와 같은 조상의 후손일 수는 있ㅈ만 연대의 선후로 보아 조선족이 몽고족에 속하는 것은 아니라고 했다.
그런 우리 조상들을 중국인은 인방(人方), 동인(東人) 혹은 동이(東夷)에 속하는 종족이라 하고 숙신국 혹은 예맥족이라고 일컬었다. 그들이 활을 다루는 데 능하였음은 맥궁(貊弓), 단궁(檀弓)이라는 기록을 통해서만이 아니라 큰 활을 사용하는 사람이란 글자 이<夷)로 보아도 알 수 있다. 활은 오랫동안 조선족의 뛰어난 무기여서 중국은 당(唐)대에도 신라의 활 만드는 법을 배우려고 노력했다.
어떤 종족이 언제 어디로부터 왔는지 지금 와서 명확히 알 수는 없다. 중요한 것은 우리 조상족들이 치수(治水)법, 무기 같은 선행문화를 지니고 중국 한족에 앞서 요동에 선주(先住)했다는 사실이다. 우리는 중국의 한족과는 그 어계(語系)부터 다를 뿐 아니라 다른 문화전통을 가진 종족이었다. 고조선 지역의 청동기문화 시작이 중국의 황화유역보다 수백년 앞선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미국의 동양미술사학자 존 코벨은 조선 한(韓)족이 동아시아에 정착한 연대는 현재 알려진 것보다 훨씬 더 일찍으로 보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우리의 문화가 일찍부터 중국과 다르다는 것을 바로 보고 단군의 존재를 인정했다. ‘한(韓)민족 그 문화가 중국 것이 아니고 독특하다. 단군은 단군이다’고 한 코벨의 지적은 옳다.
백두산은 단군과 조선적이 제천(祭天)하던 곳이고, 우리 조상족이 제일 먼저 장착해 개척한 곳은 지금의 하얼빈을 중시으로 한 송화강 연안 요동평야이다. 송화는 고대에는 소밀, 속말, 소머리 즉 우수(牛首), 우두(牛頭)라고 하였다. 흰소를 잡아 제천하던 데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소머리란 지명은 후일 민족이동과 함께 강원도 춘천, 경주, 그리고 일본 각처로 전래된다. 우랜 신시시대를 지나는 동안 여러 종족들간에 곰 상징의 종족과는 융화하여 통혼하고, 범을 상징으로 하는 종족 등은 정벌하였따. 곰족과 태양, 조상을 받드는 환웅 종적이 우세하여 다른 종족들을 물리치고 무력통일을 이룬 것이다. 환국-신시시대는 여러 부족이 한 종족으로 통일되기까지 서로 싸운 기간이 천수백 년간 계속된 것으로 봐야 한다. 치우 등 여러 환웅이 있었다고 전한다. 정착생활을 하게 된 우리 조상들은 환웅을 수장으로 받들어 박달나무(檀木) 아래 소도와 제단을 세워 하늘과 조상을 숭배하는 경천보본(敬天報本)의 수두교(蘇塗敎)를 펴고 법질서를 두루 보호하며 교화하여 살았다. 고려말의 학자 이맥의 <택백일사>, <신시본기>에 ‘신시를 세운 환웅천왕의 공더은 수두 제천의 고속에 의하여 분명히 전송되어서 잊히지 아니하였다’고 했다. 신채호가 이때 조선 한족의 특징이 하느님과 조상을 받드는 수두교에 있다고 본 것은 매우 주목할 일이다. 불교와 유교가 들어온 것은 한참 뒤의 일이다. 주의할 것은 일연의 <삼국유사>에 나타난 본래 기록은 ‘석유환국(昔有桓國’-옛날에 환국이 있었다’는 것인데, 불교가 지배세력이 되며 비사실적인 ‘옛날에 환인이 있었다(昔有桓因)’으로 변조된 기록이 나타나게 됐다는 것이다. 환국은 불교가 발생하기 전의 역사임을 생각하면 제석이라고 해석되는 환인(桓因)이 변조된 기록이라는 사실을 쉽게 이해된다. 일제 강점기 일인들이 이를 결정적 빌미로 삼아 환국으로 표기된 진본 사서까지 위조해 가며 단군을 없애고 고조선을 해체하여 그 역사의 전부를 말살하려 했던 것이다. 환인이란 우리 민족이 전통적으로 받드는 하느님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이시영은 <감시만어>(感時漫語)에서 해설하고 있다. ‘환인의 아들’로 표현되는 환웅은 ‘하늘이 낸 사람’이라는 전통적 존숭의 뜻으로 받아들임이 가하지 않은가 본인은 생각한다. 조선 영조 때 사람 이종휘에 이어 근대의 신채호, 최남선, 문정창이 환인 아닌 환국을 말했다. <삼국유사>에서 불교의 꺼풀을 걷어내면, 거기에 인간 단군이 나타난다.”
조현 종교전문기자 cho@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