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 제후들의 후원과 보호
인쇄술 보급으로 파급 확산 달걀로 바위치기처럼 보였던 루터의 종교개혁이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은 루터라는 탁월한 인물 외에도 여러 요인이 크게 작용했다.
가장 중요한 요인은 루터의 고향, 독일의 권력가들이 루터 편이었다는 점이다. 독일 인근의 350개 공국이 모인 독일제국은 로마의 뒤를 잇는다는 의미의 신성로마제국(962~1806년)으로 불렸지만 로마 교황의 전제에 반항하는 민족주의가 싹터 반발 기류가 형성되고 있었다. 신성로마제국은 7개 주요 공국의 제후들이 모여 황제를 선출했는데, 합스부르크왕가(훗날 오스트리아)와 함께 쌍벽을 이룬 작센공국의 프리드리히 제후가 후견인이었다. 독일 황제 카를5세가 로마 교황의 압력에도 불구하고 루터를 보름스로 소환해 해명의 기회를 제공한 것도 루터의 뒤에 프리드리히 제후가 있기 때문이었다. 교황과 황제로부터 이중파문을 당한 루터가 보름스에서 비텐베르크로 돌아가는 길에 프리드리히 제후는 4명의 기사를 보내 ‘납치’를 가장해 데려와 바르트부르크성에 숨겨줄 정도로 적극적인 보호자였다.
또 간과할 수 없는 요인으로 막 보급되기 시작한 인쇄술이 꼽힌다. 비텐베르크성교회에 95개조 반박문을 붙여놓았을 당시만 해도 거의 거들떠보는 이가 없었던 한 사제를 유럽의 유명인사로 만들어준 것은 인쇄된 그의 책자들이었다. 인쇄소를 하는 친구를 두었던 루터는 인쇄술을 적극 활용했던 선전가이기도 했다. 에르푸르트대학에서 처음 철학을 공부하며 인문주의자의 길을 걸었던 루터는 훗날 에라스뮈스와 결별하긴 했지만 인문학적 지성도 그의 개혁에 힘이 됐다. 조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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