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자 위해 공양식당·영농법인 등 통도사 변화 이끌어
사찰 20여곳 창건…지난해 구룡사 등 종단에 헌납
통도사 정우스님 불탄일 인터뷰
자장율사가 부처님 정골사리를 모신 보궁이 있는 경남 양산 통도사는 불(부처가 머무는 통도사)·법(팔만대장경이 있는 해인사)·승(16명의 국사를 배출한 송광사) 삼보 사찰의 하나다. 3~4년 전과는 사뭇 다른 늠름한 자태의 소나무와 활짝 웃는 왕벚꽃의 두 팔 벌린 봄마중을 받고 보니, 중생심으로 숨어들던 ‘존귀한 불성’이 다시 기지개를 켠다. 이 숲길을 따라 불기 2555년 ‘부처님 오신 날’을 앞두고 지난 21일 통도사를 찾아 주지인 정우(59·사진) 스님을 만났다.
그는 4년 전 통도사 주지를 맡자마자 일주문 밖 잡목을 깔끔히 베어내 수백년 된 소나무들의 위용이 드러나게 했다. 또 처마 밑에서 옹색하게 대중공양(식사)을 해야 했던 대중들을 위해 설법전 지하를 파 1000여명이 동시에 공양을 할 수 있는 식당을 만들고, 산뜻한 대중화장실을 9곳에 새로 만들어 연간 통도사를 찾는 수백만명이 불편이 없도록 했다. 이뿐만이 아니다. 통도사 식구들이 직접 10만여평에 농사를 지어 자급자족할 영농법인을 만들고, 잡목숲에 매실수를 심고, 습지에 연못을 만들어 통도사 뒤 불모지의 외관을 일신하는 등 통도사의 변화는 한두 가지가 아니다.
그는 10대 초반 통도사에 출가했지만 경남권보다 수도권에 확고한 거점을 만든 주인공이다. 1980년대 서울 강남에서 가장 큰 절 가운데 하나인 구룡사를 창건한 이래 경기 고양시 일산의 최대 사찰인 여래사와 외국의 8개 사찰 등 국내외 20여곳의 사찰을 창건한 조계종 포교의 주역이다. 지난해 말 구룡사와 여래사를 비롯한 그 대찰들을 모두 통도사에 공찰로 등록한 이유를 물었다.
-왜 오랫동안 힘들여 일군 사찰들을 소리 소문 없이 공찰로 내놓았는가?
“쑥스럽고 부끄러운 일이다. 그게 당연한 것인데 당연하지 않게 받아들이는 세상이 됐으니. 시주자들이 내놓은 돈으로 이루어진 삼보정재는 애초부터 내 것이 아니라 승가공동체의 것이었으니 내놓고 말고 할 게 없는 것이었다.”
-부자들도 부가 개인의 것만이 아니라고 여기고 기부를 많이 하면 좋으련만 99개 가진 사람이 한개 가진 사람 것까지 뺏어 100개를 채우려는 소유욕으로 가득 찬 게 현실 아닌가?
“봄소풍에 고무풍선 하나씩 들고 아방궁을 지은 것처럼, 풍선이 천년만년 갈 것처럼 집착하는 게 우리네 인생이다. (찻주전자를 들고) 사람들은 이것을 내가 ‘소유’했다고 생각하지만, 자세히 보면 집착하는 이 물건에 내가 붙들려 있는 것이다. 노예가 된 것이다. 그래서 자유롭지 못한 것이다. 리모컨으로 텔레비전 채널은 잘도 바꾸면서 왜 (소유욕에 붙들린) 자기 마음은 바꾸지 못하는가. ‘소유’한 사람은 자기 것으로 여기니 내놓지 못하지만, ‘성취’한 사람은 원력을 이룬 것으로 만족하니 원래대로 돌려주게 된다.”
-다 내놓을 것을 왜 그렇게 애써서 많은 절을 창건했나?
“계기가 있었다. 어려서부터 절에서 자랐지만 부처님이 그렇게까지 좋은 줄은 몰랐는데, 군대에 가서 고립되니 사무치게 그리웠다. 그래서 탈영을 할까, 아니면 부처님을 이곳에 모셔올까를 고민했다. 그러다 모셔오는 쪽을 택했다. 의정부 26사단에 지금도 있는 호국황룡사와 호국일월사를 22~23살 때 군생활하며 창건했다. 제대하자 월하 노스님, 벽안 노스님 등이 산내 대중들을 모두 운집시킨 대중법회에서 25살의 새까만 나를 법상에 올려 법문을 하게 했다. 열린 사고를 가진 그분들이 후학의 울타리가 되어줘 그 기운으로 서울에 올라가 구룡사를 창건했다.”
-전통사찰들은 스님들 수행에 방해된다고 많은 공간을 닫아두는데 왜 통도사는 보궁의 출입까지 허용하고 대중들에게 모든 문을 열어젖혔나?
“다가가지는 못하더라도 다가오는 사람들까지 홀대한다면 ‘나쁜 불교’다. 대중들을 평등하게 대우하지 못하는 종교가 도미노처럼 무너지는 것은 한순간이다. 불자란 자기 중심적인 삶에서 더불어 함께 살아가는 삶으로 전환한 사람이다. 그런 불자라면 상대에 대한 배려와 관심과 친절이 나타난다. 부처님의 자비와 사랑과 보살도의 실천을 현대어로 바꾸면 서비스정신이다. 그것은 불자의 하심과 겸손에서 나오는 것이다.”
-사람들은 이상론을 펴지만 실천은 잘 못하지 않는가?
“윌키 오(영성심리학자)의 말대로 이상은 우리를 꿈꾸게 할 뿐 아니라 행동하도록 부추기는 것이어야 한다.”
글·사진 조현 종교전문기자 cho@hani.co.kr
전문 휴심정(well.hani.co.kr)
정우 스님의 ‘무소유’ 실천
사찰·보물급 문화재 570여점 내놓아
정우 스님은 일생을 걸고 일군 사찰들을 모두 조계종에 헌납하고 빈손으로 돌아갔다. 총무원청사에서 벌어진 종권을 둘러싼 폭력사태와 여타의 절 뺏기 싸움에 더 익숙한 불교계에 어떤 ‘말의 성찬’보다 더 큰 법비다.
통도사는 영축산이 병풍처럼 둘러싼 일대 600만평을 소유한 대가람이었다. 해방과 6·25를 거치며 많은 땅이 개인소유로 등록됐다. 통도사와 산내 13개 암자에 있는 노스님들 명의로도 10만여평이 있었다. 만약 개인소유권 그대로 노스님들이 열반해 절 땅이 속가의 유족들에게 인계될 경우 두고두고 화근이 될 일이었다. 정우 스님은 노스님들의 개인 땅도 모두 통도사로 귀속시켰다. 아무리 승가공동체라고 하지만 개인소유로 된 땅을 내놓기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이런 처사에 마뜩잖아하는 정서도 있었다. 그러나 더는 시비하기 어려웠던 것도 주지 스님 스스로 재산가치로 따지면 수백, 수천 배인 절을 내놓은 솔선수범 때문이었다. 그는 젊은 시절부터 모은 보물급 문화재 등 570여점도 남김없이 통도사 성보박물관에 내놓기도 했다. 조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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