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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심정 뉴스

길희성의 강화도 심도학사 개원의 의미를 주목해보라

등록 2011-06-15 20:01

세계에 내놓을만한 한국학자

  한국 지성인 사회에서 동서 철학과 종교학을 동시에 제대로 연구하고, 국내외에서 인정받는 학술서적을 내어, 그 학문성에서 세계에 내놓을 수 있는 학자 한분을 인문학 분야에서 들라면 길희성교수를 들고 싶다. 그가 그의 생에 말년에 그의 지성의 모든 열정을 쏟을 ‘공부와 명상의 집’을 강화도 내가면 오상리에다 마련하고, 21세기 한국 땅에서 강화아카데미를 개원하게 된 것을 우리는 눈여겨 보아야 한다(한겨레,6월9일자 23면자료참고). BC.380년경 플라톤이 아테네에 아카데미아를 설립하고, AD. 1200년 전후 보조국사 지눌이 순천 조계산에 수선사라는 수도공동체를 세우고, 1570년 퇴계가 생애말년 도산서당을 세워 그의 학문과 수행의 정성을 모두 쏟은바와 같이 길희성의 깊은 속뜻도 그 옛날 대학자들의 포부와 맥이 통한다고 본다. 뜻있는 기업가가 돈을 벌어 의미있는 문화사업을 돕기위해 적지않는 돈을 기탁하는 미담을 더러 듣기도 했고, 국민세금을 거둔 돈으로 문화광광부가 지역사회 문화공간을 마련하는 경우도 더러 있었다. 그런데, 이번 강화도에 세운 길희성교수가 원장으로 취임한 심도학사는 그 발원자체가 특이하고 숭고하다. 서강대 교수직을 2년 앞당겨 정년퇴직하고, 길희성교수는 그의 부인과 함께 강화섬을 여러번 답사하고 부부가 합의하기를 거주하고 있는 분당의 아파트를 팔아서 그 돈으로 강화섬에서 의미있는 한가지 일을 남은여생 해보자고 뜻을 세운 것이다. 학자로서 성공한 교수가 생에 말년을 계획세운 나머지 저술활동및 세계여행을 하면서 여유있게 보낸다고 해서 욕할 사람이 없을 터인데, 왜 굳이 사재를 털어 산속에 새로운 건축물을 짓고 열정을 쏟아 남은 여생을 한가지 일에 불태우려 하는가? 단순한 학문적 열정으로서는 불가능한 일이다. 그분과의 대화를 통해서 두가지 깊은 뜻이 있는 것을 알게 되었다. 첫째, 그가 평생 연구한 ‘종교인으로서 인간’(homo religius)의 궁극적 완성은 모든 사람의 맘 속에 씨앗처럼 혹을 작은 불씨처럼 존재하는 신비한 영성을 스스로 영글도록 완결시키며 동시에 모든 사람에게 가장 중요한 인간으로서의 자기완성을 관심하라고 독려하고 싶었던 것이다. 현대인들, 한국 사람들은 너무나 바쁘고 경제동물로 전락되어 있다. 마치 무한경쟁하고 돈만을 벌기 위해서 세상에 태어난 사람들같이 살아간다. 돈이 세상 살아가는데 중요한 필수품인 것은 사실이지만, 돈과 권력획득이 삶의 목적 자체가 되어버린 것은 정상이 아닌 것만은 틀림없다. 인간의 존엄성은 경제활동과 정치활동 그 이상인데 있다. 둘째, 길희성교수는 서울대 철학과를 졸업한 후에 예일대학에서 신학석사를 했고, 하버드대학에서 비교종교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은 뒤, 미국 세인트올라프대학 종교학과, 서울대 철학과, 그리고 서강대 종교학에서과 교수를 엮임한 전형적 엘리트 지식인이다. 그가 2009년 대한민국 학술원 회원의 한사람으로 선출된 것은 그가 전공한 분야에서 한국의 학계가 그의 학문성을 높이 산 결과이다. 그의 전공분야는 비교종교학이지만 구체적으로는 지눌의 선불교사상과 마이스터 엑하르트의 영성신학분야에서 돋보이는 학문적 공헌을 이룩하였다. 그가 남긴 주목받는 저작물 중에서도 <지눌의 선사상>과 <마이스터 엑카르트의 영성 사상>은 대표적 연구서이다. 그는 한국종교계에서 불교와 그리스도교의 상호깊은 대화와 협력과 상호 창조적 변화가 오늘과 미래의 한국사회에서 필수불가결한 과제라고 보는 것이다. “종교간의 평화없이 세계평화 없다”고 한스 큉이 말한바 있지만, 한국사회에서는 불교와 그리스도교와의 참된 평화없이 한국사회의 평화도 없고 창조적 한국미래 정신문화 발전도 없다고 본다. 그런데, 현실은 상호무지와 편견과 오해와 대립갈등 관계가 지속되고 있다. 길희성교수는 ‘불교와 그리스도교의 상호대화와 협력’을 중요화두로 한국사회에 던지고 있는 것이다.

성숙한 대화는 배타적 입장, 우월적 입장, 종교혼합적 입장을 경계함

강화섬에 개강하는 21세게 한국의 종교아카데미아 심도학사에서는 동서양 종교적 고전들을 공부하고, 명상하고, 대화를 통하여 스스로 깨달아가면서 자기의 진리이해 지평을 확대심화해 갈 프로그램이 준비되어 있다. 그동안 한국종교계에서 종교간의 대화와 협력관계는 이젠 과거의 무관심과 상호비방이라는 행태에로 파괴적 퇴행을 할 수 없을 만큼 사회적 공감대가 형성되어 있다. 다시말하면, 한국사회는 종교 다원사회 이며, 국교를 인정하지 않는 사회이니까, 각각의 종교는 선의의 경쟁과 협력을 해야하고 절대로 이웃종교를 비방하거나 폄훼하는 태도를 보이는 것을 사회의 집단지성이 혹은 국민 여론이 더 이상 용납하지 않게 되었다는 점이다. 아직도 자기종교에 충성한 나머지 종교간 대화나 ‘종교다원론’ 말만 들어도 긴장하고 경계심을 가지고 공격적으로 변하는 일부 한국 보수계 개신교 지도자들과 신도들은 사실 ‘거룩한 동굴에 갇혀있는 무리들’인 것이다. 그들은 진지하게 이웃종교의 참 본질을 알아보려고 하지 않는다. 그들에게 생명을 물려준 그들의 조상들중 삼국시대, 고려조시대, 조선조시대를 거치는 동안 한국의 기존종교에 귀의하여 삶을 영위했을 것임을 생각하지 않으려 한다. 보수계 한국 개신교 지도자들이 입을 벌려 비판하는 점은 두가지 인데, 한가지는 계시종교인 기독교 성경종교를 제외하곤 비진리 우상종교라는 것. 둘째, 설혹 다소 윤리적으로 좋은 점이 있다하더라도 종교간 대화 협력을 일단 용납하면 가장 멀리해야 할 종교혼합주의에로 물들고 말 것이라는 걱정을 하는 것이다. 한국 개신교 보수지도자들의 첫 번째 염려는 이웃종교에 대한 무지와 편견에서 온다. 그들은 불교가 무엇인지 제대로 알려고 하지 않는다. 불교의 역사, 교의, 상징, 종교의례, 수행법등에 대하여 진지하게 알아보려고 하지 않는다. 경계심은 자기방어적 공격심으로 변질한다. 그러나, 세계와 사회는 그러한 닫혀진 종교와 배타적 종교지도자를 지도자로서 인정하거나 종교인으로서 존경하지도 않는다. 독단과 독선이 통하는 시대는 지나간 것이다. 둘째염려는 그야말로 괜한 걱정이다. 오늘날 세계 정상급의 종교학자나 종교간 대화를 이끌고 가는 지도자들이 공통으로 공감하는 점이 바로 ‘종교간의 대화 협력’이 각 종교의 특성과 정체성이 약해지고 소멸되는 싸구려 관용주의에 희생되어서는 않된다는 것이다. 성숙한 종교간의 대화 협력은 역사적 종교들 각각의 전통이 지닌 고유한 가치와 특성을 창조적으로 살려나가면서 타종교에 있는 특성을 배움으로서 자신이 귀의하고 있는 종교가 더 풍성해지고 성숙해지자는 것이다. 종교간의 대화에서 종교혼합주의는 종교배타주의 못지 않게 경계하는 점이다. 우리는 강원룡, 김수환, 법정 세분이 종교간 대화협력증진에 지도자로서 일했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그들에게서 개신교, 천주교, 불교에 귀의한 신앙인으로서 자기정체성이 흐려진 모습을 우리사회인들은 본 적이 없다. 길희성교수가 추구하는 종교간의 대화협력의 궁극적 목적이 ‘초종교적 영성의 추구’란 것을 종교혼합적 혹은 인류보편적 새종교의 창설운동으로 오해해서는 않된다. ‘초종교적 영성’은 새롭게 인위적으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모든 역사적 세계종교들의 핵심속에 있는 것이다. 그 심층차원에 들어가면, 역사적 종교들의 절대성이 상대화되면서도 매우 역설적으로 상대적인 ‘역사적 종교들의 전통적 영성’을 통하여 ‘초종교적 영성’을 공유하는 초탈의 경지에 들어가는 것이다. 구체적인 내집 식구, 옆집 이웃사람, 특정 연인을 사랑함이 없이 ‘보편적 인류애’를 실현할 수 없는 것이고 그저 입술로만 관념적 사랑을 부르짖는 사람이 될 뿐이다.

‘없이 계신 하나님’을 어떻게 언제 경험하는가?

최근 영국물리학자 호킹박사가 사후생을 부정함으로서 종교일반의 근거를 부정한듯한 무종교 내지 무신론의 세계관 확장에 박차를 가한 것 처럼 신문에 왈가왈부 한바 있다. 뇌과학이나 일부 분자생물학자들의 과학적 실증론으로서 종교가 환상에 불과하다고 주장했던 무신론-유신론 논쟁은 인류문명사 속에서 오래기 때문에 하등 새로운 것이 아니다. 역설적으로 말하면, 호킹 박사의 주장은 물질환원주의적 실재관을 신봉하는 자연과학자로서는 정직한 말이다. 사실, 종교나 신의 문제가 과학적 실증주의로서 확증이 된다면 종교는 유익한 일보다도 불이익이 훨씬 더 많다. 문제는 자연과학자로서 그가 과학자로서가 아니라 ‘과학종교자’로서 말함으로써 종교생활을 하는 많은 동료 과학자를 본의아니게 인격모독하고 있다는 점이다. 길희성교수는 최근에 출판한 그의 논설집 <하나님을 놓아주자>(도서출판 새길) 제1부 ‘하나님’ 담론에서 현대기독교의 위기는 그 본질이 전통적 신관이 설득력을 읽고 있다는 것, 그럼으로 전통적 “신관 과의 정면 승부없이는 모든 신학적 논의가 사상누각에 지나지 않는다”고 갈파하고 있는데 옳은 말이다. 지면상, 위에서 소개한 책 제1부에서 길희성교수가 현대 그리스도교 지성계에서 이야기되는 최고수준의 새로운 신이해 담론을 소개 할 수 없기 때문에, 관심있는 독자들은 직접 그 부분의 독서를 통해 논의에 참여해보는 것이 유익할 것이다. 나는 간단하지 않는 현대 그리스도교의 신에 대한 담론을 여기 소개하거나 반복하고 싶은 생각은 없다. 다만, 매우 실존적 고백을 한다면 다석 유영모가 멋있게 우리말로 표현한 ‘없이 계신 하나님’을 언제, 어떻게 경험하고 왜 신앙하는가 말하려고 한다. ‘없이계신 하나님’이란 신에 관한 비은유적, 비상징적, 존재론적 표현인데, 사실 그리스도교 사상사에서 어거스틴, 아퀴나스, 폴 틸리히, 카알 라너 같은 대가들이 말하려했던 ‘존재자체이신 하나님’을 우리말로 새롭게 언표한 것이다. ‘계심’이란 ‘있음’의 존칭표현이고, ‘없이’란 ‘존재자들’의 있음조건인 시간과 공간을 점유하고 있지 않다는 의미에서 ‘없이’이기에 공, 도, 텅빔, 무라고 종교체험자들은 할 수 없이 언표한 것이다. ‘없이계신 하나님’은 모든 존재하는 것들의 있음의 그루터기 이고 생명체의 ‘힘과 의미’이기도 하다. 그렇기에, 나는 구체적으로 ‘없이계신 하나님’의 현존을 생명들의 연초록 움틈, 정의와 진리에의 목마름, 새로움의 창조적 산고, 조건없는 자기희생적 사랑의 열정 속에서 본다. 나는 지구진화 역사과정속에서 아주 최근에 꽃피어난 한송이 들꽃이기 때문에, ‘없이계신 하나님’의 크기와 높이와 넓이를 내맘과 머리통으론 도저히 다 알 수 없다고 고백한다. 형이상학적 탐구와 갈증은 계속해서 느끼겠지만, 거기에서 하나님을 만나리라고 기대하지 않는다. 내가 스티브 호킹박사나 에드워드 윌슨 박사와 다른 관점을 가진 것은, 그들은 뭇생명체 속에 일이관지하게 관통하는 ‘사랑’의 에너지와 갈망, 그리고 약한자 억울한자들을 도우려고 자기를 불태우는 사랑의 불꽃이 종족보존 본능의 ‘우연과 필연’의 결과물이라고 보지만, 나는 ‘생명과 사랑의 영이신 하나님의 신비한 유인과 설득’이라고 본다. 나는 생명있는 것들의 ‘사랑의 불꽃’ 속에서 가장 뚜렷하게 ‘없이계신 하나님’의 현존을 느끼고 본다. 나는 정의가 짓밟히고, 진실이 권력과 사이비 언론에 의해 은폐되는 현실 앞에서 정의와 진실을 자기목숨을 내걸고 증언하는 ‘경외할 양심불꽃’ 속에서 ‘없이계신 하나님’의 현존과 심장박동을 보고 느낀다. 그 이외 모든 신에 관한 담론은 내겐 2차적이고 간접적이고 개연성에 불과 하다. ‘없이계신 하나님’은 나의 맘과 머리통을 넘어서 계시지만, 동시에 내 맘과 머리통을 포함한 만유 안에 계시고, 만유를 통하여 계신이라고 믿는다(엡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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