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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산 등 실학자들 천주교로 이끈 서양윤리서 칠극

등록 2021-06-21 19:51수정 2021-06-22 06:04

[짬] 한문학자 정민 교수

조선시대 실학자들이 읽었던 스페인예수회신부의 서양윤리교양서 <칠극>을 번역해 펴낸 정민 교수. 사진 조현 기자
조선시대 실학자들이 읽었던 스페인예수회신부의 서양윤리교양서 <칠극>을 번역해 펴낸 정민 교수. 사진 조현 기자

조선시대 빼어난 유학자들이 어떻게 나라에서 금기시했던 서학(천주학)에 마음이 기울었을까. 실학자와 서학의 만남을 탐구해온 정민(60) 한양대 국문과 교수가 그런 질문의 끝에서 <칠극>(김영사 펴냄)이란 고서를 번역해냈다. <칠극>은 스페인 출신의 예수회 선교사 데 판토하(1571~1618·방적아)가 쓴 ‘마음 수양서’다. 한문 실력을 바탕으로 한 탐구 정신으로 실학자와 문장가들의 흔적을 누비고 고서를 뒤져 70여권의 저서를 써낸 정 교수를 지난 11일 서울 한양대 연구실에서 만났다.

스페인 선교사 데 판토하 쓴 ‘마음 수양서’
유교 사단칠정에 빗댄 ‘7가지 죄’ 극복법
마테오 리치 후계자…선교전략용 저술
“중국인들 천주교 거부감에 완충장치로”

조선 들여와 사도세자도 읽어 ‘서학 붐’
“소외된 남인들 ‘변혁의 희망’ 탈출구로”

“마테오 리치의 <천주실의>가 ‘이것이 천주교다’라고 문답식으로 알려주는 가톨릭교리서라면, <칠극>은 서양인들의 윤리서다. ‘너희들(중국)한테는 희로애락애오욕이란 칠정을 끊는 인의예지라는 사단이 있잖니. 서양에도 교만·질투·탐욕·분노·식탐·음란·나태, 이 7가지 죄를 다스리는 겸손·사랑·관용·인내·절제·정결·근면이란 처방이 있어. 유학에서 말하는 것과 같지?’라고 종교색을 빼고 들려준 게 <칠극>이다. 이게 중국인들에게 이단신앙(천주교)을 받아들이는 완충장치가 됐다. 서구 그리스도교가 중국에 토착화하는 데 이정표가 된 책이다.”

<칠극>은 서구문화에 대한 중국인의 이해도를 높이고 거부감을 없애 천주교가 자연스럽게 스며들게 하기 위한 선교적 전략에 따라 발간된 책이란 얘기다. <칠극>의 저자 판토하는 이탈리아 출신 선교사 마테오 리치보다 15살 후배로, 중국에는 28년 늦게 왔다. 그는 예수회의 선배인 마테오 리치의 조수로 중국 선교를 시작해 <천주실의>의 후속편을 쓴, 마테오 리치의 후계자 격이다. 그런데 중국 지식인 사회에 천주교를 접목시키기 위해 마테오 리치보다 더 노련한 방법을 썼고, 문장은 오히려 판토하의 글이 뛰어나다는 것이 정 교수의 평이다.

“예수회는 현지 토착문화와 사상을 존중하는 선교 전략을 펴기 위해 초기에 ‘보유론’적 시각을 견지했다. 즉 그리스도교가 유교를 보완해준다는 논리였다. 그래서 <성경>이 아닌 소크라테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디오게네스, 알렉산더, 세네카 등 그리스와 로마 철학자들이나 아우구스티노, 그레고리오, 베르나르도 등 서양 중세 교부 철학자 등의 숱한 잠언과 일화를 소개하고, 중간중간 중국 경전에서 예시를 끌어와 독서의 친밀도를 높이고, <성경>을 곁들여 천주교에 대한 거부감을 줄이는 방법을 썼다. 그래서 중국인들은 <칠극>을 보고 ‘아, 이건 서양인들의 극기복례를 말하는 책이다’라고 받아들였다.”

청나라 때 천주교예수회 선교사 데 판토하의 &lt;칠극&gt; 한글 번역서 표지. 사진 김영사 제공
청나라 때 천주교예수회 선교사 데 판토하의 <칠극> 한글 번역서 표지. 사진 김영사 제공

<칠극>은 조선으로 건너와 사도세자를 비롯한 많은 이들에게 읽혔고, 실학자들 사이에서 서학 붐을 일으키는 기폭제가 됐다. 유몽인의 <어유야담>에는 허균이 <칠극>을 처음으로 조선에 들여왔다는 주장이 실려 있고, 사도세자가 읽은 책 목록에도 <칠극>이 포함돼 있다. 남인의 큰스승인 성호 이익은 ‘<칠극>에는 우리 유가에서 미처 펴지 못한 것이 있어, 예로 돌아가는 공부에 크게 도움이 된다’면서 ‘다만 천주와 귀신에 대한 주장을 섞은 것은 해괴하니, 모래와 자갈을 체질하고 고명한 논리만 가려 뽑는다면 바로 유가의 부류일 뿐이다’라고 평했다. 이를 두고 실학자들은 이익의 진의가 앞줄에 있다는 파와 뒷줄에 있다는 파로 갈려 싸웠다.

“안정복은 이익의 말이 ‘서학을 경계하라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이익의 직계 제자들이 천주학 쪽으로 돌아선 것을 보면 이익의 뜻은 당시 분위기상 내놓고 말은 못했지만 앞줄에 방점이 있었던 것으로 볼 수 있다. 이후 이벽·이가환·정약용의 글에서 <칠극>이 자주 언급되는 것을 봐도 알 수 있다.”

정 교수는 “당시 남인 실학자들이 <칠극> 등 서학 책을 읽은 것은, 노론의 전제가 70~80년간 이어지면서 변혁의 희망을 가질 수 없던 남인들이 우리 사회를 업그레이드 시키기 위해 통로를 찾는 과정의 하나였다”고 봤다. ‘청나라 수도에 가면 서점이 30~40곳 늘어서 <앵무새 사육법> 같은 실용서까지 진열돼 있고, 서양문물이 들어와 발전해 가는데, 조선에서는 여전히 ‘무찌르자 오랑캐’만 노래하고, ‘사단칠정론’만을 두고 싸우고 있으니, 서양의 앞선 문물로 나라를 발전시켜보고 싶은 열망이 서학에 대한 관심으로 나타났다’는 것이다.

다산에 이어 연암 박지원에 꽂혀 지난해 말 <연암독본>(1·2권)을 펴내기도 한 정 교수는 “연암의 <허생전> <양반전> 등을, 매점매석해 떼돈을 벌었다는 식으로만 읽는다면 한심한 수준”이라면서 “북벌을 할 때가 아니라 새로운 것을 배워 변화를 꾀해야 할 ‘북학’의 시대가 왔음을 알리기 위해 시대적 허구와 위선을 통렬하게 깨부순 ‘우상파괴’를 볼 수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조현 종교전문기자 cho@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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