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짬] 시화집 함께 펴낸 김양수 화백·석지현 스님
어지러운 꿈을 꾸고 나서 문을 열어보니 온통 하얀 눈이 천지를 뒤덮어서 이 마음의 혼몽도 끊어지는 때가 있다. 보채는 아이를 달래는 엄마의 품처럼 스트레스로 찌든 마음을 평안하게 하고, 눈 쌓인 천지처럼 마음의 때를 지우는 62점의 선화와 선시가 만났다. 남도의 끝자락 전남 진도의 산골 화실에서 수도자처럼 사는 김양수 화백이 그려낸 선화에 ‘선시’의 대가인 석지현 스님이 가장 멋진 선시들을 골라서 감상을 달아, 피안으로 안내하는 책이 출간됐다.
<선화와 선시>(민족사 펴냄)를 낸 화백과 스님을 12일 서울 종로구 삼봉로 민족사 사무실에서 만났다.
고향 전남 진도 산골 수도자 김 화백
석지현 스님 뽑아준 고승들 시 맞춰
경한 보우 김시습 휴정 백거이 등등
2년간 62점 그려 ‘선시와 선화’ 출간 “선시에 도달하는 작은 뗏목이나마”
“한국적 감성·경치 탁월하게 묘사”
전남 진도 임회면 여귀산 자락에 숨어있는 적염산방을 찾은 이들은 하나같이 이 세상이 아닌 무릉도원을 연상한다. 김 화백은 이곳에서 그의 호 일휴(一休)처럼 쉼과 여백의 삶을 누렸지만, 2년 전 선화 작업을 시작하면서부터 오히려 번뇌에 휩싸였다고 한다.
“석지현 스님이 뽑아준 선시를 읽고 또 읽어보니, 하나같이 깨달음의 마음자리를 담아내고 있어, 여기에 그림을 잘못 덧붙여서 ‘시의 격을 떨어뜨리면 어떻게 하나’, ‘고승들에게 누가 되면 어떻게 하나’ 걱정되어서 일주일 동안 한 차례도 붓을 들지 못한 적도 있어요.”
번뇌가 없으면 보리(깨달음)가 없고, 스트레스가 없으면 평안도 없는 것일까. 김 화백은 “고승들이 도달한 깨달음의 경지에 이르지 못했다 하더라도 선시에 다가갈 수 있는 작은 뗏목 구실이나마 하자고 생각하니, 마음이 한결 편해져서 마침내 붓을 들 수 있었다”고 했다. ‘하 수상한 시절’에 조그마한 마음의 여백이나마 안겨주자고 마음을 먹으니, 마침내 용기를 낼 수 있었다는 것이다.
곁에서 이 말을 들은 석지현 스님은 선시인답게 화답했다. 그는 1969년 <중앙일보> 신춘문예 시 부문에 당선된 이래 선시라는 장르를 처음으로 알렸다.
“누가 되면 어때요. 괜찮아요. 이 책에 나오는 선시를 쓰신 분들을 만일 지금 이 자리에 모셔다 놓고, ‘일생을 잘 사셨습니까’라고 물으면 ‘모두가 부족함이 있었다’고 답할 거예요. 우린 육체의 한계를 가진 사람이니까 그래요. 그러니 너무 걱정할 필요는 없어요. 완벽해지려고 하기보다는 최선을 다할 뿐이지요. 김 화백의 선화는 그때그때 최선의 것을 담았어요.”
스님은 “초월의 세계에 머물러만 있으면 예술이 될 수 없다”면서 젊은 날 20여년 인도 순례객답게 인도의 성자 라마 크리슈나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라마 크리슈나는 이미 초월의 경지에 들어간 분이지만, 사랑하던 제자가 죽자 심장이 오그라드는 통증을 느꼈어요. 서산대사 청허휴정도 이미 깨달음을 얻은 분이지만, 10년을 함께 산 제자가 떠나갈 때는 인간적인 슬픔을 시로 노래했어요. 청산은 깨달음이고 번뇌는 구름이라지만, 청산에 구름이 감돌아야 풍경이 더욱 멋들어지듯이 선시도 선화도 그렇지요.”
스님은 “그런 점에서 우리나라 선인들의 선시가 중국의 선시보다 오히려 탁월하다”고 평했다. “한국인들은 스스로를 폄하해서 가치를 자각하지 못할 때가 많지만, 서산대사의 시는 이백의 시풍과 같으면서도 그를 압도해요. 중국의 시풍은 크고 쾌활하지만 우리의 선시는 감성이 세심합니다. 매월당 김시습의 시를 보면 인간의 비애와 허탈감을 처절하게 담고 있다는 점에서 최고봉이지요. 중국엔 그런 시가 없어요.”
스님은 “한국인들은 자잘한 인간의 감정과 한국적 풍경을 묘사하기에, 초월했으면서도 다시 와서 기뻐하고 슬퍼하고 춤추는 모습을 담는데, 김 화백의 선화가 바로 그런 한국적 감성, 한국적 경치를 담고 있다”고 평했다.
이번 책엔 백운경한, 태고보우, 함허득통, 매월당 김시습, 청허휴정, 진각혜심, 부대사, 야보도천, 천동여정, 왕유, 백거이, 유종원, 벽송지엄 등 기라성 같은 고승들과 명시인들의 시가 망라됐다. 하나의 달이 천강에 비추듯, 깨달음의 경지를 각자의 활발한 경계로 드러낸 시를 각기 다른 그림으로 표현하는 게 선화다. 김 화백은 “지금까지는 달마 그림 정도가 선화라는 일반인들의 시각이 있었지만, 선화라면, 선(禪)의 정신이 드러나야 한다”고 말한다. 그 그림을 보는 순간, 번뇌가 떨어져 나가고, 마음의 여백이 생기고, 평정심을 회복할 수 있는 뭔가가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책에 나온 선화 작품들은 오는 19일부터 28일까지 서울 경복궁 옆 법련사 불일미술관에서 전시된다. 판매가를 60%가량 할인해 한점당 60만원에 판매하자는 민족사 윤창화 대표의 제안을 김 화백이 선뜻 받아들였다. “지하철 안에서도 선시와 선화를 감상하는 대중화를 꾀해보자”고 의기투합했다.
조현 종교전문기자 cho@hani.co.kr
석지현 (왼쪽) 스님과 김양수(오른쪽) 화백이 12일 서울 종로 민족사 사무실에서 ‘선화와 선시’에 실린 작품을 보며 의견을 나누고 있다. 사진 조현 종교전문기자
석지현 스님 뽑아준 고승들 시 맞춰
경한 보우 김시습 휴정 백거이 등등
2년간 62점 그려 ‘선시와 선화’ 출간 “선시에 도달하는 작은 뗏목이나마”
“한국적 감성·경치 탁월하게 묘사”
‘선화와 선시’ 표지. 민족사 제공
김양수 화백의 선화 작품. 민족사 제공
김양수 화백의 선화 작품. 민족사 제공
연재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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