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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심정 조현이만난사람

산사 적막한 등불 아래 시심에 젖어 잠 못 들리

등록 2009-03-18 16:51

조계종 교육원장 퇴임하는 청화스님

‘금강경 표준본’ 발간 등 업적 남기고 초야로 회귀

 

 

절집 얘기를 그린 이광수의 산문집을 즐겨 읽던 시골 소년이 있었다. 그는 단풍잎에 보슬비가 떨어지던 어느 가을날 시심에 젖어 뒷산으로 향했다. 뒷산 정상에 오르자 멀리서 외딴집이 보였다. 골짜기를 내려가 계곡을 건너 그 외딴집 문틈으로 안을 들여다보자 그 안엔 ‘금빛으로 된 조각품’이 있었다. 그 불상을 보고 물러서자 댓돌 위에 흰 고무신 한 켤레가 정갈하게 놓여 있는 것이 보였다. 소년은 부슬부슬 내리는 비를 한참이나 맞으며 그 흰 고무신을 하염없이 보고 내려왔다. 그날 밤 문틈으로 처음 본 부처님과 흰 고무신을 생각하며 잠 못 이루는 밤을 보내던 소년은 부처님을 찾아 괴나리봇짐 하나를 챙겨 전북 남원에서 서울로 가는 완행열차에 올랐다. 시골 소년의 책보 안엔 김소월 시집과 고시조집, 소설 한 권이 전부였다.

 

그렇게 16살에 북한산 진관사로 가 머리를 깎은 소년은 깊은 산사의 적막 속에서 더욱더 시심에 젖어 잠 못 이루는 밤을 보내곤 했다. 문학적 열정과 감흥에 들떠 한때는 불면으로 신경쇠약과 황달병을 얻자 그는 창작 노트를 모두 불태워버리고 선방에서 참선을 하면서 출가승으로서 본분사에 집중했고, 홀로 수행할 수 있는 수행관을 정립하고 중생을 위한 삶을 살기로 서원했다.

 

그러던 1972년 소요산 자재암에서 정진하던 중 일간지 문예공모에 당선된 승려시인 ‘김원각’의 시를 보고 다시 시흥이 발동해 시를 쓰기 시작했다. 그리고 78년 한국일보 신춘문예에 당선돼 등단했다.

 

하지만 시대는 그를 산사에서 시나 쓰도록 놓아주지 않았다. 군부독재의 군홧발 아래서 들려오는 민초의 신음소리는 그의 가슴에서 울려오기 시작했다. 그는 지선 스님 등과 함께 실천불교승가회를 조직해 민주화를 위해 거리로 나섰다. 그리고 정치권과 다름없이 전횡과 부패로 얼룩진 조계종단 개혁을 위해 두 팔을 걷고 나섰다. 그렇게 개혁 종단의 등장에 앞장섰지만 그는 강원도 소양강 건너에 있던 청평사를 지키며 시나 쓰고 살길 원했다. 5년 전 조계종 교육원장을 맡아 달라는 당시 법장 총무원장의 청을 거부하다가 “그러려면 개혁은 왜 했느냐?”는 항변에 못 이겨 교육원장을 맡았던 그는 어느덧 조계종 최초로 교육원장 정년을 다 채우고 3월 말로 퇴임해 초야로 돌아간다.

 

재임 5년간 조계종 행자와 스님들의 교육시스템을 마련하고 불자 대중들을 위해 <간화선>을 비롯한 수행지침서들을 발간한 데 이어 해석서가 난립해 있는 금강경 표준본을 만들어내는 등의 일들을 소리 없이 해낸 그이지만, 직원들이 하고 시스템이 한 일이지 자신은 “한 일이 없다”는 게 마지막 인사다. 총무원장으로 추대하려는 주위의 권유에도 “그건 하고 싶은 사람이나 하는 것이지, 나처럼 자리에 아무런 관심이 없는 사람이 할 수 있는 자리가 아니다”라 답했다. 오래전부터 귀거래사를 불러온 그다운 인사법이다.

 

“북한산서 시 쓰며 살고 싶어” 등단 31년만에 시집 발간도

그가 바로 조계종 교육원장 청화(66) 스님이다.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 공동의장과 실천불교전국승가회 의장을 지내고 지금도 6·10항쟁 계승사업회 공동의장과 참여연대 공동대표를 맡고 있는 그에게 직함에 맞는 투사나 현실참여적 모습은 찾을래야 찾을 수 없다. 현실적 다툼일랑 오래전에 초월한 듯 맑은 그의 어디에 민주화와 종단개혁의 선봉에 선 강단과 결기가 숨어 있는지 궁금할 뿐이다. 오히려 ‘청화’(靑和)라는 법명대로 ‘푸르면서도 화평한 기운’에서 깊은 산사의 솔향을 느끼는 게 수월하다.

 

그는 이제 북한산 자락 정릉 청암사란 조그만 거처에서 오랜 소원대로 “시를 쓰면서 살고 싶다”고 했다. 그가 전직을 예비하듯 시집을 냈다. <무엇을 위해 살 것인가>(월간문학 출판부 펴냄)다. 시를 쓰는 그 자체를 즐길 뿐 남에게 내보이려 하지 않은 그의 성정 탓에 그는 시단에 등단한 지 31년 만에야 첫 시집을 냈다.

 

“무슨 전쟁이 끝난 밤이냐/ 사선을 넘어온 듯한 목숨들이// 살아 있다고, 아 살아 있다고 외치는/ 저 조용한 환호성을 보아라.// 이 캄캄한 천지의 어둠으로/ 왜 사느냐고 묻고 싶은 밤// 생존은 저렇게 빛나는 보석이 되어/ 이미 그 휘황함으로 답하고 있는가”

 

<밤 불빛>이란 그의 시에서 이 고해에서 살아가는 삶에 대해 치열한 수행자의 고뇌로 답하고 있다. 비록 고요히 산사에 머물며 시를 쓰는 호사를 누리지는 못했지만 늘 고통 속에서 신음하는 이들과 함께 몸으로 쓴 시들이 알알이 배어 있는 시집이다.

 

이제 총무원청사를 떠나 초야로 돌아가면서도 “시인은 고독해야 한다”며 이미 고독할 준비가 되어 있는 ‘미소년의 미소’만큼 아름다운 시가 있을까.

 

그의 교육원장 퇴임식 겸 시집출판기념법회가 오는 24일 오후 5시 서울 견지동 총무원청사 전통문화예술공연장에서 지관 총무원장을 비롯한 스님들과 민주화 동지였던 김상근 목사, 함세웅 신부 등이 참석한 가운데 열린다.

글·사진 조현 종교전문기자 cho@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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