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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심정 조현이만난사람

“유학, 폭력으로 인권 억압할 때 혁명 인정”

등록 2010-02-24 11:31

유학자 류승국 선생

“옛날은 시비 치중, 오늘날은 이해득실만 따져”

 신-물질, 동-서 사상 회통되는 대동사회 예고

 

 

극장 개봉 중인 영화 <공자-춘추전국시대>를 보면 2650년 전 주인과 함께 무덤에 순장될 위기에 놓인 10살 남짓한 종 칠사궁을 살리기 위해 당대 최고 권력자들과 맞서는 모험을 감행하며 인(仁)을 세우려는 공자(저우룬파 분)의 모습이 인상적이다. 하지만 2천년 뒤 공자를 ‘성인 중의 성인’이라는 만세종사로 떠받들며 유학을 국가통치 이데올로기로 삼았던 조선의 지배층들은 드라마 <추노>에서 엿볼 수 있는 것처럼 노비를 개·돼지보다 천하게 여긴다. 평생 학대받고 쫓기는 노비들의 처절한 노래 소리가 시청자들의 가슴을 후빈다. 어느쪽이 진정한 공자와 유학자의 모습일까.

 

최근 성균관대 동아시아학술원인 유교문화연구소에서 유교문화총서 4권을 펴낸 이 시대 대표적인 유학자 류승국 선생(87)을 지난 22일 만났다. 1980년대부터 경기도 이천의 산기슭에 한옥을 지어 살고 있는 그가 서울 광화문 인근 한 오피스텔에 사랑방격으로 마련해 사용 중인 사무실에서다.

 

태극기 원리 ‘정답’ 내놔 젊은 나이에 학술원 회원 계기

 

그는 30여년 전인 50대 초반에 이희승, 이병도 등 70~80대의 대학자들이 즐비했던 학술원 회원으로 추대됐다. 그토록 젊은 나이에 학술원 회원이 된 것은 태극기 때문이었다. 일본에서 박정희 정권의 초대로 방한했던 조총련 대표단들이 북녘의 인공기와는 다른 태극기를 들고 있던 안내자에게 태극기의 원리를 물었다. 답변을 못한 안내자는 방문 기간 안에 알아서 답해주겠다고 약속하고 이를 문화부에 문의했으나 문화부에 아는 사람이 없어, 문교부에 문의했으나 문교부에도 총무처에도, 어떤 정부 부처에서도 이를 아는 사람이 없었다. 

 

그래서 학술원에 이에 대한 설명을 부탁했으나 20여명의 회원들의 의견이 일치하지 않았다. 그 때 누군가 ‘류승국’을 얘기했고, 그에게 원리의 설명을 당부했다. 류 선생은 “우주 만유의 근원이 태극이고, 우주의 중심이 나의 중심이요, 나의 주체가 즉 남의 주체이므로 나와 남의 주체성과 인권을 존중해야 한다’면서 ‘한민족이 통일할 원리 뿐 아니라 온인류가 살아갈 원리가 담긴 태극기의 뜻’을 설명했다. 그의 해설안은 수정없이 통과됐고, 젊은 그가 학술원 회원으로 추대되는 계기가 되었다.

 

성균관대 유학대학장과 한국정신문화연구원 원장 등을 지내면서 전국 대학의 총학장들에게 며칠씩 한국 정신을 강의하곤 했던 그는 현직에서 은퇴한 지 수십 년이 지났음에도 당시의 열정과 총기가 조금도 식지 않아 마치 청년을 방불케 한다. 명불허전(名不虛傳·명성이나 명예가 헛되이 퍼진 것이 아님)이다. 앉은 40대를 상대로 미수의 노유학자는 반은 선 채로 하늘이 인간에 준 덕인 천(天)과 인(仁)을 불꽃처럼 밝혀낸다. 명강을 홀로 경청한 지 얼마였을까. “공자를 따른다는 조선의 위정자들은 왜 노비, 상민, 여성, 서자, 백정 등 약자들을 그토록 박대하며 자신들의 권력을 지키는 데만 급급했는가”라는 첫 질문을 던졌다.

 

백성이 첫째요, 국가는 둘째요, 그 다음이 군주

 

“군주봉건시대에도 백성을 위한 왕도정치가 있고, 폭압하는 패도정치가 있다. 충(忠)은 덕을 가지고 마음으로 따르게 하는 것이다. 폭력으로 인권을 억압할 때는 혁명을 인정하는 것이 유학이다. 프랑스혁명과 미국의 노예해방에 수백년 앞서 세종대왕은 백성을 천민(天民)이라면서 ‘백성 한명 한명은 하늘이 낸 것이기에 누구도 그들의 인권을 함부로 할 수 없다’고 했고, 율곡 이이는 ‘성인과 보통사람이 인간의 본성으로는 한가지’라면서 인간평등과 노예해방을 주장했다. 유학에선 백성이 첫째요, 국가는 둘째요, 다음이 군주다. 백성과 국가가 없고서는 군주도 있을 수 없다.”

 

하지만 유생들이 이끌던 조선의 백성과 국가와 군주가 동시에 무너진지 100년. 그리고 3.1절을 앞두고 있으니, 유학의 선비정신으로 무장하고서도 유교 기득권층에게서 절망해 새로운 대안으로 ‘야소교’(예수교)를 택한 구한말 안중근, 조만식, 이상재, 안창호, 이승훈, 서재필, 김구 등 선각자들의 마음이 돼 “왜 선말의 유생들은 존망의 위기에서도 양반놀음과 시비놀음에 매몰돼 있었는지”를 다시 물었다.

 

“문제가 있으면 ‘시비이해’를 따지기 마련이다. 그런데 옛사람들은 옳으냐, 그르냐는 시비를 가리는 데 치중했다. 서양과 일제가 의(義)를 앞세우고 왔는가. 그들은 군함과 총칼을 앞세우고 왔다. 무력에 무릎 꿇지 않으려면 힘을 길러야 하는데도 이해를 보지 못하고 시비만 따지고 있었으니, 상황에 대처하는 능력이 부족한 것이다. 옛사람만이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다. 옛사람들은 시비에 치중했고, 오늘날은 오직 내게 이익이 되느냐, 되지 않느냐 하는 이해득실만 따진다.”

 

눈에 보이지 않아도 딱 들어맞는 것, ‘거시기’로 표현

 

그가 세계적인 세미나들의 기조강연에서 제시해 주목을 받은 인류문명의 변천사와 미래는 명료하다. 그는 과거를 동양적 가치가 지배한 전근대적 군주봉건사회와 서양적 가치가 지배한 근대적 민주공화사회로 변화해왔다고 본다. 신분사회에서 대중인권사회로, 종교중심사회에서 과학중심사회로, 신 중심에서 물질 중심으로 바뀌었다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창조해가야 할 다음 세상이다. 그는 탈근대사회를 인간생명이 가장 중요한 가치로 떠오른 시대가 될 것으로 보았다. 신(하늘)과 물질(땅)이 조화를 이루고, 동양과 서양의 사상이 회통되어 동서화합의 대동사회가 이뤄진다는 것이다.

 

그는 우리의 정신이 인류의 미래사회를 여는 열쇠가 될 것이라고 믿고 있다. 유대인들도 자신들만이 선택받기로 약속받았다고 믿고, 중국인들도 동서남북을 모두 야만과 오랑캐로 멸시하고 자기들만이 중심이라는 중화주의인데 반해 인간들을 불쌍히 여겨 모든 인간을 돕고 이롭게 한다는 홍익인간, 재세이화 정신의 뿌리 속에서 한번도 먼저 남을 침략한 적이 없는 상생의 평화로움이야말로 살육과 전쟁으로 점철된 인류문명에 빛이 되기에 충분하다는 것이다.

 

그는 한민족의 시원인 환웅이 환인으로부터 받아가지고 왔다는 천부인(天符印)을 그 빛으로 제시했다. 많은 이들이 천부인을 청동검과 청동거울, 청동방울로 추정하곤 했다. 하지만 류 선생은 “그게 아니다”고 했다. 그리고 옆에 놓여있던 종이 한장을 둘로 찢었다. 

 

“둘을 맞추려면 한쪽이라도 없어서는 안된다. 한쪽을 잃어버리면 반쪽을 아무리 정교하게 만들어도 아귀가 딱 들어맞지않는다. 주몽이 아들 유리와 헤어질 때 징표로 준 검을 맞춘 것처럼, 평강공주와 온달과 헤어질 때 준 거울 한쪽을 나머지 한쪽과 맞춘 것처럼, 양쪽 것이 모두 있어야 딱 들어맞는다. 이렇게 맞는 것이 부(符)다. 하늘에서 내려주어 딱 들어맞는 것이 무엇이겠는가. 하늘을 상징하는 형이상학, 그리고 하늘의 정신과 다른 땅의 물질과 육신을 상징하는 형이하학, 그런 천(天)과 지(地)에 이은 인(人), 인간의 도(道), 이 세가지가 천부인이다.”

 

그는 서양의 학문은 눈에 보이는 것이지만 우리나라 전통에선 눈에 보이지 않아도 그렇게 딱 들어맞는 것, 즉 진리에 계합하는 것을 추구했기에 ‘묘(妙)한 도(道)’라거나 현묘지도(玄妙之道)라고 했다고 한다. 그래서 말로 설명하기 어려웠기에 형이상학과 형이하학, 인도를 모두 닮은 그것을 설명하면서 그냥 ‘거시기’라고 추상적으로 표현하곤 했다는 것이다. 그는 하늘의 도와 땅의 도, 인간의 도 등 천부인, 세 가지를 모두 갖추어야 후천의 성인이 될 수 있다면서 그럴 때 정신세계만 갖춘 자가 아니고 정신세계와 함께 육체적 건강을 지니고, 심리적으로 안정되고, 인격적으로 훌륭하며, 예술세계도 구현할 수 있는 인간형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누구나 사랑할 수 밖에 없다”며 금새 눈물 글썽

 

이렇게 ‘우리 것’의 우수성을 내세운다고 하더라도 그는 단군을 내세우고 다른 성인을 내치는 국수주의자가 아니다. 그는 “성인들이 지금이라면 지금 상황에 맞는 말씀을 하겠지만, 그들의 말이 꼭 지금 상황에 맞지 않는다고 폄하할 수 없는 것”이라며 “원숙해지는 가을의 결실기가 올 수 있는 것도 공자, 석가, 예수가 씨를 뿌린 봄과 성장한 여름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후천(後天)시대를 열 수 있는 것도 선천(先天)시대가 있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인터뷰 중 점심 시간이 넘었다. 맛난 식사를 대접해 드리고 싶었지만, 그가 앞서 들어간 집은 한 건물에 있는 순대국집이다. 순대국을 앞에 놓고도 그의 열변은 계속된다. 순대국을 비우고, 커피숍으로 자리를 옮겼다. 커피값은 기어코 류 선생이 손수 계산한다. 커피숍에 앉아서도 노학자의 허심탄회함은 여전하다. 그는 청년이다.

 

옛것에서 배우고 창조적으로 미래를 열어가는 공부심이 끝이 없는 그는 며칠 전에도 새벽 4시부터 10시까지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우두커니 앉아 명상을 했다. 그 때 불현듯 성서 요한복음에 나오는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의 본의가 가슴을 달구었다.

 

“성서에 마귀를 사랑하라는 말은 없다. 그러나 원수를 사랑하라고 했다. 마귀는 인간을 말한 것이 아니라 귀신을 말한 것이다. 인간은 설사 원수라 하더라도 누구나 할 것 없이 하늘의 마음, 즉 나와 똑같은 본성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누구나 100% 천부 인권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어느 누구도 저주 받을 사람은 없다.”

 

그래서 “누구나 사랑할 수 밖에 없다”며 금새 눈물이 글썽이는 노학자의 순수함이 봄하늘을 연다.

 

글·사진 조현 종교전문기자 cho@hani.co.kr

 

 

 

 ◈ 류승국의 사상

유교에 불교·서양사상 더불어 ‘하나됨의 철학’

성철 스님과 함께 참선하고 유영모 오랜 교유

 

류 선생은 주역만이 아니라 정역을 깊게 공부했다. 주역과 정역은 예지력을 담은 공부이기도 하다. 그는 “서울에서도 아이티 이상의 대지진이 발생할 수 있으므로 건물을 높이 짓는게 능사가 아니다”면서 “북한 청진에서 일어났다는 6.7 정도의 지진만 서울에서 일어나도 큰 문제가 생길 것”이라고 했다. 

 

류 선생은 “보름달이 초승달이 될 정도의 대변혁이 일어날 때가 수십 년도 남지않았다”면서 “세종시는 수도권에서  그런 정도의 재앙에 대비하기 위한 차원에서도 필요하다”고 말했다.

 

그가 마치 조선 유학의 유산상속자라도 되는냥 질문했지만 그렇다고 그는 유학자만은 아니다. 그는 1954년 부산 동화사에서 선지식인 동산 스님에게 화두를 받아 성철 스님 등과 함께 3개월간 하안거를 나며 참선을 하기도 하고 동국대에서 불교철학을 공부했고, 기독교를 기반으로 동서사상을 회통한 당대의 영성가인 다석 유영모 선생과 오래도록 교유하면서 서양철학과 종교의 요체를 간파했다. 그가 주역을 배운 학산 이정호 선생을 가장 그리워할만큼 유가철학과 동방사상을 근간으로 삼고 있지만, 그는 모든 학문과 사상과 종교의 세계에 열려있다. 그래서 그가 평생 밝혀온 본성이 천(天)이든, 불성이든, 하느님이든, 하나님이든, 그 어떤 이름으로 불리더라도 그에겐 상관이 없다. 그는 다툼의 원인과 하나됨의 철학을 간파했다.

 

“누구에게나 ‘입장’이 있다. 누구는 자유주의자, 누구는 공산주의자, 누구는 기독교인, 누구는 불자, 누구는 남자, 누구는 여자, 모두 자기의 입장이 있다. 누구는 종교인의 입장, 누구는 과학자의 입장에 서있다. 그런 입장에 따라 관점이 다르다. 관점에 따라 논리도 다르다. 조선말 조선에선 기독교인을 허용하지않고 죽이니 박해했다고 하고, 반대쪽에선 그들이 서양군함을 앞세우고 왔으니 삿된 것을 척결하는 것이 정당하다고 했다. 애초 입장이 달라서 그런 것이다. 철학하는 사람은 입장을 검토해야 한다. 사건은 같아도 보는 입장과 관점에 따라 논리가 달라진다. 철학은 그런 입장을 이해하고 반성하는 것이다. 입장을 이해하고 받아들이면 하나가 된다.”

 

그는  “당신과 나, 남과 북만 하나가 아니다”며 “온 세상 사람들이 다 한겨레”라고 했다. 

 

“인간은 누구나 살고 싶어하고, 죽음을 싫어한다. 그러나 사는 것보다 좋은 게 있고, 죽는 것보다 싫은 게 있다. 그래서 살 수 있는데도 죽음을 택하는 이들이 있다. 내가 사는 것보다 위대한 게 사랑이다. 나라와 인류를 사랑하기에 그를 위해서 기쁘게 죽을 수도 있다. 반대로 불의를 행할 바에야 죽는게 낫다며 죽음의 길로 들어서는 사람도 있다.”

 

류 선생은 기득권놀음의 관료주의는 버려야하지만 이런 선비정신은 본받아야한다고 했다. 어떤 종교에 귀의했던 민족 동포를 위해 제 한몸을 초개처럼 던졌던 애국 지사들은 이런 선비정신에 따랐다는 것이다. 류 선생은 선비들이 행하는 예(禮)는 감정의 표현이나 아부가 아니라 천심(天心)을 표현하는 ‘본성(本性)의 작용’이라고 했다. 

 

조현 종교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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