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과 생활이 하나 머리 아닌 실천으로”
월급의 절반은 제자들 학비로졸업생에게 몇 시간 먹 갈아 글 선물
미국에서 보수-진보 신학 모두 공부동양철학도 꿰뚫어 신학과 회통
구원을 내세와 현세를 포괄해 보고 거듭남과 사회적 책임 동시에 역설
한신대 설립해 성서비평학 가르치고유신독재 맞서 민주화운동 앞장서
보수교단 이단으로 내몰고정권은 학교 규정 바꿔 내쫓아
함석헌과 둘도 없는 민주화 동지공통점이 70%라면 다른 점이 30%
김경재 목사가 말하는 ‘스승 김재준’
서울 강북구 수유동 한 아파트로 김경재(76) 목사를 찾았다. 10층 창밖으로 인수봉과 백운대, 도봉산의 고산준봉이 그의 스승처럼 우뚝 솟아 있다. 안방엔 스승 장공 김재준(1901~87)이 학부 졸업 때 친히 붓으로 써준 산상수훈과 논어 한 구절이 걸려 있다. 김 목사는 “나도 많은 제자를 두었지만, 학부 졸업생을 위해 몇 시간씩 먹을 갈아 글을 써준다는 건 생각하기 어렵다”며 “스승은 이상도 높았지만, 학생들의 사정이 어떤지 무슨 꿈을 꾸고 있는지까지 세심히 살피던 분이었다”고 회고했다. 그는 “장공은 3남3녀를 둔 가장으로 변변한 집도 없이 살면서도 1930년대 간도 용정 은진중학교 교목 때부터 월급의 절반은 제자들의 학비로 보탰다”며 “영양실조에 걸린 듯이 보인 내게 몇 번이나 곰탕을 사주시던 그 따사로움을 어찌 잊을 수 있겠느냐”고 말했다.
한국 기독교 위기의 본질
장공은 1970년대 박정희 유신독재에 맞선 재야 지도자 장준하, 문익환, 문동환, 박형규, 안병무, 김관석, 한완상, 이우정, 이해학 등의 스승이자 멘토였다. 특히 장공은 독재의 탄압으로 국내의 민주화운동이 어렵던 1974~83년 10년간 캐나다에 머물며 북미주 민주화운동 지도자로서 한국 상황을 해외에 알리며 국내 민주화를 견인했다.
김경재 목사가 다음달 장공 30주기를 앞두고 <장공의 생활신앙 깊이읽기>(삼인 펴냄)를 냈다. 사서삼경과 한시를 줄줄 욀 만큼 동양철학과 서양신학을 동시에 회통했던 장공의 사유에서 나온 주옥같은 문장들을 발췌해 자신의 해석을 곁들였다. 김 목사가 본 장공의 본모습은 ‘주옥같은 문장’에 있지 않다. 그가 ‘생활신앙’이라고 제목에 못박았듯이 신앙과 삶이 분리되지 않은 ‘실천’에 있었다.
김 목사는 오늘날 한국 기독교 위기의 본질을 ‘신앙과 생활의 분리’로 본다. 그는 분리의 원인을 기독교 신앙을 오해한 데서 기인한 것으로 분석한다. 그는 ‘기독교 신앙이 정통신학체계나 교리를 믿거나 성경을 암기하는 데 있는 게 아니다’라고 한다. 세상의 부정의엔 눈을 감고 세상에서 탈출하고 죽는 날 천당 간다는 식의, 죽음 이후에 국한되는 신앙은 더욱더 아니라는 것이다.
“오늘 한국 기독교는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전문신학자, 설교자, 기관사업 운영자, 신학교는 많다. 그러나 ‘예수를 따르고, 닮고, 살아내는 신앙인’은 드물다. 그것이 기독교 위기의 본질이다.” 김 목사는 장공의 말을 빌려 “‘믿음’이 머리와 가슴에서 그치지 않고, 예수를 따르는 ‘예수 따르미’가 되고, 마침내 예수가 내 몸을 통해 살아가는 ‘예수살기’로 나아가는 것이 바로 그리스도인의 삶”이라고 말한다.
깨알 같은 일기엔 인간적 고뇌도장공은 1930년 보수신학의 본부였던 프린스턴신학교와 진보신학이 지배한 웨스턴신학교 양쪽 모두에서 공부하고 돌아온 신학의 선구자였다. 그가 한국신학대에서 성서를 폭넓게 해석하는 성서비평학을 가르치자 ‘보수 교단’에선 그를 이단으로 몰았다. 이어 한신대를 설립해 제자들을 길러낼 꿈에 부푼 그를 5·16 군사쿠데타 세력은 ‘60살 이상 학장직 금지’ 규정을 만들어 내쫓았다. 학문의 전당에서 후학 양성에 전념했을 학자는 교회와 정권에 의해 그렇게 광야로 쫓겨났다.
김 목사는 한국 개신교는 개인 영혼 구원을 강조하는 보수 교단과 공동체 사회 구원을 강조하는 진보 교단으로 분열해 터부시했지만 “장공은 구원을 내세와 현세를 포괄하는 것으로 보았다”며 “거듭남과 구원 체험을 중시하면서도 사회적 책임 윤리를 감당해야 함을 역설했다”고 말했다.
민중신학의 태두 안병무 박사와 함께 장공전집 18권을 펴냈던 김 목사는 장공이 평생 써온 깨알 같은 일기도 다 읽었다. 일제 강점기 함경도 회령 군청사무원으로 일하던 17살 때 무학인 시골 처녀와 결혼한 이후 일본과 미국 유학을 거친 지식인 장공에게 아내는 어느 날 밤 훌쩍훌쩍 울면서 “당신이 원하면 이혼해주겠다”고 했다고 한다. 당시 유학파 지식인의 대부분이 이혼해 신여성과 재혼한 것을 보고 남편을 배려해 한 말이었다. 장공도 일기에서 “아내와 말이 통하지 않아 괴롭다”는 속내도 보였다. 그러나 김 목사는 우러러보기만 했던 스승의 고뇌를 보고 인간적으로 더 친숙함이 느껴졌다고 했다. 그는 말년에 장공이 그 부인과 신앙으로 통하며 금실 좋은 부부로 해로하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바다 사나이와 산 사나이김 목사는 장공 말고도 또 한 분의 스승이 있다. 함석헌(1901~89)이다. 김 목사는 씨알의소리 편집위원으로 참여해 송건호, 법정 스님, 김동길 등과 함께 활동했다. 김 목사가 1982년 서울 연희동에 은진교회를 개척했을 때 함석헌은 그곳에서 1년간 예언자 강의를 하기도 했다.
그의 두 스승은 민주화 과정에서 가장 가까운 동지이기도 했다. 김 목사는 “두 분의 공통점이 70%라면, 다른 점이 30%는 된다”고 했다. “장공은 조선시대 유배지였던 함경북도 출생이다. 백두대간 산속에서 나무가 서서히 자라는 것을 보고 자란 산사람이다. 반면 함석헌은 대동강 끝 수평선을 바라보며 자란 바다 사나이다. 그래서 역동적이고 시적이었다. 장공의 고향은 실학파 박제가 등이 유배를 간 곳이기에, 장공은 실학의 영향을 받았다. 정약용 등이 유배를 간 전라도와 비슷하다. 그래서 장공은 함북에서 대각선으로 내려간 전라도의 저항적 기질과 맥을 같이해 전라도에 제자들이 많고 기독교장로회 교회도 많이 세웠다. 함석헌도 전라도와 기질이 통하긴 했지만, 대동강처럼 개화 항구이자 바다였던 부산 피란 시절 중요한 시들을 썼고, 수제자 장기려도 부산에서 활동했다. 함석헌은 내면의 불꽃이 하나님의 영으로 점화시키는 내면을 중시해 어떤 조직도 남기지 않은 반면, 장공은 교회가 완전하지는 않지만 그래도 지상의 교회를 통해 하나님의 나라가 조금씩 전진한다고 생각했기에 대학과 교회들을 남겼다.”
다음달이면 한신대 본관에 장공기념관이 들어선다. 김 목사는 젊은이들이 서울 도봉구 쌍문동의 함석헌기념관과 함께 이곳을 둘러보며 머리가 아니라 몸으로 신앙을 살아낸 선구자들을 통해 길을 찾길 소원했다.
※김경재 목사= 한신대, 연세대 연합신대, 고려대 대학원 철학과, 미국 더뷰크대, 클레어몬트 대학원, 네덜란드 위트레흐트대를 거쳐 한신대 교수, 한신대 학장, 크리스찬아카데미원장, 씨알사상연구원장, 장공기념사업회장을 지냈고 현재 한신대 명예교수와 삭개오작은교회 원로목사로 있다. 저서로 <이름 없는 하느님>, <아레오바고법정에서 들려오는 저 소리>, <함석헌의 종교시 탐구>가 있다.
글·사진 조현 종교전문기자 cho@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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