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인과 악인이 태생적으로 정해진 것이고, 선인은 끝내 선하게, 악인은 끝내 악하게만 산다면 사람의 노력이나 교육이나 종교가 무슨 소용이 있을 것인가. 경남 양산 죽산기슭에 가면 인간이란 변하는 것이고, 선악도 태생적인 것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는 이들이 있다.
성모울타리에선 (주)이레우리밀이란 빵공장을 운영해 우리밀로 빵을 만들어 팔고 있다. 그런데 성모울타리에서 공동체 생활을 하며 빵공장에서 일하는 40여명의 대부분이 ‘별’을 단 ‘형님’들이다. 살인, 강도, 폭력으로 10년, 15년, 22년형을 살고 나온 전과자들도 있다. 공장엔 공동체원들 뿐 아니라 외부에서 온 기술자와 노동자들까지 60여명이 함께 일한다. 누가 별을 달았고, 누가 별을 달지 않았는지 구분이 없다. 정답게 애기를 주고받으며 일하는 모습이 어느 공장보다 오히려 훈훈하다. 이 공동체와 공장을 이끌고 있는 이가 성모울타리 하용수(59) 원장이다.
하원장이야말로 산전 수전 공중전으로 점철된 인생을 살아왔다. 10대 때부터 소매치기로 소년원을 제 집처럼 드나들었고, 젊은시절엔 부산·서부경남 지역 터미날을 무대로 주먹을 휘두르던 이른바 ‘깡패’였다. 한때 ‘터니널파 오야붕 싸움’이란 제목으로 지역신문 1면에 대서특필된 주인공이기도 하다. 그것만이 아니었다. 그는 도박과 마약 중독자였다.
그런데 역시 마약중독자였던 친형이 어느날 자살을 했다. 또 마약을 하던 주먹패거리들이 하나둘씩 간경화 등으로 죽어갔다. 이를 지켜본 그는 자신도 마약을 끊지않으면 그들과 다름 없는 죽음을 맞을 것임을 직감하고, 중독을 끊기로 결심했다. 그러나 탈출구가 보이지않았다. 그 때 아내와 함께 찾은 곳이 성당이었다. 처음엔 세례를 받기 전 이수하는 교리반도 나가는둥 마는둥이었다. 그러다 한 수도원 피정에 갔다가 그 전엔 한번도 믿기지않았던 세계를 체험했다. 그 때부터 ‘하느님’에게 ‘마약을 끊을 수 있는 힘을 달라’고 매달렸다. 피정을 나온 뒤 주먹만을 믿던 주먹전도사였던 그가 가톨릭전도사로 변했다. 지금으로부터 35년전인 그가 24살 때의 일이었다.
그는 그 뒤 터미널의 주먹들을 하나둘씩 성당으로 데려갔다. 주먹들은 경건하기 그지없는 성당 분위기에 ‘지금 뭐하자는 겁니까’라고 힐난했고, 성당 신자들은 ‘어깨들’의 등장에 위압감을 느꼈다. 더구나 하원장이 ‘주먹들’을 일회성으로 성당에 데려온다고 그들이 범죄나 도박, 마약을 단박에 끊을리 만무했다. 그들을 유혹으로부터 보호할 울타리가 필요했다. 그래서 그의 집으로 한 명 두 명 데려오기 시작한게 공동체가 되어버렸다. 초기엔 터미널에 정차한 버스에 올라 오징어 등을 파는 장사를 해 공동체의 생계를 꾸리다가 나중엔 두개 터미날에서 포장마차를 운영해 그 수익금으로 살았다. 그러나 터미널 현대화로 그마저 용이치않자 12년전 양산으로 와 시작한게 빵공장이었다.
그러나 빵공장이 초기에 망해 공동체원들은 산 속의 빈수도원에 들어가 5년간 살다가 산 아래 폐가를 구해 고쳐 30명이 옹기종기 살기도 했다. 그러다 2년 전에 공장을 지어 이곳에 정착했다. 여기저기 피난다니다시피 살던 때에 비하면 이곳은 천국이지만, 실상 20억원의 대출을 받아 지은 공장이어서 빵공장은 이자도 갚기가 어려운 빚좋은 개살구다. 성모울타리는 부산서부터미널 진주 승강장 앞에 ‘빵장수 야곱’이라는 빵가게를 열어 고군분투하고 있다. 그나마 성모울타리의 취지에 공감하는 이들이 일부러 그 가게를 찾거나, 공장으로 대량 주문을 해줘 60여명의 목숨줄을 지탱하고 있다.
하 원장이 왜 굳이 갈곳없는 출소자들로 공동체를 꾸려가는 것일까. 아마도 동변상련때문일 것이다. 하원장은 가정형편이 어려워 4살때 부모와 떨어져 부산에서 전남 구례로 보내졌다. 그곳에서 맹인인 외할머니와 사촌누나와 함께 살다 초등학교 3학년 때 부산으로 돌아왔지만, 이미 부모와 정이 떨어져 겉돌다가 건달이 되고 말았다. 하 원장이 부모와 함께 살 수 없게된 아들과 딸 둘을 입양한 것도 어린 시절 부모와 떨어진 상처를 누구보다 잘 알기 때문이다. 그 중 아들은 군대에 갔고, 하 원장은 이곳에서 아내, 장남, 딸과 함께 살고 있다.
사람들은 ‘어떻게 전과자들 틈에서 가족들도 함께 사느냐’고 하지만, 하 원장은 “어려서 정을 못 받아 그렇지, 속 정이 더 깊은 사람들”이라고 공동체원들을 감싼다. 정모석(45)씨는 교도소를 드나드느라 17살때 돌공장에서 잠시 일해본 것 외엔 돈벌이를 해본적도 없고, 가게에서 물건을 살 때도 감이 없어 힘들어했던 사람이었다. 그런 그도 6년 전 성모울타리에 들어와 먹고 자며 월 80만원을 받고 있다. 정씨는 “여기가 좋다”면서 “조금씩 사회생활도 배우고, 얼마전엔 잃어버린 가족도 찾았다”고 말했다.
이곳엔 출소자 출신이 아니면서 함께 사는 이도 있다. 안병년(72)씨다. 터미널에서 장사를 하다 하원장과 인연이 돼 20여년 전부터 함께 살게 된 안씨는 마치 엄마인양 공동체원들을 ‘아이들’이라고 불렀다. 안씨는 “성모울타리를 거쳐간 출소자들이 200여명인데 하나같이 어려서 엄마를 죽거나 개가해 돌봄을 제대로 못받았더라”며 “아마 어려서 보살핌을 받았더라면 십중팔구는 교도소 같은데 갈 일이 없는 심성 고운 아이들”이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안씨는 “하원장님은 다른 사람들이 망나니라고 거들떠보지않는 이들조차 포기하지조차 일일이 챙기고, 자기가 자리를 비운 사이에 일을 잘 저지르는 사람은 일 보러 다니면서도 차에 태우고 다니며 보살피는 분”이라고 말했다.
하원장이 공동체원들에게 하지말라는 규율은 딱 한가지다. ‘술 먹고 싸우지만 말라’는 것이다. 그런데 가끔 싸우는 일이 있어도 바로 쫓아내는 경우는 별로 없다. 하원장은 “같은 말을 해도 이들을 이해하는 입장에서 하는 것과 아해 없이 심판하듯이 하는 것엔 차이가 있다”고 말했다. 그는 “어려서부터 인생이 꼬여서 그렇지 원래 나쁜 사람이 어딨냐”고도 말했다. 그런 하원장 뒤에 성모 마리아가 서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