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월1일부터 공연하는 세계적인 바이올리니스트 정경화와 피아니스트 조성진 듀오 리사이틀 프로그램북엔 정경화와 한 의사와의 대담이 실린다. 바이올린을 켜는데 결정적인 약지의 손상으로 5년간 은퇴까지 했던 정경화의 손가락을 감쪽같이 고친 김상수 원장(72)이 그 주인공이다. 정경화는 이 대담에서 바이올리니스트의 생명이나 다름 없는 약지를 바로 맡길 수 없어, 먼저 발가락을 수술을 맡기고, 그 다음에 엄지손가락 수술을 맡겨보고 나서야 확신이 들어 약지 수술을 맡긴 사실을 공개한다. 그는 김원장을 미세수술의 장인으로 실력뿐 아니라 온화한 성품을 갖췄다며 그를 자신의 은인으로 펜들에게 소개한다.
24일 서울 강남구 선릉로 강남구청역 부근 마이크로의원으로 찾아 김원장을 만났다. 정경화의 소개 그대로 온화한 인상이다. 특히 이날 혼자서 4건의 수술을 했다는데도 전혀 피곤한 기색이 보이지 않은 것이 놀랍다. 더구나 그가 하는 수술은 시종일관 현미경을 들여다보고 미세신경 수술이어서 가장 난이도가 높아 의사의 진을 빼기로 유명한데도 말이다. 그 이유가 뭘까. 평소에 하는 운동이 있느냐고 물으니, 병원 지하에 차를 주차해놓고 3층까지 엘리베이터가 아닌 계단으로 걸어서 오르내리는고, 휴일날 집 주위 공원을 산책하는게 전부란다. 대신 그는 매일 좌선을 한다. 아침 6시까지 병원에 출근해 8시 회진을 돌기까지 진료실 옆 골방에서 좌선을 한다는 것이다. 그가 좌선을 시작한지는 30년이 넘었다.
오직 보이는 것과 만져지는 것 외엔 믿지않는 외과의사인 그를 수도의 세계로 안내한 이는 원불교 3대 종법사 대산 김대거(1914~98) 종사였다. 대산종사는 원불교 교조인 소태산 박중빈과 2대 종법사인 정산 송규에 이어 무려 33년간 원불교 최고지도자인 종법사로 재임해 지금도 원불교교도들이 가장 존경하는 스승중 한분으로 손꼽는 인물이다. 김 원장은 그 대산종사의 말년을 지킨 주치의였다. 김원장은 광주 전남대학 의과대 조교수를 하던 1984년 원불교가 전북 익산에 설립한 원광대학 의과대의 부교수로 옮긴지 얼마 되지않아 대산종사를 만났다. “첫인상은 노인의 피부가 너무 좋아서 깜짝 놀랐어요. ‘수양을 많이 하면 피부가 저렇게 좋아지는가’보다 생각했지요. 그런데 더 좋은건 편안한 분위기였어요. 말씀을 해도, 아무 말씀을 안하고 계셔도 그렇게 편하고 좋을 수가 없었어요.”
대산종사를 만난 감동이 채 사라지지않은 때였다. 김원장의 아내가 교무인 대산종사의 딸을 몇번 만나더니, 성격이 확 바뀌었다. 날카롭던 성격이 온데간데 없이 온화해진데 놀란 김원장은 원불교에 대해 알고싶은 마음에 <교전>을 달래서 읽으면서 병원내에 있던 교당을 나가게 됐다. 교당에서 좌선을 해보고는 전에 느끼지 못한 진정한 휴식을 맛보았다. 통상 수술이 잦은 외과의들은 수술 후 폭탄주 등의 폭음으로 스트레스를 푸는 것으로 알려져있다. 그러나 김원장은 스트레스 해소법은 술이 아니라 좌선이었다. 당시 아이들 교육을 위해 아내는 대전에 살아서 주말부부로 지냈는데, 그는 좌선을 더 집중적으로 하고싶어서 퇴직교무이 모여사는 원불교 원로원의 방을 하나 빌려 살며 좌선을 했다. 1년반 뒤 원로원의 방을 비워줘야하자 그는 다시 교무들의 집중 수도처인 중도훈련원의 방을 얻어 들어갔다. 낮엔 의사였지만, 나머지 시간은 사실상 수도자로 보내고싶을만큼 구도심이 치성했던 것이다. 대산종사의 주치의를 맡은 것도 그때부터였다. 대산종사는 원불교인들의 묘지인 영묘묘원에 숙소를 두고 있었다. 김원장은 중도훈련원에서 새벽 4시에 일어나 아침 기도와 좌선을 한 뒤면 어김없이 5백미터 가량 떨어진 영묘묘원으로 가서 연로한 스승의 건강을 체크한뒤 손을 잡고 함께 산책했다. 대산종사는 종단의 최고 어른이었고, 사회 지도층들이 늘 찾아왔지만, 그가 사용하는 의자 등 비품들이 다 남이 쓰다 버린 것들이었고, 외빈을 만나는 곳도 비닐하우스였다. 말까지 어눌했다.
“그런데도 말 한마디 한마디가 가슴을 울렸지요. 유머 감각도 있으면서, 거짓이나 위선이라는게 없었어요. 그 분 자체가 진리의 덩어리라고나 할까.” 김원장은 “겨울엔 가로등도 없이 캄캄한 묘지산을 넘어야하는데도 그 분을 뵙는다는 기쁨 때문에 무섭다는 생각도 없이 새벽과 밤늦게도 그렇게 다녔다”고 했다. 그의 눈에 스승에 대한 그리움이 가득 고였다.
원광대학병원장과 원광의료원 원장을 지낸 김원장은 2003년 원광대 총장에 후보로서 최고득표를 얻고도 학내 정치구도상 총장이 되지못하고 정든 병원과 학교를 떠나야했다. 그러나 그는 일이 뜻대로 되지않는 것도 ‘인연의 도리’라며 과거를 회고 했다. “1979년 목신경 수술의 세계 최고 권위자인 밀렛 교수가 있던 오스트리아 비엔나대 의과대 연수장학생으로 선발돼 1년간 공부하고 광주 5·18 직후 돌아왔어요. 연수 가기 전에 전남도청 인근인 전남대학병원 1층 제방 캐비넷에 가운을 걸어놓고 갔는데, 문을 열어보니 총알 두 알이 박혀있더군요.” 그가 연수를 가지않고 광주에 머물러있었다면 그 총알은 그의 가슴에 박혔을 수도 있는 일이었다. 그런데 돌아와보니 5.18때 총알이 목에 박힌 환자 5명이 전남대병원에 누워있었다. 그가 돌아오기 전까지 한번 목신경을 다치면 수술 할 수 없다는게 불문율이었지만, 그는 수술을 해낼 수 있었다.
김원장은 원광대병원을 떠나서도 네팔 포카라에서 한글과 태권도를 가르치는 원불교네팔교당 후원회장을 맡아 돕는 일을 지속해오고 있다. 마음 근력이 허약해진 요즘 청년들을 돕기 위해 원불교안암교당 김제원 교무가 펼치는 마음학사의 건립도 남모르게 뒷바라지하고 있다. 그는 1년 전 이 병원을 개원하기 전 네팔 포카라에 가서 의료봉사를 하며 여생을 보내기 위해 소장하고 있는 의서들까지 모두 처분해버리기도 했다. 그런데 원광대학병원에 와 그에게 미세신경시술을 배우던 중국 상해의 의사가 뇌졸증을 개선할 수 있는 수술법을 개발했다는 소식을 듣고, 생각이 달라졌다. 그는 지금까지 뇌졸증으로 한쪽이 마비되면 치료가 사실상 어려웠던 환자들의 목신경을 연결시켜 마비를 개선시키는 수술을 하고 있다.
동료의사들이 모두 현직을 떠난 나이에 다시 수술칼을 잡은 것은 제생의세(濟生醫世), 즉 ‘세상을 고쳐 생명들을 구하라’는 스승의 말을 끝내 져버릴 수 없어서였다. 더구나 뇌졸증 수술은 자신처럼 미세신경수술의 경험자가 아니면 하기 어렵고, 지금까지 삶의 희망을 갖지 못한 뇌졸증 환자들을 살리는 것이어서 더욱 그랫다. 정경화씨는 독실한 기독교인이지만 이런 그의 자세에 감동을 받았기에 병원발전기금까지 내면서 그의 후원자를 자처했다. 그는 “네팔을 언제나 갈 수 있을지 모르겠다”고 아쉬워하면서도, “고통 받는 환자들 곁이 내가 있어야 할 자리”라며 웃었다. 처처불상 사사불공(處處佛像 事事佛供), 즉 대하는 사람이 모두 부처이니, 하는 일마다 부처를 받들듯 한다는 원불교 스승들의 가르침이 그의 손끝에서 살아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