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남 순천시 봉화산 기슭에 머물고 있는 송기득(88) 교수를 찾았다. 봉화는 공동체의 위기에 타오른다. 그는 봉화다. 그러나 송 교수는 자신을 다 타버린 숯인양 “이제 죽을 준비를 하고 있는 사람에게 어인 발걸음이냐”고 했다. 대학을 정년 은퇴한 뒤 2001년부터 계간지 <신학비평>을 내고 이어 낸 <신학비평너머>마저 지난해말을 끝으로 내려놓았으니, 그 말이 허언만은 아니다.
그가 다른 글작업을 다 내려놓고도 끝내 놓지않는 단 하나의 글이 있다. ‘아내 정순애에게 보내는 편지’다. 그의 아내는 2016년 7월22일 96세를 일기로 ‘몸옷’을 벗었다. 대학생 때 여순사건으로 졸지에 남편을 잃고 전도사로 살며 아이 셋을 키우던, 11살 연상의 아내를 만나 그는 63년을 해로했다. 아내가 떠난 뒤 그는 매일처럼 870통의 편지를 써 10권째 책을 냈다. 별난 사랑이다. 아내는 63년을 살면서 늘 자애로운 미소를 지으며, 한번도 화를 낸 적이 없었다고 한다. 그래서 쌍둥이 큰딸들에게 물었다. ‘너희들 어릴 때도 엄마가 그랬느냐’고. 그 중 한 딸은 어린시절 너무 배가 고파 남의집 고구마를 훔쳤는데, 그 때 딱 한번 어머니에게 매를 맞았다고 했다. 그 때 고구마 주인이 집에 쫓아와 “전도사 딸도 남의 고구마를 훔치느냐”고 힐난하자 평생 말대답을 삼가던 어머니가 “전도사 딸은 사람이 아니다요?”라고 했단다. 인근 요양원에 사는 81세의 그 딸이 거동도 힘겨운 노구를 이끌고 점심 때가 되면 어김없이 찾아와 수양아버지의 식사를 챙겨준다.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며서 혼자 남을 남편 걱정에 마음을 놓지못하는 것을 지켜본 딸이 어머니를 대신하고있다. 자신과 나이차가 7살 밖에 나지않지만, 자신을 키워준 수양아버지에게 효심을 다하는 것이다.
누구도 대신할 수 없는 ‘인간 송기득’만의 삶은 ‘특별한 사랑’에만 한정되지않는다. 그는 해창만이 바라다보이는 전남 고흥의 빈농에서 5남매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일곱식구의 끼니마저 잇기 어려운 집안형편상 중학교 진학은 어렵다는 부모 몰래 연락선을 타고 여수로 가서 수산중학교에 합격하며 그의 신산한 삶이 시작됐다. 선산에서 소나무 몇그루를 베어 판 돈으로 입학금을 내고 한달에 쌀 한말, 된장 한단지, 간장 한병 이외 더 이상 지원은 요구하지않는다는 조건으로 겨우 진학은 했으나 불도 떼지않는 토굴 같은 방에서 한겨울을 지내며 굶기를 밥먹듯했다. 그나마 수산중학교 1학년때 전교 1등을 하자 고향 수협의 추천으로 수산청에서 수산대학 졸업때까지 장학금을 주겠다고 해 고생을 면할만하자 그는 순천 매산중학교로 전학을 단행했다. 고향 교회에 봉사하러왔던 여수 손양원 목사의 설교를 듣고는 ‘나도 목사가 되어야겠다’고 한 결심을 실행하기 위해 인근에 하나뿐이던 ‘미션스쿨’로 간 것이다. 고향에 가서 아버지에게 이 사실을 전하자 부친은 억수처럼 비가 쏟아지는 마당에 책을 모조리 집어던져버렸다. ‘이제부터 내일은 내가 알아서 하겠다’고 선언하고 가출한 그는 책을 떼다 팔러다니거나 보이열선교사 사택의 풀을 베며 학업을 이어갔다. 그러면서도 중학교 2학년 때부터 부패한 이승만을 몰아내자며 분필로 쓰고다니는 지하운동을 했고, 고2때는 부당하게 쫓겨나는 교감을 구명하는 일의 선봉에 섰다가 퇴학처분을 받고 졸업 직전에 구제받기도 했다.
그는 또 음으로 양으로 돌봐주던 보이열선교사가 형편상 등록금이 싼 지방국립대를 가라는데도 기어코 ‘미션스쿨’인 연세대에 합격했고, 연세대에 가려면 신학과를 가라는 요구도 거절하고 ‘무식한 목사가 안되려면 철학을 공부해야한다’며 철학과 진학을 결행했다. 합격 뒤 고향에서 전도여행을 하느라 등록시기를 놓치는바람에 천신만고 끝에 대학생이 되었다. 그는 철학과 수석을 놓치지않아 전학년에서 한명만 주는 전액장학생으로 형편이 좀 나아진 듯했으나 4학때 폐결핵으로 무려 3년반을 병상에서 사투를 벌였다. 당시 광주 동광원에서 요양하면서 수양회 강연을 온 류영모의 강연을 들은 그는 “기독교 외엔 무지했고 알 필요도 없다고 여겼던 ’좁은 우물’에서 나와 그리스도교만이 아닌 드넓은 보편 세계에 눈을 떴다”고 한다.
투병 뒤 그를 너무도 아낀 교수들의 천거로 학부졸업생임에도 연세대 문과대 전임조교가 돼 주요 철학자들의 삶과 사상의 핵심을 모은 ‘인간과 사상’을 강연해 적지않은 반향을 일으켰다. 그런데 5·16쿠테타가 터져 군미필자를 몰아냈다. 폐결핵환자였던 처지도 받아들여지지않았다. 국토건설단에 지원해 강원도 정선 탄광에서 1년간 중노동으로 군복무를 대신하고 돌아왔지만, 그를 아끼던 교수들이 물러난 학교에서는 복직을 시켜주지않았다. 그는 그 때 2개월동안 무일푼으로 거지 행각으로 전국을 돌며 민초 구원자들을 만났다.
그는 폐결핵을 치료해주던 여의사 여성숙선생이 시작한 목포의 한산촌에 내려가 불모지에서 폐병환자 수용소를 짓기 시작했다. 그곳에서 낮엔 돌집을 짓고 밤이면 폐결핵환자들과 청석회라는 독서모임을 했다. 여선생의 친구로 한산촌에 자주 내려와 글을 쓰고 했던 민중신학학자 안병무와 인연을 맺은 것도 그때였다. 폐병의 고통을 익히 겪은 바 있던 그는 한산촌이 갈 곳 없는 폐결핵 환자들의 안식처로 계속 남기를 희망하며 헌신했다. 그러나 한산촌에 디아코니아수도회를 설립하기를 원했던 안병무·여성숙 선생에 의해 하루 아침에 무일푼으로 쫓겨나는 신세가 됐다. 그로부터 53세에서야 목원대에 안착할 때까지 10여년을 보따리강사로 보내야했다. 고단한 지식노동자였던 그는 수백차례씩 올랐던 북한산 월출산에서 버틸 수 있는 힘을 얻었다고 한다. 그는 목원대에서도 늦깎이교수로 안주하지않고 민중신학과 여성신학 한국신학을 개설해 토착신학의 길을 개척해갔다.
그는 “‘예수 믿지않으면 지옥 간다’는 미신이 그저 성서와 찬송가를 끼고 교회만 가고, 찬송하고 기도하고, 십일조만 바치면 된다는 수준의 ‘한국 기독교’를 만들었다”고 한탄한다. 그는 둘째 가라면 서러워할 외곬수 보수기독교인에서 탈신학자로까지 치열하게 고군분투하며 변신했다. 그래서 이젠 소신 발언에 거침이 없다. 그는 “지금 ’정통’이라는 이름의 기독교가 말하는 그리스도는 ‘역사의 예수’와는 무관하다”고 말하는것을 주저하지않는다.
“당시 로마의 법은 신성모독 죄는 돌로 내려쳐죽이고, 십자가형은 정치범에만 하는 것이었다. 서구에서 역사적예수를 탐구한 예수세미나의 결과 예수는 농민이었을 가능성이 98%라고 한다. 예수가 성전을 뒤엎은 것도 유월절이다. 유월절은 이스라엘이 이집트에서 해방된 날이다. 예수는 로마 압제에 저항하다 정치범으로 죽임을 당한 것이다.”
그는 기독교의 핵심진리인 ‘대속자 그리스도’는 예수 이전 구시대의 유물이라고 한다. 즉 ‘자신이 저지른 죄를 예수가 대신 받아 자신의 죄를 사함 받으려는 불량한 심보는 양이나 소, 순결한 처녀같은 가엾은 희생제물을 바쳐 제사를 지내 자기는 빠져나가려고 한 유대교의 제사 전통에서 유래했다’는 것이다. 송 교수는 “예수는 ‘사람은 안식일(모든 것)의 주인’이라며 사람의 주인됨과 주체성을 천명했는데, 대속론은 자신의 책임을 다른 사람에 떠맡겨 주체적인 존재인 사람을 비주체화시켜, 죄를 져도 처벌받지않고, 아무 노력도 실천도 하지않고 공짜로 구원을 얻겠다는 노예근성의 발로”라고 지적했다. 그의 대미는 ‘인간’으로 귀결된다.
“예수의 하느님나라운동은 로마의 지배세력과 헤로데의 독재권력, 그리고 예루살렘성전체제의 집권자들이 일삼은 탄압과 착취로부터 이스라엘 민중이 해방되어 사람으로 살아 갈 수 있는 세계를 실현하기 위한 인간회복운동이었다. 실제 예수는 하느님의 나라를 이 역사 안에 실현하기 위한 삶을 살았다. ‘마음과 뜻과 정성과 목숨을 다해서’ 하느님나라를 외치고 하느님나라운동을 펼치다가 마침내 십자가형틀에서 참혹하게 처형되었다. 해방과 자유, 평등과 평화, 정의와 구원으로 사람이 사람답게 살 수 있게하는 인간화가 실현된 세계가 예수의 하느님나라다.”
송 교수와 아내는 가난하고 척박한 삶의 환경을 헤쳐나왔지만 가정에서, 또는 폐병 환자들 틈에서, 그리고 캠퍼스에서 인간다운 삶을 살아냈다. 먼저 늙고 병든 아내를 위해 매일 산책길에서 주워다가 바쳤던 솔방울들을 바라보는 노신학자의 눈이 촉촉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