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버드대 학부 출신으로 무려 30년을 가장 전통적인 방식으로 수행을 해온 승려이면서도 거의 알려지지않았던 이가 있었다. 1987년 한국에 깨달은 스님이 있다는 소문을 듣고 인천 용화선원 선원장 송담(93) 스님을 찾아온 그는 22살의 청년이었다. 한국인 재미교포에게서 태어났지만 한국말도 못하고, 귀에는 귀걸이를 한 채였다. 새벽3시부터 밤 10시까지 이어지는 힘든 노동을 이겨내지못해 십중팔구 중도탈락하는 용화선원 행자와 사미 과정을 버텨낸 환산 스님은 그토록 사모한 스승의 시자가 되어 무려 15년을 가장 가까이서 송담 스님을 직접 모셨다. 그런 그가 2년전 30년의 승려생활을 끝내고 환속해 자취를 감췄다. 그리고 최근 <참선>(나무의마음 펴냄) 2권을 출간했다. 환산 스님이란 법명 대신 테오도르 준박(54)이란 이름의 그를 만났다.
먼저 ‘왜 그토록 유망한 젊은이가 먼나라의 사찰에서 그 간난신고를 감내했느냐’고 물었다. 그는 “절박 했기 때문”이라고 했다. 세상적인 부와 권력의 불빛이 그를 만족시키지 못했고, 그는 정신적 방황을 완전히 끝낼 깨달음이 절박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송담 스님을 깨달은 스승으로 확신해 그에게 갔고, 만약 그가 목사였다면 목사가 됐고, 신부였다면 신부가 됐고, 화가였다면 나도 화가가 됐을 것”이라고 했다. 즉 불교에 귀의한 것이 아니라 송담 스님에게 귀의했다는 것이다. 그는 몸과 마음을 다해 송담 스님에게 복종하고 충성했다. 그리고 용화선원 안팎에선 그가 용화선원에서 스승 송담 스님에 이은 ’넘버2’라는 애기가 흘러나오기도 했다.
그런데 ‘왜 30년의 헌신을 헌신짝처럼 버렸느냐’는 물음에 그는 “한 종교 한 집단 안에서 어떤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출가한 것이 아니다. 더이상 특별한 위치나 신분으로 보호받고 싶지않았다”고 답했다. 그러나 용화선원에 대해선 더 이상 이야기하는 걸 원치않았다. 그의 책 <참선>은 놀랄만큼 세심한 관찰과 감정 표현, 솔직함으로 가득했다. 그런 그가 자신이 머문 사찰에 대해서만은 속내를 털어놓지 못하는 것 같은 느낌을 주었다. 그러나 되도록 숨고싶어하는 은둔형 스승과 어떻게 해서든 그 은둔자를 만나보려는 대중들 사이에서 철저히 스승을 방어하면서 대중들 뿐 아니라 송담 스님의 상좌(제자)들에게도 그가 스승의 외부 접촉을 막고, 총애를 독차지하고 있다는 눈총을 받고 미운털이 박히며 살아온 그의 삶에서 함구의 의미를 짐작해 볼 수 있다.
그는 스승이 내려준 ‘이 뭣고’(이것이 무엇인가)란 화두를 의심하는 선(禪)수행자였다. 그러나 그가 의심한것은 화두만이 아니었다. 그는 우리나라의 토속적인 승려들 못지않고 전통적인 스승과 사제의 연을 중시하며 살아왔지만, 영민한 엘리트 출신답게 종교시스템 뿐 아니라 자신에 대해서도 늘 회의하고 의심했다. ‘나는 구도자였을까, 송담스님의 추종자에 불과했을까’라고. 환속의 동기가 얼핏 엿보이는 책 대목이 있다.
‘성인이 된 후로 줄곧 엉뚱한 곳을 들여다보고 잘못된 기준과 관점에 연연해왔다는 것을. 더 나은 무언가가 되려고 노력하다가 아무것도 아닌 게 되어버렸다. 땅속에서 금을 찾다가 결국 그 땅을 놓쳐버린 꼴이다.’
그럼에도 그는 여전히 스승 송담 스님에 대한 믿음과 참선의 중요성을 간과하지않았다. 책에서 스트레스와 상처투성이인 현대인에게 참선이 얼마나 절실한지에 대한 설명도 구구절절하다.
하버드대 친구로 그에게 참선을 배우고 추천사를 써준 김용 전세계은행 총재나 세바스찬 승 프린스턴대 교수와는 달라도 너무나 다른 처지다. 그런 세간의 출세는 커녕 이제 승려조차 아닌 무직자가 되어버렸으니 말이다.
‘타임머신을 타고 다시 22살 청년으로 돌아간다면 어떻게 할 것인지’를 물었다. 그는 “다시 송담 스님에게 갈 것”이라고 했다. 의외였다. 그 30년의 삶이 헛된 것이 아니라 그 과정은 자신의 삶에서 반드시 필요했다는 것이다. 그는 승복을 벗은 이후 발리와 인도에서 몸을 추스리는 요가를 하고, 병든 아버지를 돌보기도 하면서 일상 속에서 수행을 이어가고 있다. 그리고 늘 깊은 산사가 아닌 일상 속에서 수행을 강조했던 스승의 가르침을 사찰 밖 일상에서 실행하고 있는 셈이다. 참선만이 최고이고, 요가나 소리 수행과 치유법들은 사이비 뉴에이지쯤으로 폄하했던 권위조차 벗고, 그들의 아름다움에 대해 찬사하는 것에서 여전히 초심을 잃지않은 구도자의 모습이 발견된다.
승복을 벗은 그에게 ‘용기 있다’고 말하자, 그는 “그렇게 용기있지는 못하고 걱정은 됐다”고 고백했다. 미국에서도 승복이 주는 권위는 대단하다. 그는 30년간 쌓아온 권위와 기득권을 버려버린 것이다. 송담 스님의 권유로 불교텔레비전에서 5년간 참선을 가르치고, 고대 동국대 서울대 연대의 불교학생회에서 참선을 가르치며, 용화선원 신도들로부터 큰절을 받던 스님이 더는 아닌 것이다.
“명성이나 권력은 마약과 같고 세상에 마약을 거부하는 유전자 같은 것은 없어요. 어떤 사람이든 충분히 오래 즐기면 중독되고 말아요. 여성과 돈, 권력에 깊이 빠지면 중독될 수 밖에 없지요”
그의 말대로 참선의 궁극적인 목적은 파괴적인 습관, 즉 중독인 카르마로부터 벗어나 자유로워지는 것이다. 그것이 해탈이다. 출가를 주저하는 그에게 출가를 권하며 환산(還山·산으로 돌아오라)이란 법명을 붙여준 스승을 떠나 그는 추운 광야로 나섰다. 익숙한 것으로부터 결별이다. 참선보다 더 한 구도행을 시작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