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 오신날을 맞아 화려한 크리스마스 성탄 트리가 곳곳에서 반짝인다. 그러나 전남 보성군 복내면 일봉리 천봉산 골짜기에 있는 복내전인치유센터는 그런 화려함과는 너무도 거리가 멀다. 이 산골에서 26년째 ‘자연인’으로 살아가는 이박행(57)목사는 30년 전 세계 최고의 성장율을 주도한 개신교 보수 교단의 산실로 세계 최대인 서울 총신대학원의 원우회 회장이었다. 강남의 대형교회의 강단이 더 어울릴법한 기독교 유망주였던 셈이다. 그러나 그는 달릴만하면 쓰러졌고, 오뚝이처럼 일어서면 다시 쓰러졌다. 만약 그런 좌절이 없었다면 그도 더욱 큰 교회를 만들고, 화려한 네온사인에 어울리는 목사가 되어 있었을 지 모른다.
그는 중학교 2학년때 사구체신우염으로 사형선고를 받고 휴학한 이래 군, 대학, 신학대학원 등에서도 매번 간염, 간경화와 같은 중병으로 무려 5번의 좌절을 경험했다. 그는 죽음의 공포 속에서 10대때부터 옷보따리를 싸짊어지고 신유집회를 쫓아다니며 살려달라고 매달렸다. 그리고 광주에서 고3때 5·18의 학살현장을 직접 목도한 이후엔 대학에서 운동권이 되었다가 모태신앙으로 ‘귀순’하기도 했다. 그러나 신앙인으로서 현실참여의 끈을 결코 놓치는않았다. 신학대학원을 졸업한 이후엔 김진홍목사가 서울 신림동의 빈민촌 난곡에 설립한 공동체 두레학숙의 책임자로도 활동했으나 간경화가 도져 그마저 2년만에 하차했다.
이렇게 끊임 없는 병고가 그를 이 산골로 이끌었고, 1996년 복내전인치유센터의 탄생으로 이어졌다. 의사로서 전인치유의 선구자였던 김영준 박사가 발벗고 이목사의 사역을 도우면서 천봉산골짜기에서 현대의학과 대체의학, 자연치유, 생활의학, 영성치유를 총망라해 암환자들을 돕는 전인치유가 시작됐다.
“암환자들은 지푸라기도 잡고싶어하는데, 기도원파는 ‘주여’, ‘주여’만 부르며 하늘만 쳐다보고, 현대의학은 영성 치유의 측면은 과학적으로 검증되지않은 것이라며 거들떠보지도 않고, 대체의학을 하는 이들은 자기것만이 전부라고 다른 것들을 몽땅 거부하곤했다. 그러나 아픈 이들의 생명을 회복시키기위해 필요한 것이라면 다 도움을 받고싶은게 환자의 심정이다.”
이에따라 이 센터에서 4박5일씩 숙식을 함께하는 복내전인치유교실이 시작됐다. 20~30명이 풍욕과 건강체조,산책, 명상,자연식이요법,건강교육, 심신상관 심리치료 등을 병행하는 것이었다. 기독의료인들의 모임인 누가회 광주전남지회 간사를 맡은 이 목사를 따르는 의사들도 기존의 편견을 넘어 전인치유를 적극 돕고 나섰다. 이 프로그램은 107회까지 이어져 전인치유의 바람을 일으켰다. 이 목사는 전인 치유의 핵심을 ‘사랑’이라고 했다. 사랑이 암세포를 변화시킨다는 것이다. 치유교실에서 한 환우를 둘러싸고 모두가 손을 얹고 간절히 기도하는 중보기도도 사랑의 방사였다. 그는 병이 사랑을 키워주고, 제대로 된 가치관을 심어주는 것임을 강조했다.
“병은 삶의 패턴을 바꾸라는 강력한 요청이다. 욕망이 아닌 절제의 삶, 소비와 파괴의 삶에서 지속 가능한 삶, 무한성장의 삶에서 생명 순환의 삶으로 전환하라는 즉 우리가 창조질서로부터 벗어났으니 다시 창조질서에 순종하는 삶으로 회귀하라는 초대다”
그는 고통 받은 수많은 기독환우들의 아픔을 목도하고 돌보면서 “교회가 가장 앞서서 이기심을 배가시키고, 생명이 순환되도록 돕는 청기기가 되기보다는 폭군이 되어 자연을 착취하고, 오직 전투적으로 성장만을 꾀하고, 선교라는 이름으로 현지의 고유한 문화나 가치관을 짓밟아 암적인 존재가 되는 것을 성찰하고 회개하지 않을 수 없었다”고 한다. 그가 기독교환경교육센터 살림 이사로 활동하고, 3년 전 한국교회생명신학포럼을 태동시켜 한국교회에 생명문화 확산에 나선 것도 그 때문이었다. 그는 무슬림들인 예멘 난민들을 예멘으로 돌려보내야한다는 주장이 난무할때도 사마리안행동을 결성해 인도주의적 돌봄 서비스에 일조했다.
그는 국립암센터의 연구 자문에 응해 통합적인 요양병원이 전국 곳곳에 들어서는데 도움을 주었다. 이에따라 전인치유가 전국의 요양병원에서 의료보험 혜택을 받으며 누릴 수 있게 되어 오히려 의료보험 혜택이 없는 이곳이 소외되었다. 그러면서 2년전부터 이곳은 전인치유교실 대신 암환자들이 와서 자발적으로 치유하는 쉼터로 변모했다.
이 목사는 전인치유교실을 중단하면서 산골마을살리기에 눈길을 돌렸다. 산골사람들 10여명과 함께 2013년부터 복내마을영농조합법인을 만들어 김치생산에 나섰다. 복내전인치유센터에 온 환우들이 집에서도 이곳 김치 맛을 볼 수 없느냐고 한 부탁이 시발이 됐다. 영양학을 전공한 이 목사의 아내의 이름을 딴 최금옥김치는 올해 처음 흑자로 돌아서 마을 출자자들에게 배당도 해줄 수 있게 됐고, 지역 불우이웃들에게 김치 40상자를 기증하가기도 했다.
최근엔 광주전남누가회 소속 의사로서 이 센터 초기부터 함께 하고 예멘에서 10년간 무료병원을 하고 귀국한 박준범 원장이 서울 문정동 법조타운 인근에 새숨병원을 열어 복내전인치유의 정신을 이어가겠다고 나섰다. 그리고 도시와 산골의 연계 치유 프로그램을 운영하기로 했다. 복내전인치유의 정신이 또 다른 형태로 이어지게 된 셈이다.
이 목사는 마을기업 대표가 되었지만 “역시 아픈 사람들을 도울 때 나다워지는 것 같다”며 “인간은 가장 약할 때 본질에만 충실해질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된다”고 말했다.
“너무 많은 것을 가지고 있을 때는 선택이 어렵다. 기업을 운영하는 사람은 몸이 아파도 기업을 놓치못하고, 사회적인 명예를 가진 사람은 그것을 놓치면 안될 것 같아 집착한다. 가족 뒷바라지에 매어있는 사람들도 마찬가지다. 그것들을 지키려다 아픈 자신을 학대한다. 그러나 그것들이 생명보다 귀할 수는 없다. 병이 걸리면 선택이 명확해진다. 존재 자체를 사랑하는데 집중해야한다.”
그러면서 이 목사는 크리스마스를 맞아 고통 받는 암환자의 가족들을 비롯한 주위사람들에게도 당부의 말을 잊지않았다.
“예수님은 지금 가장 아프고 가장 약한 사람으로 와 계신다. 지금 우리 곁에 아픈 사람, 그가 우리가 섬기고 돌보고 온 마음을 다해 사랑해야할 예수님이다.”
5번의 병과 좌절
이박행 목사의 최초의 좌절은 10대 때 찾아왔다. 전남 함평 월야 면장이던 아버지와 월야종합종고 교사였던 어머니 사이에서 3남1녀의 장남으로 태어난 그는 정치에 뜻을 둔 부친을 따라 국민학교 2학년때 광주로 이사를 가 살다 중2때 사구체신우염으로 사형선고를 받았다.
아버지가 사업을 한다 정치를 한다고 조상으로부터 물려받은 땅을 처분하면서 고향사람들에게 면이 서지않는다고 어린 그에게 돈심부름을 시키는 바람에 그는 어린 나이에 거금을 신발 깔창에 깔고 강도를 맞을까 공포에 떨며 산을 넘곤하면서부터 뭔가 몸에 이상이 오기 시작했다고 한다. 휴학하고 혈뇨를 누던 그는 당시 신유의 집회로 유명했던 현신애권사의 집회에서 “제 병이 회복만된나면 아픈 사람들 위한 삶을 살겠다”며 간절히 기도했다. 그 간절함 때문인지 몸이 상당히 회복되어 한동안 이불보따리를 짊어지고 현권사의 집회가 열리곳마다 찾아다니며 기도했다.
1년 뒤엔 복학해 중학교를 마치고 고등학교에 다니며 전남도청 앞 광주제일성결교회에서 학생회 대표로 활동하며, 고3때 5·18 당시 전남도청에서 사람들이 총에 맞아 죽는 장면을 목격했다. 그 영향으로 전남대 독문과에 진학한뒤 운동권 동아리인 고전독서연구회에 가입해 활동했다. 2학년때 유물론과 모태신앙 사이에 고민하던 그는 결국 신앙을 선택했다. 동아리 선후배들을 캠퍼스에서 마주치는게 괴로웠던 그는 군을 지원해 전방에 근무중 일명 워커병으로 불리는 봉와직염에 걸려 국군통합병원에 후송됐다가 입대 1년3개월만에 의가사제대했다. 인생의 2번째 중도하차였다.
제대후 만성간염에 걸려 복학도 못했다. 3번째 좌절이었다. 그는 10대 때 쫓아다니던 현신애권사가 생각나 전주에 집회가 있다는 얘기를 듣고 갔다. 그런데 현권사도 몸이 아파서 집회가 취소됐다는 소식에 ‘누구나 다 아프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러면서 신유 은사를 포기할 수 없었다. 그래서 경기도 파주 오산리금식기도원을 찾았다.
그러나 그는 이미 대학에서 ‘이성’의 세례를 받았기에, 오직 살기위해 부초처럼 떠돌며 생명을 구걸하는 회환으로 눈물을 쏟았다. 그러다 그는 기도중의 구원의 확신이 있다면 영생에 합당한 삶을 살 수 있게 해달라는 것이 바른 기도임을 깨달으며 가치관의 전환을 경험했다고 한다. 그러면서 그 말기자궁암으로 냄새가 너무 지독해 아무도 접근하지않으려한 중년여성을 돌봐줌으로써 10대때의 기도를 최초로 실천하기 시작했다.
대학에 복학해보니 5,6공정권에 대한 울분이 가득한 학내공기와는 전혀 다르게 대학내 20여개 선교단체는 몰역사성으로 물위의 기름처럼 떠있었다. 그는 학내에 교회·선교단체협의회를 결설해 창립실행의장을 맡아 6·10항쟁 당시 비폭력저항세력으로 참여하고, 공명선거감시단 활동을 하면서 다시 시대의 아픔에 동참했다. 그러던중 5·18때 시민군 총살을 거부하며 항명했던 31시단장 정웅장군이 디제이의 요청으로 총선에 출마하자 청년특보를 맡아 적극 도와 보좌관 제의까지 받았다.
그러나 그는 선택의 갈림길에서 또 신을 택해 총신대학원에 입학했다. 그런데 1년만에 비형간염으로 휴학을 했다. 4번째 중단이었다. 당시 총신대는 교수불법임용사태로 심각한 상황을 타개해달라는 학우들의 청을 외면할 수 없어서 아픈 몸으로 대학원우회 회장을 맡아 이사장, 학장, 교수2명이 사퇴하는 학내 개혁을 견인했다.
신대원을 마치고 김진홍 목사가 서울 신림동 빈민촌 난곡에 만든 두레학숙에서 아내와 함께 9가구가 생활하는 실험공동체의 실무책임자로 활동했다. 두레학숙 2년만에 간경화가 도졌다. 5번째 좌절이었다. 그 때 김진홍 목사는 경기도 화성 남양만 두레 공동체에 내려와 요양을 하면서 전인치유센터를 열어라고 권유했다. 그러나 그는 전기조차 들어오지않던 오지 산골 천봉산을 택해 내려왔다. 1994년이었다. 이곳에서 대학때 친구들 4가장 17명이 의욕적으로 공동체를 시작했으나 1년만에 산산조각이 나고말았다. 5번의 병고보다 더욱 아픈 좌절이었다. 연이은 인생의 좌절이 결국 그의 요양소이자 암환우들의 요양소인 천봉산 골짜기로 그를 이끌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