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꽃교회 이진영 목사
장례 때 천국서 안식하는 모습과 음성 체험
무속까지 포용한 신학 논문 써 하늘로 부쳐
봄길에 핀 들꽃 같은 둑방 아래 조그만 교회 안으로 윤기 오빠와 함께 일곱 살배기 율미가 뛰어든다. 마을에서 열리는 용왕제를 보고 온 율미는 엄마에게 “용왕이 뭐냐?”고 묻는다.
“바다를 지켜주시는 신이야.”
“그럼 용왕은 좋은 거야, 나쁜 거야?”
“물을 잘 다스려서 잘 살게 해주는 좋은 분이지.”
엄마 이진영(34) 목사의 답변에 그제야 마을 사람들이 어우러지는 희한한 의식이 이해가 가는 듯 율미가 빙그레 웃는다. 충남 아산시 염치, 이곳이 이진영 목사의 남편이자 아이들의 아버지인 고 채희동(1964~2004) 목사가 사람들과 함께 예배도 보고 세상사는 얘기도 하고, 가끔은 스님이나 점쟁이나 훈장님도 모셔다가 얘기도 듣고 단옷날엔 마을 사람들과 돼지잡아 막걸리도 마시는 사랑방 같은 공동체를 꿈꾸던 들꽃교회다. 채 목사가 ‘교회’라는 간판 대신 까치네집이라든가 또는 심청이네 집, 망이네 집 같은 것으로 불리기 원했던 그런 곳이다.
채 목사는 권정생 선생, 최완택·이현주·고진하 목사 등의 글을 담은 <하나님·사람·자연이 숨쉬는 샘>이라는 계간지를 통해 잔잔한 영성의 향기를 피워냈다.
용왕이 뭐냐고 물으면 “물 다스려서 잘 살게 해주는 좋은 분”
이 목사는 감신대 재학시절에 한반도예수운동회라는 동아리에 들어갔다가 그 동아리 창립자로 전도사였던 채 목사의 ‘사람 좋은’ 성격에 반해 열두살이 되는 나이 차이를 뛰어넘어 결혼했다. 남편이 대학 교목 자리도 마다하고 고향이기도 한 이 시골로 내려올 때도 둘은 늘 한마음이었다. 그런데 채 목사의 후배에게 물려받은 이 교회는 정작 와보니 신자가 넷 뿐이었다. 게다가 얼마 되지 않아 처녀 신자마저 멀리 시집을 가버렸다.
어느 날부터는 한 번도 빠진 적이 없던 여집사도 나오지 않았다. 알고 보니 그 여집사는 극심한 고관절 통증에 시달리고 있었다. 그들에겐 당시 후배목사가 건네준 2천만원과 채 목사의 책을 팔아서 번 돈 1천만원 등 3천만원이 있었다. 열 평도 안 되는 땅에 컨테이너 박스만 놓은 시골교회로선 새로운 교회 건축을 위해 요긴하게 쓰일 교회의 전재산이었다. 그런데 어느 날 새벽기도에서 둘은 “너희들 자신이 하나님의 성전이다”라는 말씀을 접하고, 무너지는 집사의 그 ‘성전’을 수술하기 위해 그 돈을 내놓기로 했다. 그들은 그 날 밤 교회 주보에 그 내용을 썼다. 그리고 집사에게 심방을 가 손을 잡고 위로한 뒤 그 주보를 놓고 왔다. 그 집사는 “실은 너무 통증이 심해 오늘 밤 안으로 자살하려고 생각하다 ‘내 수술을 해준다’는 주보를 보았다”고 전화해 왔다.
그렇게 사람을 하나님의 성전으로 섬기는, 세상에서 가장 작은 교회를 함께 하던 중 채 목사는 기독교환경운동연대 사무총장으로 부름을 받아 상경하기 며칠 전 불의의 교통사고로 세상을 떴다. 그의 지인들은 이기적 세상의 논리를 넘어 나홀로 따사로운 봄길을 예비했던 그를 ‘봄길’이라고 부르며 감신대에서 그를 추모하는 봄길음악제와 봄길학술제를 열었다.
이 목사는 남편이 떠난 뒤 이 교회에서 남편의 뒤를 이어 목회를 하기 위해 감신대 신학대학원을 다녔다. 이 목사 옆에는 그가 쓴 석사학위논문집이 놓여 있다. 논문집 첫 페이지에는 ‘나의 남편, 나의 스승, 나의 예수 고 채희동 목사님께 이 논문을 바칩니다’란 글이 씌어 있다.
그의 논문 제목은 ‘선순화(1950~98) 목사의 생애와 신학사상’이다. 서울대 농대를 졸업하고 공무원을 하다 미국 유학을 가 임업을 공부하던중 예수를 영접해 신학을 한 선순화는 미국의 교수와 학생들로부터 ‘한국인의 정체성’에 대한 질문을 자주 받으면서도 답을 못해 고뇌하던 중 우리나라의 전통 무속에 대한 공부를 시작해 무신과 그리스도교를 깊게 비교 연구하고, 젊은 나이로 세상을 뜨면서 각막을 기증하고 떠난 생태주의 여성신학자였다.
목회자도 신자도 따로 없이 삶과 말씀 나눠
그가 무속과 관련된 논문을 쓰게 된 것도, 하늘 같은 남편의 유고 앞에서 다시 세상을 살 희망을 갖게 된 것도, 남편의 장례식장에서 한 ‘특별한 경험’ 때문이었다. 4년 전 남편의 갑작스런 변고로 공황상태에 빠진 그는 영화 <사랑과 영혼>을 떠올리며 제발 남편의 영혼이나마 만날 수 있기를 희망했다. 그런데 문상을 온 지인과 포옹하던 중 지인을 통해 남편이 나타났다. 그 대화 속에서 남편은 “상상도 할 수 없을 만큼 너무 좋은 곳에 와 있고, 이제 세상에서 더 할 일이 없기에 떠났다”며 자신과 남겨진 두 아이를 위로했다.
그가 하늘이 무너지는 듯한 남편의 변고를 딛고 두 아이를 안고서 이 교회를 이끌어갈 수 있는 힘은 그 ‘천국 체험’이었다. 그날 만약 남편의 영혼을 만나는 체험이 없었다면 그도 자신의 팔자를 한탄하며 두 아이와 함께 비판 속에서 빠져나오지 못했을지 모른다. 그러나 그는 그날 생생히 살아있는 남편의 음성을 통해 죽음에 대한 숙제를 풀고 밝아질 수 있었다.
남편이 떠난 뒤 들꽃교회 식구들도 늘었다. 시민단체 간사들이 찾아오는가 하면, 감리교 홈페이지를 보고 수많은 이들이 띄운 추모의 글을 본 이들이 ‘채 목사가 누구냐’고 찾아오는 이들도 있었다. 또 들꽃교회 식구가 된 한 교수는 예배 뒤 신자들을 대상으로 영어회화공부 교사를 자청하기도 했다.
10여명의 들꽃교회 식구들은 주일이면 모여서 삶을 나누고, 말씀을 나눈다. 다른 교회 예배와는 사뭇 다른 사랑방 분위기다. 한 달에 한 번씩은 외부강사를 모시기도 한다. 신경하 감리교감독, 이필완 당당뉴스 편집인, 김홍기 감신대총장, 이정배 교수, 임낙경·김영동·조화순 목사 등이 다녀갔다. 또 이곳에선 이 목사만이 설교를 하지 않는다. 누구나 다 한 번씩은 설교를 해야 한다. 목회자와 신자가 따로 없다. 예배를 본 뒤 예배당 한켠에 비치해둔 밥통에 김이 무럭무럭 나는 쌀밥을 해서 각자 가져온 반찬 하나씩을 내놓고 웃고 떠드는 오찬을 즐긴 뒤 이들은 다시 영어회화를 한다. 이들이 재잘대는 교회 밖에선 죽음 같은 겨울흙을 뚫고 나온 들꽃들이 따사로운 봄마중을 나가려 피어나고 있다.
아산/글·사진 조현 종교전문기자 cho@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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