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강남구 압구정 2길 60 엠지타워 3층 <불교평론>은 시인·소설가·불교계 인사들의 사랑방이다. 만해 한용운의 잡지를 복간해 15년간 펴내다 2015년 폐간한 시문학잡지 <유심>의 산실도 이곳이다. 두 잡지 모두 지난 5월 입적한 조오현 스님이 창간했다. 이곳에선 출판기념회 할 곳조차 마땅치않은 시인들이 <유심>의 폐간에도 아랑곳없이 여전히 출간북토크나 문학모임이 잇따라 열린다. 매달 한 번씩 대중들이 세상과 불교계의 이슈를 가지고 모이는 ‘열린논단’도 내년 3월 100회를 맞는다. 내년이면 창간 20돌을 맞는 <불교평론>을 홀로 지키는 홍사성(68) 주간은 마치 살롱 마담처럼 지금도 시문학인들을 응대하는 게 주업이다. 지난 23일 사무실을 방문했을 때도 그는 ‘이밥홍차’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이었다. ‘황색인’을 쓴 소설가이자 펜클럽회장을 지낸 이상문 선생의 사무실이 인근에 있는데, 이곳을 찾는 시문학인들에게 주로 그가 점심을 사고, 홍 주간이 차를 산다고 시문학인들이 붙여준 게 ‘이밥홍차’다.
영정사진 모시고 출퇴근 때마다 향 그런 분주함 속에서도 홍 주간에게선 허허로움이 느껴진다. 조오현 스님이 입적한 뒤 홍 주간은 다비식 때 쓴 영정사진을 가져와 100일만 모셔놓고 치우리라 다짐했다. 차마고도 순례까지 가서 허전함을 달래고도 왔다. 그러나 100일이 지나고 200일이 다 되어가지만 영정은 치우지 못하고 출퇴근 때마다 향을 사른다. ‘아아, 님은 갔지마는 나는 님을 보내지 아니하였습니다’란 만해의 ‘님의 침묵’이 바로 홍 주간의 마음인 듯하다. 홍 주간은 승려 출신이다. 그는 “여법하게 사는 스님들에게 도리가 아니다”며 이를 애써 감췄지만 이를 빼고서 그와 조오현 스님의 관계를 설명하기 어렵다. 그는 16살에 금강산 건봉사와 설악산 신흥사 주지였던 성준 스님을 은사로 출가해 10여년 동안 출가자로 살았다. 그 시절 홍 주간이 <풀과별>이란 잡지에 ‘내원암’이란 시를 쓴 것을 보고 이미 등단한 시인이었던 조오현 스님이 서울 나들이 길에 일부러 찾아 ‘시를 잘 써보라’고 격려해 준 적이 있었다. 시를 매개로 한 최초의 만남이었다. 그런데 몇 년 뒤인 1975년 조오현 스님이 홍 주간의 은사인 성준 스님에게 ’건당’을 했다. 동진출가 당시 은사가 대처승이었던 조오현 스님이 성준 스님을 은사로 삼아 조계종 승적을 받은 것이다. 이로써 조오현 스님이 홍 주간의 ‘사형’이 된 것이다. 성준 스님이 1978년 열반한 뒤 49재 때 열린 문도회의에서 홍 주간은 스승을 잇는 신흥사 주지로 조오현 스님이 추천됐다. 홍주간도 뒤늦은 나이로 들어온 조오현 스님은 문도 내에서 기반이 없었지만 최연장자인데다 시를 쓰는 분이 신흥사를 이끌면 멋진 일이 생길 것만같아 행복했다. 그런데 홍 주간은 정작 자신은 환속을 선언했다. 그는 “엄격했던 은사 스님의 기대에 부응하고 대중들의 눈높이만큼 중노릇을 해낼 자신이 없어서였다”고 했다.
필화 때도 책임지면서 간섭은 안해 환속한 홍 주간은 반도체회사에서 일하다 1982년 <불교신문> 기자로 ‘불교계’로 돌아왔다. 승복을 입고 조계종단의 학비 지원을 받는 ‘종비생’으로 동국대 불교학과를 졸업한 만큼 불교계에 입은 은혜를 4년만 갚자는 생각이었는데, 결국 <불교방송> 설립에 참여하는 등 불교계에 다시 뼈를 묻고 말았다. 그는 불교계에서 일을 하면서 전형적인 일 중독자였다고 한다. 부하들의 실수도 용납하지 않았다. 예전의 그 모습을 잘 아는 지인들이 요즘 그를 보면 “속한이 부처가 됐다”는 농담을 던진다고 한다. 그는 “다 큰스님의 큰 품 덕”이라고 고백한다. 그가 1997년 IMF 구제금융 사태 이후 사실상 <불교티브이> 고위직에서 잘려 설악산에 내려갔을 때였다. 조오현 스님은 ‘일면불 월면불’(日面佛 月面佛)’이라고 했다. 선어록에 나오는 이 말은 ‘오늘 죽어도 괜찮고, 내일까지 살면 더 좋고’라는 뜻이다. 조오현 스님은 “그대로 다녔으면 술 취해 도로를 건너다 차에 치여 죽을 수도 있었을 텐데 다행 아니냐”고 했다. 홍 주간이 훗날 낸 첫 시집 <내년에 사는 법>도 이 ‘선어’를 딴 것이다. 홍 주간은 1999년 불교평론지가 필요하다며 조오현 스님에게 손을 내밀었다. 몇 차례의 청에 조오현 스님은 “꼭 필요하다면 절을 팔아서라도 해야지”라며 지원했다. 조오현 스님은 경제적 지원을 하면서도 편집엔 일체 관여하지 않았다. <불교평론>의 비판적 글이 ‘필화’로 번졌을 때도 조오현 스님은 책임은 자신이 졌지만 일체 간섭하는 법이 없었다. <유심>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였다. 불교 얘기를 따로 쓸 필요가 없다고 했다. 그래서 종교와 상관없이 누구나가 <유심>에서 뛰놀게 했다. 스님들이 “불교 포교도 아닌 데다 무슨 돈을 그렇게 쓰느냐”고 군소리를 하면 “불교계가 세상에 입은 은혜를 어떻게 다 갚을 수 있겠느냐. 이렇게 갚는 것이다”고 했다. 홍 주간은 “큰스님의 그릇은 범인들이 헤아리기 어려웠다”며 일화를 전했다.
너희는 저들보다 뭐가 잘났노 “설악산에서 선방 결제나 해제 때면 유랑승들이 몰려들었다. 종단에선 승려 체면을 손상시킨다고 객비를 못 주게 했다. 그러나 큰스님은 이들을 후하게 대접했다. 이를 제지하는 문도에겐 ‘너희는 저들보다 뭐가 잘났노. 저 사람들은 객비 몇 푼 얻으면 그만이지만 너희들은 그 돈 아껴 어디다 쓰노?’라고 오히려 호통을 쳤다." 또 한번은 사무실 보조원을 채용했는데 엉뚱한 실수 투성이어서 홍 주간이 그만두게 하려 했을 때였다. 조오현 스님은 “너처럼 잘난 놈은 어디 가서든 먹고 사는데, 저 녀석을 여기서 쫓겨나면 어디로 가겠느냐”고 했다. 홍 주간이 “도저히 일을 시킬 수 없다”고 하자 “청소라도 시켜라”며 그 청년의 월급은 따로 챙겨주는 것이었다. ‘설악산 스님’이란 시에서 ‘속은 진작 다 죽고 껍데기만 겨우 살아 있는, 한 만년쯤 된 고목나무’로 조오현 스님을 표현한 홍 주간이 마침내 눈시울을 적셨다. “늘 외롭게 홀로 지내던 큰스님이 가끔 전화를 했다. 벗들과 술을 마시던 중이어서 ‘여기 지방이다’고 둘러대곤 했는데, 큰스님은 다 알면서도 늘 ‘그러냐’고 했다. 이제 누구에게 그런 거짓말을 할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