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워야 채울 수 있다. 버려야 얻을 수 있다. 유형물만이 아니다. 소리도 그렇다. 서울시 관악구 봉천로 406-1. 2호선 봉천역 인근 건물 5층 배일동판소리연구소에 오르는 계단에서 마치 폭포수 가까이 다가선 듯한 진동이 느껴진다. 뇌성벽력이 울리는가 싶더니 쨍쨍한 햇살이 비치고, 다시 물안개 속 같은 한의 흐느낌이 북소리에 휘감긴다.
그의 단순하면서도 정갈한 안목이 한눈에 들어오는 연구소에 들어서자 배일동(55) 명창에게 한 외국인 여성이 판소리를 배우고 있다. 오장육부의 힘까지 끌어당긴 듯 얼굴이 붉게 상기돼 있다. 오스트레일리아 시드니음대 박사과정 첼리스트인 메리는 판소리 레슨을 받으러 2주 일정으로 체류 중이다. 메리는 “매우 강렬한 감정이 담긴 배 명창의 소리를 배우러 왔다”고 했다.
정작 본국에선 외면받는 판소리를 이방인이 배우는 게 신기하다. 오스트레일리아에선 ‘소리의 내공’을 키우려 배 명창에게 소리를 배우는 이가 200여명이나 된다. 오스트레일리아의 세계적인 재즈 드러머인 사이먼 바커가 1990년 방한해 한국의 토종 음악 다큐를 제작하면서, 전통적인 방식으로 폭포수 아래서 수련한 소리꾼이 있다는 소식을 듣고 배 명창을 발굴했다. 이를 계기로 바커는 트럼펫 연주자 스콧 팅클러, 배 명창과 함께 그룹 ‘치리’(CHIRI)를 결성해 판소리와 재즈를 접목한 공연을 미국 뉴욕 링컨센터를 비롯한 독일, 프랑스, 이스라엘 등 10여개국에서 했다. 배 명창은 또 매해 가을 한달씩 오스트레일리아에 초청을 받아 ‘오스트레일리안 아트 오케스트라’(AAO) 음악캠프에서 소리를 가르친다.
배 명창은 이런 외국인들의 호응에 대해 “조상 덕”이라고 했다. 이는 빈말이 아니다. 그는 우리 소리의 비밀을 풀기 위해 무려 7년간 산속에서 도를 닦았다. 그가 <독공>(세종서적 펴냄)에 이어 최근 낸 <득음>(시대의창 펴냄)은 지난한 수도의 산물이다.
전남 순천 계족산 자락에서 태어난 그는 논밭 매며 부르는 소리와 상엿소리까지 우리 판소리와 육자배기에 그렇게 끌릴 수가 없었다고 한다. 가난하게 살아가는 짠한 엄마를 비롯한 시골 사람들의 심중을 그대로 드러내주는 소리여서였다. 6남매의 둘째로 태어난 그는 집안 형편상 학비가 면제되는 목포해양대로 진학했다. 졸업 후엔 유조선을 타고 세계 일주를 했다. 외국은 생소하던 1980년대였다. 한국이 어디에 붙어 있는지도 모르는 유럽인들을 만나고 돌아서며 그는 뱃머리에서 고국에 대한 짠한 마음을 소리로 내질렀다.
그리고 4년 만에 안정된 직업을 포기하고, 지독한 가난이 기다리는 소리꾼의 삶을 시작했다. 배를 타 번 돈을 모두 고향 집에 보낸 터라 빈털터리로 상경해 신촌 연세대 앞 가온누리란 전통찻집에서 일하며 중요무형문화재 판소리 보유자 성우향 선생에게 소리를 배우러 다녔다. 가온누리를 운영하던 평생의 ‘지음’(知音, 마음이 통하는 벗)인 역사학자 우실하 항공대 교수를 만난 것도 그때였다. 2년 뒤엔 전북 남원에서 강도근 선생에게 1년 반을 사사했다.
그러다 우연히 일제시대에 녹음된 5명창의 소리를 들었다. 그는 심 봉사가 인당수로 떠나는 심청을 보내는 장면의 소리를 듣고 기함했다. 5명창의 소리엔 현대의 명창들한테서 보이는 예술적 풍미와 화려함과는 다른, ‘짠함’이 찐득찐득 묻어났다. 그는 기교가 아닌 그 짠함과 같은 감정을 되살리고 싶었다. 그래서 전통적인 소리 수련법을 택해 순천 선암사 위 운수암에서 2년, 다시 지리산 달궁의 폭포 아래서 5년을 수련했다.
그는 평생을 해야 할 것을 봉사 문고리 잡기로 해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에 우리 소리의 원리를 더듬다 보니, 주역과 음양오행과 기하학과 수리학까지 공부하지 않을 수 없어 산 공부가 길어졌다고 한다. 특히 <훈민정음 해례본>을 통해 발성과 장단 호흡의 원리를 깨쳤다.
“<훈민정음 해례본>은 ‘나라말씀이 중국과 달라’로 시작한다. 한글이란 글이 창제되기 전 고유한 우리의 말이 있었다. 다른 나라 음악은 4분의4 박자, 4분의3 박자로 이뤄진 데 비해 우리 소리는 24절기를 딴 24박, 12달을 딴 12박, 춘하추동 4계절을 딴 4박으로 이뤄져 있다. 고대 동양 음악철학의 기본이 중국어가 아닌 우리 말씀에 있고, 그것이 춤과 판소리 등에 그대로 이어져 내려왔다. 우리 소리는 특히 가운뎃소리 중성인 모음에서 감정을 자유자재로 조절한다. 흔히 장소를 가리킬 때도 가까운 곳은 ‘저기’라고 하지만, 아주 멀고 깊은 곳을 가리킬 때는 ‘쩌~~~기’로 발음한다. 그런 자유자재함이 판소리 발성의 법칙이다.”
그는 “방탄소년단 등 케이팝이 세계를 석권하고 외국의 음악인들이 판소리의 파워풀한 음과 감정 표현에 놀라워하는 것도 고유한 우리 소리의 풍부함에 기인한다”고 했다. 즉 제이팝이 먼저 떴지만 결국 케이팝이 세계를 석권한 것도 맥도날드나 호텔을 ‘마쿠도나루도’ ‘호테루’로 발음할 수밖에 없는 일본어의 한계와 무한계의 소리를 내는 우리 소리의 차이에도 적지 않은 원인이 있다는 것이다. 우리 소리의 비밀을 드러낸 ‘소리철학’을 정리했지만, 국내엔 관심을 보이는 이도 거의 없어 500여쪽의 장광설을 출판하기도 어려웠다. 그런데 이번에도 바다 건너에서 먼저 우리 소리의 비법을 알려야 한다는 후원자가 나섰다. 에스엔에스에서 그의 글을 읽은 재일동포인 산텍㈜의 정희승 회장이 출판을 후원하고 나선 것이다.
배 명창은 호방한 성격뿐 아니라 폭포수 같은 소리로 ‘치유자’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그는 ‘판소리 자체가 치유의 소리’라고 한다. “몇년 전 장애우연구소에서 10여명의 장애우를 보내 1주일에 한번씩 판소리를 배운 적이 있다. 발음도 제대로 안 되는 중증장애인이었는데 3년간 소리를 내지르며 얼굴이 놀랄 만큼 펴지고 밝아져 모두가 놀랐다. 우울증 약을 먹던 50대 여성도 판소리를 하면서 ‘왜 이것들을 가슴에 담고만 살았는지 모르겠다’며 ‘이제 숨이 쉬어진다’고 했다. 통상 놀라면 간이, 화나면 심장이, 우울하면 신장이, 슬프면 폐가 상하는데, 판소리는 깊은 호흡으로 오장의 감정을 내뿜어 해소시켜주는 것을 알 수 있다.”
오는 10일 서울 청담동 소전서림에서 열리는 출판 기념 콘서트는 예약이 조기 마감됐다. 20일 오후 8시 서울 청담동성당에서 열리는 가톨릭커뮤니케이션협회 주최의 가톨릭독서콘서트에서 그가 강연 및 공연으로 폭포수 같은 득음의 경지를 선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