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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심정 순례기

다섯 살배기 꼬여 계율을 어기게 했으니!

등록 2009-06-02 23:38

히말라야 꼬마를 찾아

부끄럼 타는 꼬마 신사 수라지, 카메라로 ”이리와 봐”

힌두교인에게 계란이 가당? 엄마한테 혼나 ‘그렁그렁’

 

 

“파파지!, 파파지!”

 

오늘도 히말라야의 네판 꼬마 수라지가 꼭두새벽부터 종달새처럼 “아빠, 아빠”하고 지저귀는 소리에 잠에서 깼다. 수라지는 마날리 바슈쉿 온천 바로 옆 티베트음식점 집 둘째인 다섯 살배기 아들이었다. 그는 새벽부터 온천 주위를 다람쥐처럼 발발거리고 다니며 제 눈에 뭔가 신기한 것이 있으면 아빠에게 묻기 위해 “파파지! 파파지!”하고 불러댔다. 깊은 산의 약수처럼 시원하고 부드럽게 잠이 든 내 영혼을 파고들어 날 기분 좋게 깨우는 소리였다.

 

자기가 찍힌 사진 보고 “파파치, 마마”

 

천연 노천탕인 비쉬쉿 온천은 돈을 내지 않아도 누구나 와서 목욕할 수 있었다. 새벽과 오후에 하루 두 차례씩 때가 둥둥 떠다니는 물을 빼내고 새물을 받는데,  물이 비교적 깨끗할 때 목욕하려는 사람들로 새벽부터 온천은 붐빈다.

 

 

수라지의 아빠 닐라는 다람쥐처럼 쏘다니는 일곱 살배기 니란잔과 수라지를 온천가로 데려갔다. 그리고 발가벗겨 온천물을 머리부터 부으면 또 수라지는 “파파지, 파파지”하고 질겁한다. 그런 수라지의 배를 아빠가 장난스레 툭툭 건드리면 수라지는 하얀 이를 드러내고 배시시 웃었다.

 

게스트하우스 2층의 내 방 앞 베란다 의자에 앉으면 멀리 설산이 보이고, 무지개가 그려진 게스트하우스 밑으로 온천탕이 온전히 보였다. 키 작고 배가 볼록 나온 닐라가 니란잔과 수라지 두아들과 함께 목욕하는 장면이 아침을 열곤했다.

 

히말라야의 거센 바람에 부르튼 볼을 비누로 씻기고 나면 수라지의 볼은 뽀얗게 변하고, 큰 눈망울이 더욱 호수처럼 맑아졌다.

 

형 니란잔은 애초부터 부르지 않아도 앞에 와 말을 걸만큼 숫기가 넘쳤다. 그러나 수라지는 내가 불러도 부끄러워서 아빠나 엄마 뒤로 숨어버리곤 했다.

 

“여기 예쁜 수라지가 찍혀 있네.”

 

디지털 카메라로 수라지 형제를 찍어놓고 유인했다. 수라지는 잔뜩 호기심이 있는 눈으로 바라보긴 했지만 그래도 선뜻 오지 않았다. 나서기 좋아하는 형 니란잔이 카메라 뒷면에서 자기 형제의 모습을 발견하곤 뛸 듯이 기뻐하며 또 종달새처럼 “파파지, 마마”하면서 아빠, 엄마에게  “좀 와서 보라”고 외쳤다.

 

그제야 수라지도 달려와서 카메라를 들여다보았다. 그리고는 자기 모습이 신기한 듯 이리 보고 저리 보다가 마침내 슬금슬금 나를 쳐다보며 조그만 입술을 벌린 채 웃음을 지었다.

 

게스트하우스의 잔디밭은 햇볕도 잘 들었지만, 온천이 바로 옆이어선지 늦가을인데도 이 근처 어디보다 따뜻한 느낌이었다. 이 잔디밭에 앉아서 수라지와 놀다보면 등반을 마친 아침 해가 어느새 하산하고 있었다.

 

이제 마날리를 떠날 날이 하루 앞으로 다가왔다. 속이 출출하기도 하고, 수라지에게 마땅히 줄 것도 없어 계란 부침개를 만들었다. 처음엔 맛을 볼까말까 망설이던 수라지는 맛을 보더니 더 달라는 듯이 내 옆에 더 다가왔다. 난 수라지를 먹이는 기쁨으로 몇 장의 부침개를 더 만들어 수라지에게 주었다.

 

떠날 내게 미네랄워터 한 병 쑥스러운 듯 건네

 

해가 2층 베란다로 올라가 의자에 앉아 마날리에서 마지막 햇살을 즐기고 있었다. 간지럽게 애무하는 햇살에게 온 몸을 맡기며 눈을 감고 있는데, 누군가가 2층으로 올라오는 인기척이 느껴졌다. 수라지였다.

 

계단쪽으로 걸어가 보았더니 그는 계단을 거의 다 올라오고서도 선뜻 내 앞에 나서지 못한 채 머뭇거리고 있었다.

 

“수라지! 왜 이렇게 있니?”

“….”

 

유난히 쑥스러워하는 수라지의 행동이 평소와는 달라 보였다. 그러더니 수라지가 비닐봉지를 내 앞에 쑥 내밀고는 다람쥐처럼 도망가는 것이 아닌가. 비닐봉지를 열어보니, 미네랄워터가 담겨 있었다. 인도의 지하수는 오염이 심해 먹는 물은 늘 사먹어야 했다. 수라지가 뚜껑을 따지도 않은 새 물병을 갖다 놓았다.

 

내일이면 떠날 내게 뭔가를 주고 싶었던 게다. 그런데 잠시 후 티베트음식점에서 수라지가 우는 소리가 들려왔다. 엄마가 냉장고에 넣어둔 새 물을 어디다 두었느냐고 꾸중하자 수라지가 대꾸도 못한 채 울음을 터뜨렸다. 설상가상으로 수라지가 먹다 남긴 계란 부침개가 눈에 뜨이자 엄마는 펄펄 뛰었다. 수라지네는 철저한 힌두인으로 베지테리언(채식주의자)이었다. 계란을 먹어선 안 되는 채식주의자가 계란을 먹었으니 어쩌면 좋으냐는 것이었다. 난 그것도 모르고 어린 아이를 꼬여 계율을 어기게 한 꼴이 되고 말았다.

 

2층에서 내려다보자 수라지는 담 밑에 쭈그리고 앉아 눈물 콧물을 훔치고 있었다. 내가 다가가자 수라지는 눈물을 감추려는 듯 고개를 숙였다.

 

난 수라지를 꼭 안아 달래주며 “다음에  꼭 수라지를 다시 보러 오겠다”고 약속하며 손을 걸었다. 수라지는 인도와 네팔어만 했기에 영어는 몰랐지만 내 말을 잘 알아듣는 게 틀림없었다. 

 

그런데 수라지 아빠에게 물으니 11월말이면 마날리는 너무 추워져 여행자가 찾지 않기 때문에 식당 문을 닫고 남인도 함피로  떠난다고 했다.

 

함피는 인도 역사상 가장 큰 힌두 왕조중 하나인 비자야나가르가 13~15세기에 수도로 삼았던 곳으로 남인도의 대표적인 힌두교 성지였다. 함피는 마날리에서 버스와 기차를 갈아타고 꼬박 3일을 가야 하는 거리였다.

 

해가 바뀌어 1월이 되자 함피로 향했다. 15시간 동안 버스를 타고 온 천지가 바위뿐인 함피에 도착하니 꼭두새벽이었다. 이 고도에서 나는 그리운 히말라야의 꼬마 수라지를 찾을 수 있을까. 그렇게 안개 속에서 나는 함피에 내렸다.

 

조현 종교명상전문기자 cho@hani.co.kr, 동영상 장수경 기자

[이 기사의 자세한 내용은 <인도오지기행>(한겨레출판 펴냄)에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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