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시종가1080 / 20. 탱자를 귤로 바꾸다
(본문)
강북성지강남귤(江北成枳江南橘)
춘래도방일반화(春來都放一般花) 강북의 탱자요 강남의 귤이라
봄이 오면 모두 같은 꽃을 피우는구나 같은 물이라고 해도 좁고 가파른 골짜기를 흐를 때, 그리고 넓고 평평한 들판을 흐를 때 소리와 속도가 다를 수밖에 없다. 마찬가지로 같은 내용이라고 할지라도 듣는 이들에 맞추어 말을 달리하여 표현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금강경 해설을 선시 형식으로 붙인 남송(南宋)의 야보도천(冶父道川) 선사는 이런 차별성을 귤과 탱자에 비유했다. 하지만 탱자와 귤은 봄꽃이 필 때 그 모양에서 별로 차이가 없다는 것도 동시에 밝혔다. 왜냐하면 같은 운향과에 속하는 식물이기 때문이다.
귤화위지(橘化爲枳·귤이 바뀌어 탱자가 됨)는 춘추시대 말기 제(齊)나라의 유명한 재상인 안영(晏嬰)의 언행을 기록한 <안자춘추>(晏子春秋) ‘내잡하’(內雜下)편에 나온다. 남북의 기준은 회수(淮水)다. 황하와 양자강이라는 양대 큰 물의 틈새 지역에서 골골이 물줄기를 모아 중간급 강으로 몸짓을 키웠고 나름의 자부심을 가지고 도도하게 흐르는 강이다. 왜냐하면 회수를 중심으로 위 아래 기후와 토질이 다르고 풍속이 확연히 구별되는 까닭이다. 그래서 남선북마(南船北馬·남쪽은 배 북쪽은 말)라고 하여 주 운송 수단도 다르고, 또 남귤북지(南橘北枳·남쪽 귤 북쪽 탱자)라는 말도 생겼다. 안자(晏子)는 “귤나무가 회수의 남쪽에서 자라면 귤나무지만 회수의 북쪽에서 자라면 탱자나무로 변한다”(橘生淮南則爲橘 生于淮北則爲枳)고 하면서도 “귤과 탱자는 잎이 비슷하다”(葉徒相似)고 부연 설명했고, 야보는 “꽃이 비슷하다”(一般花)고 했던 것이다.
(해설)
언제부턴가 유배지를 찾을 때면 탱자나무가 있나 없나 하고 살피는 버릇이 생겼다. 불과 100년 전 왕조시대만 하더라도 탱자나무로 주변을 에워싼 곳에 죄인을 가두는 형벌 제도가 있었기 때문이다. 이른바 위리안치(圍籬安置·籬:탱자나무 리)다. 위리안치는 대개 탱자나무 울타리로 집의 사면을 둘렀으며 오직 보수주인(保授主人·감호하는 주인)만 출입이 가능했다. 가택연금이나 코로나19 시절에 문 밖 출입을 금한 것도 그 흔적의 연장이라 하겠다.
추사 김정희(1786~1856) 선생의 제주도 유배지도 그랬다. 섬 주변에는 사면으로 바다가 있어 이미 그대로 주군안치(州郡安置)였다. 이는 일정한 권역(州·郡·縣) 안에서 머물기만 한다면 자유로운 지역활동이 가능한, 한단계 아래의 형벌이다. 하지만 큰 섬인지라 그렇게 할 수가 없었는지 위리안치라고 명확하게 규정했다. 유배지 집 주변의 담장 안에는 탱자나무가 군데군데 심어져 있다. 물론 유배 당시의 탱자나무는 아닐 것이다. 집을 복원하면서 위리안치를 염두에 두긴 했지만 제대로 된 울타리 노릇이 아니라 오히려 뒤뜰의 정원수 같은 느낌을 준다.
유배지도 사람 사는 곳이니 인정이 함께하기 마련이다. 지역 유지 3명의 후원으로 그들의 집과 집을 옮겨가며 위리안치했다.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이 있다고 했다. 나갈 수 없다면 남들을 오게 하면 된다. 위리안치 형식은 유지하면서 내용은 무력화할 수 있는 좋은 방법이다. 경서도 가르치고 서예도 가르치고 문인화 그리는 법도 가르쳤다. 덕분에 지역의 아이부터 어른까지 나이와 신분 계층을 가리지 않고 많은 이들이 들락거렸다. 외지인도 심심찮게 찾아주었다. 사람 복이 많았는지 청나라를 오가며 필요한 서적을 구해주는 이도 있었고, 해마다 봄이면 햇차를 보내주는 스님도 있었다. 가끔 육지에서 건너온 이들을 만나기만 하면 동아시아 정세는 물론 시서화(詩書畵)와 다도(茶道)를 논하는 일로 시간 가는 줄 몰랐다.
그래도 위리안치는 위리안치다. 혼자 있는 시간이 훨씬 많기 때문이다. 그 시간을 제대로 보낼 수 있어야만 진정한 위리안치가 된다. 그 기간을 ‘마천십연 독진천호’(磨穿十硏 禿盡千毫)라 했다. 10개의 벼루바닥에 구멍을 냈고 몽당붓으로 만든 것이 1000개였다. 하지만 환갑 나이에는 먹을 갈고 붓을 놀리는 일도 알고 보면 중노동이다. 그래서 아무 것도 하지 않고 멍 때리는 자기반조(自己反照)의 명상 시간도 적지 않게 할애했다. 이런 그를 보고서 제자인 강위(姜瑋·1820~1884)는 “달팽이 집(蝸廬·초라한 집)에서 10년간 가부좌를 틀었다”고 표현했다.
모든 것은 마음먹기에 달렸다. 그래서 스스로 관점을 바꾸고자 노력했다. 탱자나무 담장만 넘으면 온통 귤밭이다. 그래서 탱자나무 집이 아니라 귤나무 집으로 여겼다. 당호를 귤밭 가운데 있는 집이라는 뜻으로 ‘귤중택’(橘中宅)으로 지었던 이유다. 주렁주렁 열린 황금색 귤은 뾰족뾰족한 가시들을 감싸고도 남는다. 탱자나무가 귤나무로 바뀌었으니 설사 갇혔다 하더라도 갇힌 것이 아니었다. 그 힘이 유배된 8년3개월간 당신의 삶을 성숙시킨 마음 바탕이 되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세한도’라는 국보급 그림이 나왔고, ‘추사체’ 완성이라는, 예술가로서 대업까지 이룰 수 있었다.
원철 스님/조계종 불교사회연구소장
**이 시리즈는 대우재단 대우 꿈동산과 함께합니다.
제주도 추사 유배지. 사진 제주 추사관 누리집 갈무리
춘래도방일반화(春來都放一般花) 강북의 탱자요 강남의 귤이라
봄이 오면 모두 같은 꽃을 피우는구나 같은 물이라고 해도 좁고 가파른 골짜기를 흐를 때, 그리고 넓고 평평한 들판을 흐를 때 소리와 속도가 다를 수밖에 없다. 마찬가지로 같은 내용이라고 할지라도 듣는 이들에 맞추어 말을 달리하여 표현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금강경 해설을 선시 형식으로 붙인 남송(南宋)의 야보도천(冶父道川) 선사는 이런 차별성을 귤과 탱자에 비유했다. 하지만 탱자와 귤은 봄꽃이 필 때 그 모양에서 별로 차이가 없다는 것도 동시에 밝혔다. 왜냐하면 같은 운향과에 속하는 식물이기 때문이다.
제주 감귤. 사진 원철 스님 제공
제주 추사관. 사진 원철 스님 제공
추사의 글과 그림. 사진 제주 추사관 누리집 갈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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