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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심정 벗님글방

어떤 고난이든 내 기쁨의 계기로 삼는다네

등록 2022-09-30 18:34수정 2022-10-01 21:42

[선시종가1080 마지막 편]
픽사베이
픽사베이
(본문)

구사남황오불회(九死南荒吾不悔)/ 자유기절관평생(玆遊奇絶冠平生)

황량한 남방에서 아홉 번을 죽어도 후회 않고/ 기이한 절경을 유람하니 내 인생의 최고라네

송나라 소동파(蘇東坡·1036~1101)는 쓰촨성 미산(眉山) 출신이다. 인근에는 보현보살 성지로 유명한 아미산이 있다. 산시성 오대산 문수성지, 안후이성 구화산 지장 성지, 저장성 낙가산 관음 성지와 함께 4대 성지로 불리는 지역이다. 예나 지금이나 동남서북에서 참배 행렬이 끊이지 않는다. 미산에서 멀지 않는 곳에 세계 제일의 석각 좌불상으로 알려진 낙산대불(樂山大佛)이 있다. 3개의 강물이 합류하는지라 홍수 방지를 기원하는 기도처로 당나라 때 조성한 것이다. 아미산과 더불어 세계 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최초의 목판 대장경인 개보대장경(開寶大藏經·蜀板)은 익주(益州·현재 成都)에서 완성되었다. 일찍이 이런 종교적인 분위기에 노출된 주변 문화가 소동파로 하여금 뒷날 많은 선승들과 교유할 수 있는 바탕이 되었고, 또 관료로서 정치적인 낭패를 당할 때마다 수행을 통해 어려움을 극복할 수 있었다.

하이난섬(해남도). <한겨레> 자료
하이난섬(해남도). <한겨레> 자료
(해설)

소동파는 1097년 63살이 되던 해에 담주(儋州)로 유배를 갔다. 다음 주는 지금 해남도(海南島), 즉 하이난섬이다. 지금은 유명 관광지이지만 당시 중국 본토에서 가장 멀리 떨어진 황량한 섬이었다. 구성원 대다수는 원주민이며 대륙 방향 섬 북쪽에만 한족들이 일부 거주했다. 여느 유배지 섬처럼 먹는 것의 질은 거칠고 양은 부족하며 병에 걸려도 약이 없고 밖에 나가도 벗이 없으며 겨울에는 땔감이 부족하다고 묘사되던 지역이었다. 당신으로서는 황주(黃州)와 혜주(惠州)에 이어 세번째로 열악한 유배지였다. 환갑·진갑을 넘긴 노인네인지라 자손들은 이번 이별이 곧 사별이 될 것이라고 하면서 모두 통곡하였다. 하지만 당사자인 당신은 오히려 담담하게 ‘유월이십일 바다를 건너다(六月二十日夜渡海)’라는 시까지 남겼다. 설사 죽는다고 해도 여한이 없으며 오히려 절경을 감상할 수 있는 좋은 기회라며 최고의 인생기라고 노래했다.

섬이라는 유배 지역에서 살다 보면 두 번 울게 된다고 한다. 들어갈 때는 신세를 한탄하면서 자신에 대한 연민으로 처량해서 울고, 나올 때는 이웃과 정이 들어 떠나기 싫어서 운다고 했다. 소동파 역시 그랬다. 자기 고향은 쓰촨성이 아니라 오히려 해남도라고 말할 정도였다. 유배가 풀려 지역 주민과 헤어지면서 “나는 본시 해남도 사람인데(我本海南民) 서촉주에 잠시 얹혀살았다네(奇生西蜀州)”라고 하면서 도리어 지역 주민을 달랠 정도였다. 이 정도면 외교적 수식어도 수준급이라 하겠다.

3년 유배를 마치고 66살 때 북으로 돌아오는 길에 상주(常州)에서 세상과 인연을 다하게 된다. 인근 금산사(金山寺)에는 예전에 이용면(李龍眠)이 그려준 초상화를 보관하고 있었다. 1101년 7월28일 66살 때 ‘금산사에 있는 초상화에 스스로 적다(自題金山畫像)’라는 자찬(自讚)을 남기고 2개월 후 세상 인연을 접었다. 결국 열반송이 된 것이다. 마지막 2행에서 3곳의 유배지가 당신의 문학과 사상과 수행을 더욱 숙성시킨 곳이었노라고 술회했다. “.....평생 쌓은 공덕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問汝平生功業) 황주와 혜주 담주에 있다고 말하겠네.(黃州惠州儋州)”

하이난섬에 있는 소동파 동상. <한겨레> 자료
하이난섬에 있는 소동파 동상. <한겨레> 자료
특히 황주(黃州)로 유배되었을 때는 경제적인 어려움으로 인하여 친구의 도움을 받아 버려진 땅을 개간하여 식솔들의 의식주를 해결하였다. 이 땅에 동파(東坡·동쪽 비탈진 땅)라는 이름을 붙였고 스스로 동파거사라 하였다. 44살 때부터 50살까지 살았다. 보통사람 같으면 유배 시절에 선비가 호구지책으로 어쩔 수 없이 짓게 된 농사에 대한 기억을 애써 기억하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당당했다. 그때 농장 이름을 자호(自號)로 사용하였으며 현재도 본명인 소식(蘇軾)보다는 소동파로 더 알려져 있다. 59살 때 유배지인 혜주(惠州) 생활도 잊지 않았다. 유배의 결과로 2700여수의 방대한 시작을 남겼고 또 수행자로서 선가의 <전등록〉에도 이름을 올렸다. 이 모든 것은 황주와 혜주 다음 주 유배지에서 쌓은 공덕이라고 초상화 한 쪽에 스스로 기록했다. 절 집의 표현을 빌린다면 번뇌를 보리(菩提)로 전환했던 것이다.

‘선시종가1080’이라는 큰제목 아래 24번 연재를 거의 2년 남짓 걸려 마치게 되었다. 마지막 선시는 박영환 교수의〈송시의 선학적 이해〉라는 저서의 도움을 받아 소동파 선생이 남긴 마지막 글로 마무리하게 되었다. 대우 꿈동산에 연재를 주선해 준 조현 기자와 독자 여러분께 감사를 드린다.

원철 스님(조계종 불교사회연구소장)

**이 시리즈는 대우재단 대우 꿈동산과 함께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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