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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심정 벗님글방

하회·양동에 숨어있는 유-불 교유 흔적

등록 2010-09-01 10:07

  2010년 8월1일  경주 안강의 양동마을과 안동 풍산의 하회마을이 우리나라에서 열번째로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는 뉴스가 브라질로부터 날아왔다. 이제는 문화적 저력이 국제사회의 으뜸가는 경쟁력이요, 또 국격인 시대인지라 그 소식은 한여름의 삼복 무더위를 식혀주고도 남음이 있었다.

 

 서원 안에 있는 불교적 수행도량

 

 알고보면 그 두 마을도 소중한 의미를 지닌 참으로 귀한 마을이지만 더 시선을 집중해야 할 곳은 그곳에서 약간 떨어진 한적한 곳에 숨어있는 옥산서원과 병산서원이다. 이곳은 그 두 마을을 오늘까지 정체성을 지킬 수 있도록 만들어준 사상적 근간이요 또 뿌리인 까닭이다. 회재(晦齋) 이언적(李彦迪 1491~1553)과 서애(西厓) 유성룡(柳成龍 1542~1607)이라는 걸출한 인물의 문화적인 안목과 됨됨이는 500년의 세월 이후에도 바래기는커녕 더욱 빛을 발하고 있다.

 두 서원의 권역 안에서 또 고갱이를 찾는다면 당연히 전자는 독락당(獨樂堂)이요 후자는 옥연정사(玉淵精舍)일 것이다. 모두 낙향하여 머물던 서재이다. 동시에 수신처인 별당이기도 했다. 거기에 걸맞게 독락당 안에는 양진암(養眞庵)이, 옥연정사에는 완적재(玩寂齋)라고 하는, 한눈에도 불교적 언어임을 알 수 있는 현판이 한 켠을 차지하고 있다. 수행도량 기능까지 겸했다고 볼 수 있겠다. 당연히 예사롭지 않는 유교와 불교의 교섭사가 숨어있음을 넌지시 알려준다.  

  

 정혜사와 독락당 오가며 학문과 사상 나눠

 

 회재는 옥산서원 맞은 편에 있는 정혜사(淨惠寺)에서 어린 시절 글을 읽었다고 한다. 낙향한 이후 은둔 시절에는 그 절에 머물고 있던 덕망과 수행력을 겸비한, 그러면서도 이름이 전하지 않는 어떤 스님과 친교가 각별했다. 서로 정혜사와 독락당을 오가며 자주 찾았다고 한다. 양진암은 그 정혜사 스님이 아무 때나 스스름 없이 찾아와서 머물 수 있도록 배려하기 위하여 마련한 공간이었다. 동시에 흉금을 터놓고 학문과 사상을 나누고 자연과 인생을 논했던 곳이기도 했다. 

 그 영향 때문인지 모르겠지만 옥산서원 전면부인 얼굴에 해당되는 누각인  ‘납청루(納淸樓)는 후학인 노수신(盧守? 1515~1590)에 의해 ’무변루(無邊樓)‘로 이름이 바뀌게 된다. 그는 서산휴정(西山休靜 1520~1604) 선사와 교유했다고 전한다. 바꾼 이유를 선시처럼 부기(附記)로 남겼다.

 

 모자람도 남음도 없고(靡欠靡餘)

 끝도 시작도 없도다(罔終罔始)

 빛이여 맑음이여(光歟霽歟)

 큰 허공에 노닐도다(遊于太虛)

 

 하지만 회재가 죽고 난 뒤 단출하던 서당은 본인이 추구한 소박한 도학적 삶의 가치관은 아랑곳 하지 않고 확장을 거듭하면서 살림살이가 날로 커지면서 비대해졌다. 더불어 인근 정혜사는 날로 쇄락의 길을 걸었다. 현재 국보 40호인 13층석탑만이 덩그러니 남아 사찰의 영욕을 대변해주고 있었다.

 

 터 탐내자 스님이 직접 10년 걸쳐 지어줘

 

 서애 역시 불교적 인연이 적지 않았다. 19세 때 일 년 정도 절에 머물면서 《맹자》를 읽었다고 했다. 그리고 그의 토굴인 옥연정사는 하회마을 건너편 낙동강을 내려다 볼 수 있는 부용대에 위치한다. 배를 타고 건너가야 한다. ‘사슴같은 천성이라 정치계에 살 사람이 못된다’고 스스로를 평하였고, 임진란 이후 낙향하여 만년에 《징비록》을 저술한 곳이다.

 그가 가난한 선비였던 40대 후반시절에 이 터를 탐을 내자, 탄홍(誕弘) 스님이 도편수 겸 화주가 되어 십 년에 걸쳐 지어준 건물이다. 고마운 마음에 그런 과정을 〈옥연서당기(玉淵書堂記)〉에 기록으로 남겼고 말미에 “1586년 서애거사(西厓居士) 적다”라고 마무리하면서 스스로 거사 칭호까지 붙이고 있음을 보여준다.

 

 작은 집 몇 채 임에도 불구하고 완공에 십 년 정도 소요된 것으로 보아 탄홍 스님 역시 경제적으로 그다지 여유가 있었던 것 같지 않다. 그럼에도 열과 성을 다해 인품있는 선비를 후원한 셈이다. 서애 역시 그 성의에 보답하기 위해 경내에 ’완적재(玩寂齋)‘라는 현판도 함께 걸었다. 이것으로 미루어 보건데 탄홍 스님 역시 이 방에서 머물며 함께 임진란 이후시대를 논하면서 선비와 승려의 진정한 역할을 고민했을 것이다.

 

 또 북쪽집 세 칸은(又齋在北者三間)

 이 집을 지키는 승려를 위해(以舍守僧)

 선가의 말을 빌려와(取禪家說)

 완적재라고 이름하였다(名曰 玩寂齋)

 

 안강의 양진암과 하회의 완적재는 선적(禪的) 문화유산인 것이다. 더불어 무형문화재로서 스토리텔링까지 풍성하게 쌓아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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