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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심정 벗님글방

희망의 무릉도원 태화산 마곡사 백범명상길

등록 2011-06-01 14:43

무르익은 봄날에 찾아가는 마곡사의 환상적인 봄길은 갖가지 꽃과 여리디 여린 잎으로 꾸며놓은 무릉도원이었다. 예로부터 호서지방에서는 ‘춘마곡(春麻谷)’이라고 했다. 봄에는 마곡사의 경치가 인근에서 가장 으뜸인 까닭이다. 현재 우리처럼 그 시절에도 봄을 즐기기 위해 이 골짜기(谷)로 마(麻)처럼 삼삼오오 무리지어 다녀갔을 조상들의 소박했던 나들이를 상상으로 그려본다.

꽃구경은 겨울의 고단한 현실을 떠나 봄이라는 희망의 무릉도원을 찾아나서는 일이였다. 전란과 가난으로 어려웠던 시절 《정감록》은 나름대로 유토피아인 십승지(十勝地)를 열거하여 평민들을 위로했다. 공주 땅의 유구천과 마곡천 사이에 자리한 마곡사 지역도 포함되었다. 산과 물이 서로 휘돌아 에스(S)자로 감기는 길지인 연유이다. 지역 어르신들에 의하면 그 이름에 걸맞게 6.25가 지나간줄도 몰랐다고 한다.

백범 김구 선생은 평생 가장 큰 신세를 진 곳으로 마곡사를 꼽았다. 난세를 피해 몸을 의탁한 곳이기 때문이다. 이곳에서 얼마동안 승복을 입고 생활했다. 큰절은 물론 인근 백련암에도 선생의 체취가 그대로 남아있다. 출가 당시 삭발하는 심경을 백범일지에 몇줄의 기록으로 남겼고, 후학들은 그 자리를 기념하는 표식을 세웠다. 해방 후 당신이 이 절을 다시 찾았을 때, 큰법당 기둥에 세로로 쓴 ‘돌아와 세상을 보니 흡사 꿈 속의 일과 같구나(却來觀世間 猶如夢中事)’라는 글귀를 바라보며 한동안 감회에 젖었다고 했다. 경내에 두 그루의 나무를 심어 무릉도원 시절의 은혜에 보답했다.

무릉도원도 알고보면 천상의 신선세계가 아니라 난리를 피해 들어온 은둔과 보신(保身)의 땅일 뿐이다. 도연명은〈도화원기〉에서 그곳은 농사짓고 생활은 검소하면서 마음이 평화로운 마을이라고 그렸다. 별천지에서 누리는 사치라고 해봐야 봄이면 도화꽃이 흐드러지게 피는 경관을 즐길 수 있는 수준에 불과했다. 은둔이란 세상에서 가장 긴 만행(萬行)이다. 법정스님처럼 숨음으로써 오히려 더 스스로를 드러내는 역설적인 도리가 함께 하는 곳이기도 하다. 샹그릴라 땅도 감추면 감출수록 더 찾으려고 애쓰는지라 중국정부는 아예‘그저그런’ 땅인 운남성 중티엔(中甸 중전)지방에 그 이름을 붙여 모두의 호기심을 잠재웠다. 유럽의 산티아고 가는 길과 일본 오헨로 길처럼 마곡사의‘백범 명상길’은 십승지 순례길이다. 그곳에는 건축가 승효상 선생의 덜어냄과 비움을 추구하는 건축철학과 공(空0이라는 불교정신을 한몸에 버무린 나지막한 현대 건축물이 자리하고 있다. 걷다가 지치면 몸을 누이고 또 마음을 비우고 덜어낼 수 있는 곳이다. 여러 채의 건물이 각각 외따로 떨어진 그러면서 은근히 하나로 묶여진 공간이기도 하다. 은둔객이 되어 꽃지고 잎나는 자리에서 계곡물소리를 오래토록 들었다. 세상의 화려함과 번거러움 그리고 내 마음 속의 전란(戰亂)을 피해 제주도 올레길과 지리산 둘레길을 걷는 사람들처럼 나도 이 길을 천천히 걸었다. 언젠가 들었던 50대 가장의‘젊을 때는 가을이 좋더니 이제는 꽃피는 화사한 봄이 더 좋습니다’라는 말이 문득 생각났다. 백번 공감하며 혼자서 또 고개를 끄덕였다.

백범길을 한바퀴 돌고서 으스름할 무렵 절입구의 영산전(靈山殿)을 참배했다. 현판을 일부러 소리내어 읽었다. 그 음을 따라 영산홍의 화사함이 묻어났다. 처마를 맞대고 있는 태화선원의 당호는 매화당(梅花堂)이다. 집 그대로가 매화인 꽃대궐인 셈이다. 부처님오신날을 맞아 형형색색의 연꽃등을 불밝혀 놓았다. 덕분에 밤길까지 걸을 수 있는 호사를 누린 봄나들이였다.

원철/조계종 불학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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