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이 매양 흐르기만 한다면 언젠가 스스로 그 피로함을 이겨낼 수 없을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머물기만 한다면 고인 채로 썩어버리게 된다. 흐름과 멈춤의 적절한 조화로움을 통해 물의 삶은 더욱 아름다워진다. 그것처럼 인생사 역시 흐를 때는 흘러야 하고 멈출 때는 멈출 줄 알아야 한다. 혹여 그 중지가 스스로 선택한 것이라면 가장 바람직하겠지만 살다보면 어쩔 수 없는 주변의 여건 또는 타의에 의한 멈춤이 대부분일 것이다. 설사 원하지 않는 멈춤이라고 할지라도 이용하기 나름이다. 자의에 의한 멈춤만큼 그 내용을 채워갈 수만 있다면 그 결과는 별다른 차이가 없는 까닭이다. 불리한 조건도 이용하기 나름인 것이다.
고대 인도의 우기(雨期)가 그랬다. 같은 나무 그늘 밑에서 3일이상 머물 수 없다는 원칙을 지켜야 하는 당시의 수도자들은 늘 물처럼 흘러다녀야 하는 떠돌이 생활을 했다. 하지만 진한 먹구름과 함께 세찬 비가 내릴 때는 어쩔 수 없이 가던 걸음을 멈출 수 밖에 없었다. 하루이틀이 아니라 석달 남짓한 기간이었다. 그런 비는 해마다 반복되었다. 반복은 관례를 만들고 관례는 제도화되기 마련이다. 따라서 그 시간만큼 수행공동체가 만들어졌다. 이것이 여름안거(安居)라는 결제(結制)제도였다. 물론 석달을 3일처럼 생각했을 것이다. 멈춤 속에서도 흐르는 것처럼 살았다.
사람 뿐만 아니였다. 《삼국유사》에는 곰이 석달동안 동굴 속에서 쑥과 마늘을 먹으면서 안거한 끝에 웅녀가 되었다고 전한다. 곰이 백일결제를 통해 사람이 된 것이다. 하지만 그 자리를 함께 했던 호랑이는 결국 견디지 못하고 뛰쳐나간 탓에 그 이후에도 여전히 원래 모습대로 살아가야 했다. 결국 자기를 바꾸는데 실패한 까닭이다. 멈춤은 때론 도약의 계기가 된다. 타성에 빠진 채 현실에 안주하며 주어진 습관대로 살아가는 우리들을 향한 또다른 훈계이기도 하다.
절집에는 유명한 ‘백일법문’이 있다. 성철스님이 1967년 해인사 방장에 취임하면서 남긴 백일동안 말씀을 모아놓은 것이다. 불교의 핵심내용을 결제에 참석한 모든 대중들에게 백일만에 이해시키겠다는 바람으로 시작한 일이였다. 아무리 어렵고 난해한 가르침이라고 할지라도 누구든지 백일만 잘 살핀다면 세상의 이치를 제대로 꿰뚫어 볼 수 있는 안목이 열린다는 사실을 몸소 보여주신 것이다.
올해 역시 여름이 시작되면서 석달간의 결제가 지난 5월17일(음력 4월15일) 시작되었다. 선원의 일주문을 걸어 잠그고 큰방에 함께 머물면서 수행에 전념한다. 이는 인도의 우기(雨期)이래 수천년 동안 이어져 내려 온 전통적인 특별 정진기간이다. 하지만 그 백일은 중국 동진(東晋)시대의 혜원(慧遠335~417)선사처럼 때로는 30년이 되기도 했다. 당신은 여산(廬山)에서 평생 그림자 조차 산문 밖을 나가지 않았다. 머물던 동림사(東林寺)에서 천일결제를 백일처럼 한 것이다.
어쨋거나 결제란 멈춤을 통해 마음을 다잡는 일이다. 현실에 매몰되어 흘러가기만 하는 자신을 인위적으로 멈추게 하는 일이다. 진부한 삶에 활력을 불어넣는 일이다. 결제란 단절과 정지가 목적이 아니라 몸과 마음의 재충전을 위한 느긋함이다. 설사 한 순간의 멈춤이라고 할지라도 새로운 흐름을 만들어 갈 수 있는 에너지로 전환된다면 그‘순간’은 바로 백일과 진배없다. 그러므로 굳이 시간단위에 얽매일 필요는 없을 것 같다. 나를 바꾸기에 충분한 시간이라면 그 길이가 얼마이건 모두가 백일이라 하겠다. 일상으로 바쁜 도시의 직장인들도 주말을 이용해서 분주한 생각의 역맛살을 접고 템플스테이를 이용하여 결제할 수 있다면 설사 48시간에 불과할지라도 이는 또다른 백일결제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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