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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심정 벗님글방

명사십리에서 만난 해당화

등록 2011-07-15 17:59

명사십리에서 해당화를 만나다

 참으로 오랜만에 양손에 신발을 들고서 맨발로 낙산해변을 가만히 걸었다. 으스름녁에 만난 ‘철 이른’바다는 생각보다 훨씬 한적했다. ‘철 지난’ 바닷가의 푸석푸석한 풍광과는 전혀 격이 다른 풋풋한 한가함이었다. 걸어도 걸어도 끝자락은 여전히 아득했다. 애매하게 긴 거리는 대충 십리(十里)라고 하면 무난하다. 그래서 선인들은‘명사십리’라는 이름 붙이길 좋아하셨나 보다. 육지 쪽의 맨 모래땅이 주는 퍽퍽함보다는 물가의 젖은 모래가 오히려 더 걸을만 했다. 어둠 속에서 경계선이 없는 동일한 모래밭인데 느낌은 달랐다. 물먹은 자국의 유무가 희미한 경계선 역할을 대신해 준 까닭이다.

이 땅의 해안가에 살았던 주민들은 가늘고 고운 눈부신 모래를 ‘명사(明沙)’라고 불렀다. 실크로드의 분기점인 둔황 사람들은 ‘밍샤(鳴砂)’라고 표기했다. 바람에 이는 모래소리가 울음처럼 들렸던 까닭이다. 유목민은 소리에 더욱 민감하고 농경민은 빛깔에 더 예민했던 모양이다. 서역지방의 명사산(鳴砂山)에 올랐던 악양산방의 박남준(1957~ )시인은 “인생이 이렇게 발목이 푹푹 빠져드는 길이라면 일찍이 그만둬야 하는 일 아니냐.....세상에 지친 이들이 여기 올라 모든 울음을 묻고 갔으리”라고 노래했다.‘소리나는 모래밭(鳴砂 밍샤)’을 겪어보지 못한 주변인에게도 그 괴로움을 실감나게 묘사한 절창(絶唱)이다. 반대로 원산의‘오리지널’명사십리에서 짚신을 들고 걸었던 만해(1879~1944)스님은 “자연스러운 쾌감을 얻었다... 가늘고 보드라운 모래는 밟기에는 너무도 다정스러워 맨발이 둘 뿐이라는 것이 매우 유감이었다.(원문은 ‘사실이 부족하였다’)”라고 하여 명사(明沙)를 밟는 느낌까지 즐겼던 것이다. 모래밭의 두 얼굴인 셈이다.

 일출을 보기위해 이튿날 또 백사장 위에 섰다. 어둠이 대충 가릴 것은 가려준, 밤이 주던 모래밭의 촉감과 파도를 향한 귀 열림은 별로 쓸모가 없었다. 모든 것이 드러난 아침에는 눈이라는 시각(視覺)의 할 일이 훨씬 더 많아진 탓이다. 흰모래에 붉은 해당화가 대비감으로 등장한 것도 그 시간대였다. 척박한 모래땅 위에서도 당당한 그 모습은 강렬한 인상을 주었다. 어제 낮, 홍련암 가는 길에서 마주쳤을 때는 주변의 풀 그리고 나무들과 어우러져 진홍빛이 그다지 도드라지지 않았던 것이다. 더불어 염분을 좋아하면서도 또 지나친 소금기의 흡수를 막기 위해 줄기와 잎에 가시와 털을 만들어 낼줄 아는 절제의 미학도 아울러 갖추었다. 무엇이든지 모자라는 것도 문제지만 넘치는 것도 그 못지않다. 과유불급(過猶不及)은 해당화도 해당되었다.

 인근 강릉 선교장에서 나오는 길에 만난 해당화는 화사함 뒤에 숨어있는 그늘인‘가시와 털’이 오히려 더 큰 울림을 주었다. 전언에 의하면 해방 전에 금강산을 거쳐 원산의 명사십리로 가족여행을 떠났을 때 안주인이 데리고 온 꽃이라고 했다. 긴 백사장에서 유장한 가문의 역사를 읽었고, 모래밭에 뿌리를 내릴려고 애쓰는 해당화를 보며 종부(宗婦)로 시집왔을 당시 자신의 모습과 이미지가 겹쳤을 것이다. 많은 식솔들이 때로는 가시처럼 마음에 생치기를 남겼지만 그럼에도 솜털같은 따스함과 부드러움으로 모든 걸 덮어가며 집안을 건사해야 했던 삶이 ‘당신과 너무나 닮은’ 그 꽃을 옮겨심도록 했을 것이라는 상상력에 공감했다. 내친 김에 금강산 길을 따라 올라가면서, 막힘없이 명사십리까지 갔던 서산(1520~1604)대사의 선시를 가만히 읊조리며 당신이 만났던 풍광을 상상해본다.

봉래오색운(蓬萊五色雲) 금강산의 구름이 하작명사우(下作鳴沙雨) 명사십리에 비 되어 내리고 낙진해당화(落盡海棠花) 해당화마저 지고나니 삼승일만호(三僧一萬戶) 길 위에는 우리 서너 명 뿐 (*만호는 응벽 장만호 거사를 말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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