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국인의 참선을 지도하는 한 스님 사진 <한겨레> 자료
이제 인생을 반추해 볼 나이가 되었다. 살아갈 날 보다도 살아온 날들이 더 길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아직까지 되돌아 본 기억은 별로 없다. 철부지이기도 하고 또 늘 해야 할 일이 많았던 까닭이다. 나름 열심히 살았다고 생각하지만 또 돌아서서 생각해보니 사실 별로 손에 쥔 것이 없다. 하긴 인생이란 공수래공수거(空手來空手去)라고 하지 않았던가?
빈손으로 왔다가 빈 손으로 간다고 했으니 남는게 없는 것이 당연한 이치이다. 그럼에도 마음 한 켠은 뭔가 휑하다.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고 했던가? 늘 뭔가를 남겨두어야 한다는 또다른 부채의식이 심연에서 스멀스멀 일어나고 있었다. 아마 모르긴 해도 스스로 잘났다고 생각하는 사람일수록 더더욱 그러할 것이다. 하지만 그래봤자 그것도 욕심일 뿐이다. 살다보면 이름이 남는 것이지 이름을 남기기 위해 사는 것은 아닌 탓이다.
지음(知音)이라고 했던가. 알아주는 사람이 있어 거문고를 연주했고 그가 죽자 소리내기를 그만 두었다. 또 선비는 자기를 알아주는 사람을 위해 목숨을 바친다(士爲知己者死)는 경우도 마찬가지다. 자족(自足)할 수 없는 사람에게 자족하라고 해봤자 그건 공염불에 불과하다. 눈내린 날 흥에 겨워 벗을 찾아가다가 그 흥이 다하자 도중에 그대로 돌아왔다는 대숲에 살던 은둔객처럼 제 멋에 겨워 살 수 있다면 그것도 참으로 좋은 일이다. ‘죽어도 좋고 살면 더 좋고’라는 어록을 남긴 채 한 줌의 재로 사라진 그 도반의 말처럼, 남이 몰라주더라도 제 멋에 살면 될 일이고, 또 알아주면 알아주는대로 그것 또한 괜찮은 것이라고 여길 일이다.
한국에서 고교를 마치고 미국 유학을 가 뉴햄프셔대 교수로 있는 혜민 스님이 조계종 총무원장 자승 스님과
할리우드 영화배우 리처드기어의 소통을 돕고 있다. 사진 <한겨레> 자료
본래 ‘구닥다리’ 스타일이라 한문고전에 관심이 많았다. 그 안에 모든 것이 갖추어져 있다고 믿었고 또 그 속에서 충분히 행복했다. 해설을 달아 많은 이에게 전하고자 번역본을 내기도 했고, 쉽게 풀어서 생활 속에서 되살려 놓는 작업도 병행했다. 그래봐야 바닷물 가운데 한 표주막 만큼도 안되는 미미한 양이긴 하지만. 젊은 시절 새로운 길을 따라 일본 중국 인도 유럽 미국 등으로 유학길을 나서는 수행벗들을 보면서도 그냥 그럴려니 했다. 원효스님처럼 토종의 길을 뒤따라 가는 것도 좋은 일이라 여겼다.
그러면서도 늘 한편으로 구나발타라 스님의 기적을 꿈꾸었다. 그는 중인도지방 출신이었다. 당시 양대문명인 인도와 중국의 선진문화를 고루 접할 수 있는 환경 속에서 태어났고 자랐다. 하지만 언어장애로 인하여 얼치기 주변인 수준에 머무를 수 밖에 없었다. 그래서 ‘스님답게’ 인도말을 중국어로 유창하게 바꿀 수 있는 동시통역의 능력을 갖게 해달라고 정성다해 기도했다. 지성이면 감천인 법이다. 드디어 선신이 나타나 머리를 바꾸어주는 꿈을 꾼 것이다. 그날 이후로 양대국어가 유창해졌다.
현대인도 고대인도 아닌 얼치기 삶 속에서 현대인이면서 동시에 고대인이길 원했다. 고전한문 독해력으로 나름 행세하며 금생을 버텨왔다. 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세계는 지척간이 되어갔다. 현대와 고대를 동시에 아우르기 위해선 영어 중국어 일본어에 능통하는 일은 선택이 아니라 필수였다. 하지만 ‘죽기 전에 이것만은’ 이미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안지도 꽤 되었다. 그래서 ‘죽고 난 이후의’ 약속으로 넘겼다. 다시 태어난다면 젊은 나이에 문화대국 몇 나라의 유학을 마치고 더불어 3개국어에 능통하여 동양고전과 한국의 명저를 세계화하겠다는 원력으로 바꾸었다. 혹여 구나발타라 스님처럼 기도기적을 통해 죽기 전에 3개국어를 마스터할 수 있다면 그보다 더 좋을 순 없겠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