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간지에는 나름 명당이라는 추모공원의 광고가 자주 등장한다. 불교계 언론에는 ‘세 절 밟기’를 알리는 광고도 매번 실린다. 교통망이 순조롭게 연결되는 지역 유명사찰에서 서로서로 묶어서 ‘삼사(三寺) 순례’ 홍보에 적극 나선 까닭이다.
약간의 ‘활자중독’ 증세와 심심풀이 삼아 읽을 만한 것이 별로 없는 산중 생활인지라 저절로 광고면까지 꼼꼼히 살피면서 발견한 사실이다. 모두가 윤달과 관련한 것이다. 윤달 참배객과 함께 봄꽃과 신록을 즐기는 관광객이 함께 어우러진 인파가 경내에 가득한 호시절이다.
가만히 생각해보니 두 달 전의 2월은 마지막 날짜가 29일이었다. 다른 해는 28일로 마감하는데 올해는 하루를 더 얹어 준 셈이다. 4년 만에 오는 이른 바 윤일(閏日)이다.
실제의 일 년과 달력상 한 해의 차이를 없애기 위한 방편이라고 했다. 그리고 보니 몇 년 전(2099년) 신년 벽두에 윤초(閏秒)라고 하여 1초를 더한다는 뉴스까지 떠올랐다. 협정 세계시(世界時)와 실제 지구 자전공전의 기준인 태양시(太陽時)의 차이로 인해 1초를 보탠다는 해설까지 친절하게 덧붙여 주었다. 어쨌거나 1초는 말할 것도 없고 하루 정도는 더하거나 빼거나 간에 별로 실감날만한 일은 아니다. 그래서 둘 다 그럴러니 하고 지나갔다.
하지만 올해는 2월 윤일에 이어 4월21일부터 한 달 간의 윤달, 즉 ‘윤삼월’이 들었다. 그야말로 ‘투(two) 윤’이 겹친 제대로 된 윤년이라고 하겠다. 하지만 알고보면 근거가 다르다.
윤일은 양력에 의거한 것이고 윤달은 음력에 따른 것이다. 달을 기준으로 하는 음력 1년은 354일이다. 양력에 비해 11일이 모자라는 까닭에 3년을 주기로 한 달씩 보탠 것이라고 소시적 과학시간에 배웠던 기억까지 애써 더듬어야 했다.
천년 전, 송나라 때 홍영소무(1012~1070) 선사는
“자연은 가장 신령스럽지만 그래도 3년마다 한번 씩은 윤달이 끼어야 조화신공(造化神功)을 완수할 수 있다.”고
에둘러 말씀한 바 있다.
사실 2월29일의 혜택이라고 해봐야 공과금 마감이 하루 정도 늦추어지는 것 뿐이다. 혹여 그 날 태어난 아이는 생일상을 4년마다 한 번씩 받는 억울한 일을 당할 수는 있겠다. 음력을 위주로 하여 살았던 기성세대의 함자에는 ‘윤’자를 넣는 경우가 더러 있었다. 이름 속에서 윤달에 태어남을 은연 중에 드러낸 것이다. 하지만 그의 ‘진짜 생일’은 언제 돌아올지 가늠이 되지 않는다. 윤삼월이 19년만이라고 하니 그 정도 세월은 흘러야 할 것 같다.
음력과 양력을 함께 사용하는 문화권에서 윤달의 비중은 윤일에 비할 바가 아니다. 조선시대 홍석모(1781~1857) 선생은 <동국세시기>라는 저술을 통해 ‘윤달은 천지의 영적인 기운도 인간사를 간섭할 수 없는 기간’이라고 했다. 그래서 산소 이장을 비롯한 심리적으로 위축될만한 일은 주로 이 시기를 이용하여 해결했다. 21세기에도 윤달의 이삿짐센터는 호황이고 예식장 일정은 개점휴업 상태인 것이 작금의 현실이다. 음력의 힘은, 우리의 생활 구석구석에서 알게 모르게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다. 사실 달력은 양력만으로 충분하지 않다. 태양만큼 달도 실제로 우리 생활에서 많은 영향을 끼치는 까닭이다. 그래서 양력과 음력은 중도(中道)적으로 사이좋게 공존해 왔다.
어쨌거나 윤초와 윤일, 그리고 윤달은 모두가 모자라서 보태는 일이다. <동국세시기>에서 ‘강남 봉은사는 윤달을 맞이하여 한 달 동안 서울 장안의 인파가 끊어지지 않았다’고 하여 모자라는 신심도 보충했음을 전하고 있다. 바깥 일은 말할 것도 없고 내면 세계의 허함도 함께 채웠던 것이다.
늘 안팎으로 부족하다고 아우성인 것이 우리들의 일상사다. 하지만 모자라서 보태는 것인 만큼 넘쳐서 덜어내는 것도 또한 중요한 일이다. 윤달 동안 넘치고 모자람을 잘 살펴서 덜어낼 것은 덜어내고 보탤 것만 보탤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