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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심정 벗님글방

안과 밖의 경계, 석문에 서서

등록 2012-05-24 16:23

천왕봉 진달래는 나무가지에 꽃잎 몇 개를 달고서 가는 봄을 마지막까지 악착같이 붙들고 있었다. 꽃을 쥐고 있는 것은 그 만큼 자기의 계절이요, 나의 시간임을 은연 중에 드러낸 것이다. 내려오는 길에 잠시 쉰 자리의 산벚꽃은 꽃잎을 길바닥에 점점이 화사하게 모두 떨구고는 이미 새잎을 달고 서 있다. 어쨌거나 나무도 꽃잎이 떨어진 자리만큼 그리고 그늘을 드리운 지역만큼은 자기구역이었다. 산과 물을 경계선으로 삼던 시절에는 자연석문(石門) 역시 주변 암자의 권역임을 알려주는 경계석 구실을 했다. 상환암과 상고암은  암자 이름을 붙인 석문이 일주문을 대신하고 있었다.

석문이라는 이름을 달기 위해선 몇 가지 조건을 갖추어야 했다. 먼저 바위 사이로 길이 열려있어 통로 기능을 해야 한다. 또 자연스럽게 지붕 구실을 해야 하는 바위도 덧씌워져야 한다. 그래야 뭔가 문이라는 느낌을 주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것만으로 부족하다. 마지막으로 석문을 경계로 하여 ‘대문 안과 밖처럼’ 앞뒤 풍광의 차별성까지 있다면 그야말로 금상첨화라고 하겠다. 상환 석문이 그랬다.   

숨이 턱턱 막히도록 경사진 길을 힘겹게 오른 후 한숨을 돌릴 무렵 만나는 석문이다. 돌의 규모도 장대하거니와 몇 개의 바위가 어우러져 지붕과 기둥 모양을 자연스럽게 만들었다. 통로도 저쪽이 훤히 보이는 곧은 길이 아니라 굽어있는 탓에 그 앞에 서면 시각과 생각마저 잠시 끊긴다. 그리고 석문길 치고는 제법 긴 편이라 여운마저 남긴다. 더불어 ‘중석문(中石門)’이라는 글씨가 새겨져 있어 문패까지 구비했다. 

 

이 석문을 통과하면 곧장 평탄한 오솔길을 따라 양편으로 산죽(山竹)이 펼치지는 평원이 나온다. 편안하고 여유롭게 걸을 수 있는 기쁨을 준다. 석문의 아래쪽 숨가쁜 길과 위쪽의 느긋한 길이라는 전혀 다른 느낌으로 인하여 이 석문길을 즐겨 찾는다. 무릉도원 입구의 그 동굴문도 한 사람이 겨우 지나갈한 크기에 불과했지만 인간세상과 신선세계를 이어주는 대문 구실을 했다는 옛 전설까지 떠올리게 하는 곳이다. 속리산에는 여덟 개의 석문이 있다. ‘팔석문 길’을 걸으면서 마음 속 여덟 가지 근심거리를 한 개씩 덜어내는 자기발견의 기쁨을 누리기 위해 많은 올레족들이 발품을 아낌없이 팔았다.

인간은 누구나 태어나면서 관혼상제라는 4단계 석문을 통과하기 마련이다. 문 한 개씩을 통과할 때 마다 새로운 신분과 모습으로, 단계별로 바뀌는 과정을 겪는다. 부처님께서는 태자 시절에 동서남북의 네 개 문을 지나면서 생로병사라는 네 가지 고통을 목격하신 바 있다. 그 네 개 문을 통과한 것이 계기가 되어 이를 해결하고자 수행길을 선택했다. 결국 그 길을 따라 4대 성지가 이루어졌다. 올 초엔 당신의 4대 성지를 나의 사대문으로 삼기 위해 순례를 했다. 보드가야의 짙푸른 보리수와 장엄한 등불 행렬처럼 법주사 일주문 밖으로는 오월의 신록이 눈부시게 빛나고, 문 안쪽으로는 성인의 탄생을 축하하는 형형색색의 연등이 가득하다.   

해남 대흥사의 초의(草衣 ․ 1786~1866) 선사는 연등에 불을 켜면서 간절한 마음으로 기도했다.

“해는 대낮에 빛나지만 긴 밤의 어둠을 깰 수 없고 달은 밤에 빛나지만 밤의 어둠을 다 몰아내지 못합니다.  어두운 밤의 어둠을 몰아내고 긴 밤의 어둠을 깰 수 있는 것은 오직 등불만이 가능하니  등불을 밝히는 의미가 참으로 심원(深遠)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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