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 픽쳐(No picture)는 망각만 남기더라
아침 죽을 먹은 후 마루 위에서 댓돌의 신발을 추스리는 중이였다. “노 픽쳐(No picture)!”단호한 목소리와 함께 여러 스님네들의 시선은 일제히 담장 끝 샛문 쪽을 향했다. 카메라 몇 대가 우리를 향해 연신 셔터를 눌러대던 중이었다. 어색한 침묵의 순간이 지나갔고 이내 주변은 평정되었다. 두어시간이 지난 후 ‘차 한잔 달라’는 전화가 왔다. 알고 지내는 사진작가는 무박이일로 출사를 나왔다고 했다.
아침의 무례함에 대한 의례적인 사과와 함께 덕담이 오고간 후, 대뜸‘찍을게 없다’는 푸념을 했다. 전통사찰을 비롯하여 고즈넉한 자연풍광과 어우러진 옛 정취를 찾아다니고 있지만 어디건 전깃줄 소화전 스피커 현수막 때문에 그림이 안되는 경우가 대부분이라고 했다.
그 순간 달포 전에 다녀갔던 불교미술사를 연구하는 소장학자에게 부탁받은 일이 떠올랐다. 법주사 마애불은 ‘일어나려는 순간’을 사진 찍듯 새긴 것이라고 했다. 발가락에 힘을 주면서 자연스럽게 허리가 가늘어지는 자태가 여느 마애불과는 차별된, 동적(動的)인 모습이 압권이라고 설명했다. 하지만 전면에 놓인 단(壇 탁자) 때문에 이제 그런 명장면을 찍을 수가 없다는 안타까움을 토로한 후 돌아갔다. 가능하다면 자료사진을 찍어 보내달라면서.
이제까지 아무 생각없이 그 앞을 지날 때 마다 잘생긴 얼굴만 바라보면서 합장하고 고개를 숙였다. 하지만 그 날 이후 발가락까지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탁자의 튓틈과 4개의 다리 사이를 비집고 억지감상을 하며 여러 날을 보냈다. 하긴 진짜 미인은 몸 맵시까지 제대로 드러나야 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몇 년 전에 그 앞에 의욕적으로 화강암 탁자를 설치했다. ‘동네 석공’이긴 해도 디자인도 신경을 기울였고 조각도 정성 다해 새겼다. 탁자는 엄청 무거웠다. 젊은 학인과 행자를 포함한 10여명이 달라붙어 들어내야 했다. 태풍이 두 차례 지나간 뒤라 겹겹의 거대한 바위 사이로 구석구석 잎들이 어지럽게 흩어져 있었다. 끼여있던 오래 된 묵은 잎들까지 쓸어내니 그 옛날 노천법당의 분위기가 제대로 살아났다. 가려지기 전 마애불의 자연스런 본래 모습을 만나는 기쁨을 누렸다. 연꽃무늬가 새겨진 직사각형 바닥돌과의 조화로움은 불상을 더욱 돋보이게 했다. 특히 힘을 잔뜩 주고 있는 엄지발가락과 날렵한 허리선을 중심으로 여러장 반복하여 찍었다.
몇 년 전, 큰맘먹고 인천공항에서 소형 디지털 카메라를 구입하기 전에는 모든 것을 마음에만 담아두었다. 사진찍기에 치중하다보면 주변분위기를 제대로 느끼고 즐길 수 없다는 나름의 고매한(?) 이유를 내세웠다. 십여년 전, 전문가들과 함께 유럽과 일본으로 현대건축기행을 다녔던 기억은 지금도 생생하다. 하지만 가진 사진이 한 장도 없다. 지금까지도 후회막급이다.
게다가 일행 중 두 분은 이미 고인이 되셨다. 마음사진은 결국 망각만 남길 것이다. 올초에 인도의 타지마할에서 사진삼매에빠져 한 시간 늦게 일행들과 합류하는 바람에 뒤통수가 무척이나 따가웠다. 하지만 지금도 그 사진을 통해 그 때를 떠올리면 마냥 행복하다. 마음에 담아둔 것은 사진으로 재생할 수 없지만, 사진은 다시 마음영상으로 환원이 가능하기 때문이었다.
금강경은“모든 존재는 이슬과 같고 거품과 같고 그림자와 같다.’고 했다. 찰나에 생겼다가 찰나에 사라지는 것이 주변사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순간 속에서 영원을 추구했다. 사진도 그렇다. 성철(性徹 1912~1993)선사의 사진집은‘포영집(泡影集)’이라는 이름을 달았다. 그림자(影)와 거품(泡)을 모아둔다(集)는 것이 어디 가당키나 한 일인가. 그런줄 이미 알고 있지만 그래도 때론 모아야 하는 것이 인생사인 것이다.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