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광고

광고닫기

광고

본문

광고

휴심정 벗님글방

“엊그제처럼 ‘여긴 하늘나라야’ 웃으며 전화하실 듯 해요”

등록 2020-04-29 20:20수정 2022-03-17 12:09

[가신이의 발자취] 고 김병상 몬시뇰을 그리며
지난 27일 인천시 답동 주교좌성당에서 고 김병상 필립보 몬시뇰의 장례미사가 1천여명의 성직자와 신자들이 애도하는 가운데 거행됐다. 사진 인천교구
지난 27일 인천시 답동 주교좌성당에서 고 김병상 필립보 몬시뇰의 장례미사가 1천여명의 성직자와 신자들이 애도하는 가운데 거행됐다. 사진 인천교구

지금은 하늘나라에서 환하게 웃고 계실 김병상 몬시뇰은 정의구현사제단과 민주화 운동의 대부로 세상에 알려진 분이지만, 언제나 유머 넘치고 사람들 가까이서 어울려 사는 법을 아는 그런 따뜻한 분이셨다. 신부님은 돌아가시기 전까지 짓궂은 장난을 자주 하시곤 했다. 선종 며칠 전에도 전화해서는 “일회야, 나 죽었어. 지금 여긴 하늘나라야” 하셨다. 보고 싶으니 얼른 달려오라는 말씀을 그런 식으로 표현하신 것이다. 자주 못 찾아뵙는 죄스러움도 웃음으로 날려버리고 당신 곁으로 당장 달려가게 하는 귀여운(?) 어른이셨다.

이제는 진짜 하늘나라에서 당신이 사랑한 사람들, 특히 가난하고 어려운 사람들을 위해 기도해 주고 계실 김병상 몬시뇰은 서른여덟이라는 늦은 나이에 신부님이 되셨다. 신부님은 어머니의 기도와 바램으로 어렸을 때부터 사제의 길을 걷고자 마음을 먹었고 1948년 공주 유구에서 초등학교를 졸업한 뒤 정든 고향을 떠나 용산 소신학교에 입학했다. 그런데 1950년 한국전쟁이 일어났고 교장 신부님은 새벽에 어린 신학생들을 깨워 피난 가라며 쌀 한 됫박과 소금 한 주먹씩을 나눠주셨다고 했다, 쌀을 꼭꼭 오래 씹으면 죽지는 않는다며, 재주껏 남쪽으로 가라는 교장 신부님의 말씀대로 어린 신학생은 공세리에서 대구로, 대구에서 부산으로, 결국 수송선을 타고 제주도까지 갔다. 신부님은 그때의 배멀미를 생각하면 지금도 멀미가 나는 것 같다는 말씀을 자주 하셨다.

전쟁이 길어지면서 신학생들 교육을 위해서 밀양에 소신학교가 마련되자 다시 육지로 나온 신부님은 여름이면 남천강에 가서 양말이나 속옷을 빨아오기도 하고 해진 양말을 전구에 끼워 꿰매 신었던 그 시절을 즐겁게 추억하셨다. 전쟁 막바지로 치닫던 1953년 신부님은 폐병을 앓게 되어 신학교에서 쫓겨났고, 10년 넘는 투병생활을 하면서 절망의 시기를 보내야 했다. 그러던 중 한 수녀님의 도움으로 메리놀병원에 있는 결핵요양원에서 2년간 치료를 받게 되었고 결국 완치되었다.

고 김병상 필립보 몬시뇰은 27일 인천 당하동 하늘의문묘원 성직자 묘역에 잠들었다. 사진 인천교구 제공
고 김병상 필립보 몬시뇰은 27일 인천 당하동 하늘의문묘원 성직자 묘역에 잠들었다. 사진 인천교구 제공

건강을 되찾아 사제의 꿈을 다시 갖게 된 신부님은 밀양 소신학교 과정을 중단한 지 11년, 기나긴 우여곡절 끝에 서른세살의 늦깍이로 다시 신학교에 들어갈 수 있었다. 소신학교 때 같이 입학했던 동기들은 이미 신부가 되어 있었고 조카뻘 되는 신학생들은 신부님에게 ‘영감님’이라고 불렀다. 신부님은 그때를 기억하면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어울리려고 해도 걔들이 껴주지 않더라고. 반에서 이렇게 소외시키니까 굉장히 외로웠지. ‘내가 공부를 계속하면 신부가 될 수 있을까, 나를 배척하는데 저들과 어떻게 하면 같이 잘 지낼 수 있을까?’ 하고 말이야”

그래서 신부님은 마음 바꾸어 동기들과 어울리기 위해 무척 노력하셨다. 무슨 일이든 그들과 어울리기 위해 열심히 했고, 그들의 처지에서 생각하려고 노력했기에 어려운 관계가 풀릴 수 있었던 것이다. 타고난 유머 감각, 더불어 사는 방법에 대한 깨달음과 노력이 있었기에 신부님은 평생 그토록 다양한 세대의 친구들을 가까이에 두고 계셨던 것이 아닐까.

아직은 실감나지 않지만 언젠가 김병상 신부님의 부재를 가슴 깊이 슬퍼할 많은 사람들과 함께 신부님과의 즐거웠던 추억을 곶감처럼 빼먹으며 한바탕 웃는 날이 오기를 기대해 본다.

김일회 신부/천주교 인천교구 사무처장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
언론 자유를 위해, 국민의 알 권리를 위해
한겨레 저널리즘을 후원해주세요

광고

광고

광고

휴심정 많이 보는 기사

들숨 없는 날숨은 없다 1.

들숨 없는 날숨은 없다

문광스님, 생각 끊어진 마음자리로 가야 2.

문광스님, 생각 끊어진 마음자리로 가야

초라하게 살려 보길도로 떠난 김민환 고려대 명예교수의 인생2막 3.

초라하게 살려 보길도로 떠난 김민환 고려대 명예교수의 인생2막

부처님 보고 절에 가면 안 됩니다 4.

부처님 보고 절에 가면 안 됩니다

명상이란 무엇인가? 5.

명상이란 무엇인가?

한겨레와 친구하기

1/ 2/ 3


서비스 전체보기

전체
정치
사회
전국
경제
국제
문화
스포츠
미래과학
애니멀피플
기후변화&
휴심정
오피니언
만화 | ESC | 한겨레S | 연재 | 이슈 | 함께하는교육 | HERI 이슈 | 서울&
포토
한겨레TV
뉴스서비스
매거진

맨위로
뉴스레터, 올해 가장 잘한 일 구독신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