휴게소와 졸음쉼터
장거리 이동이 잦은 생활이다. 도시와 도시사이를 오가는 경우도 더러 있지만 절집의 지정학적 특성상 도시와 시골 혹은 산골과 오지사이를 이동할 일이 더 많다. 결국 대중교통보다는 자가운전으로 이동하는 빈도수가 더 높을 수 밖에 없다. 휴게소도 습관처럼 늘 같은 곳을 이용한다. 익숙한 것이 편하기 때문이다. 사람마음은 다 비슷한 모양이다. 모두가 늘 붐비는 곳만 찾는다. 그러다보면 주말이나 성수기에는 휴게소에서 지체하는 시간이 길어진다. 따라서 길 위에 머무는 시간을 줄이는 지혜도 필요하다. 길이 막혀 예정시간을 초과하거나 혹은 빨리 목적지에 가야할 경우 휴게소보다 졸음쉼터를 더 선호하게 되었다. 무엇보다 주차공간과 화장실 사이가 매우 가깝다. 거의 붙어있다시피 하므로 1차목적을 신속하게 달성할 수 있다. 그리고 하지 않아도 되는 불필요한 소비시간은 저절로 생략되기 때문이다.
졸음쉼터는 휴게소와 휴게소 사이가 먼구간에 설치한 간이휴게소다. 이름 그대로 졸음을 이기지 못한 운전자를 위한 임시공간이다. 졸음운전으로 인한 교통사고를 줄이기 위한 묘책인 셈이다. 설치효과가 괜찮았는지 여기저기 많이 생겼다. 갓길을 조금 넓힌 정도로 비좁긴 해도 정말 요긴한 곳이다. 졸음운전은 절대로 안된다는 무언의 압력과 함께 운전자에 대한 배려심을 동시에 느끼게 된다. 게다가 읽기만 해도 잠이 확 달아나는 “졸음운전의 종착지는 이 세상이 아닙니다” “졸음운전, 모든 것을 잃을 수 있습니다”라는 협박성(?)경고문까지 군데군데 걸어놓았다.
언젠가 심야장거리 운전을 하다가 졸음쉼터에서 그대로 잠이 들었다. 눈을 뜨니 차창 밖이 훤하다. 차 안에서 아침을 맞이한 것이다. 본의아니게 ‘차박’을 했다. 장거리 운전을 하다보면 때로는 이런 돌발상황도 감수해야 한다. 또 여유롭게 지방도로를 지나다가 가십거리가 될만한 현장을 만나는 의외의 소득도 얻는다. 남한강 양평지역에는 강상면과 강하면이 있다. 강 위쪽마을 강 아래쪽 마을이라는 단순한 의미다. 그럼에도 강하면 지역주민들은 하(下)를 ‘아래’ 혹은 ‘낮다’는 뜻으로 받아들인 모양이다. 그래서 주민들에게 ‘강남면’으로 바꾸기 위한 서명운동을 독려하는 현수막을 내걸었다. 하긴 강하보다는 강남이 훨씬 ‘있어’ 보이기는 한다. 서울 강남 이미지도 은연 중에 빌릴 수도 있겠다.
영월의 하동면(下東面)은 2009년 김삿갓면으로 바꾸었다. 이 지역에 조선시대 전설적인 방랑시인 김병연(1807~1863)의 무덤이 있기 때문이다. 내친 김에 관내 서면(西面)도 한반도면으로 변경했다. 선암마을 부근의 평창강이 휘감아 돌면서 자연스럽게 생긴 한반도 지형모양을 담아 동네이름으로 삼았다. 관광객 유치에 도움이 된다는 지역주민의 현실적 공감대 위에서 별로 무리하지 않고 개명한 경우라 하겠다. 강원도에 연고를 둔 동행인은 이러한 지역의 저간사정까지 곁들인 세세한 설명을 보태면서 여행의 재미를 더해준다.
정선 땅에서 가리왕산을 만났다. 우리나라에서 10위권 안에 들어간다는 높이와 개성있는 이름을 가진 산이다. 가리왕은 천년 스테디셀러인 『금강경』에 나오는 인물인지라 매우 익숙한 이름이다. 잘 팔리는 좋은 경전이라고 착한 사람만 등장하는 것은 아니다. 그는 시기와 질투가 많고 성격마저 포악한 임금이었다. 살다보면 그런 유형의 인간들을 더러 접하기 마련이다. 그 때는 피하는게 상책이겠다. 그런데 수천년 전 인도에 살았다는 가리왕을 대한민국 강원도 산골에서 만나니 두려움이 아니라 의아함이 먼저 일어난다. 그야말로 요즈음 유행어로 “너가 왜 거기서 나와!”라는 말이 딱 어울리는 경우라고 이구동성으로 입방아를 찧었다. 하긴 지명이라고 하는 것은 다 그만한 사연이 있기 마련이다. 알고보니 인도의 가리왕이 아니라 그 옛날 영서(嶺西)지방을 기반으로 한 작은 부족국가인 맥(貊)의 갈왕(葛王)이었다. 갈왕은 언제부턴가 가리왕으로 불리었다. 그 산 북쪽 골짜기에는 대궐터까지 남아있다고 전한다.
그 시대는 영토전쟁이 생활의 일부였다. 갈왕 역시 그랬다. 거듭되는 전쟁으로 인하여 피로가 누적되자 널따란 바위 아래에서 몸을 기댄 채 그대로 잠이 들었다. 뒷날 그 바위는 숙암(宿岩 왕이 하룻밤 묵은 바위)이 되었고 그 마을은 숙암리(宿岩里)로 불리었다. 하지만 도로명 주소는 이런 역사까지 담아낼 수 없다는 한계를 지닌다. 지친 왕을 품어주었던 큰바위 숙암에 착안한 ‘잠’과 ‘쉼’을 컨셉으로 하는 호텔형 힐링센터가 몇 년 전 인근에 들어섰다. 프랑스어로 바위라는 의미의 로쉬(roche)를 상호로 사용했다. 그렇게 지역이 가지는 의미의 역사는 또다른 방식으로 이어진 것이다. 장소성과 역사성을 되살리는 것은 그 지역의 인문학적 자산을 풍요롭게 만드는 창조적 작업이기도 하다.
피곤한 사람에게 길은 멀고 잠 못드는 이에겐 밤은 길다. 이동 중인 차안이건 전쟁 와중의 바위 밑이건 눈거풀이 무거우면 쪽잠이라도 자야 한다. 그래야 나그네는 다시 길을 떠날 수 있고 왕은 또 싸움터로 나갈 수 있기 때문이다. 하긴 인생은 그 자체로 전쟁터다. 그래서 누구나 쉼이 필요한 것이다. 올해 휴가철은 코로나19의 영향으로 해외 여행이 어려운지라 나라 안의 휴게소와 졸음쉼터는 엄청 붐빌 것이다. 그 붐비는 대열에 한 사람 더 추가할 예정이다.
송나라 야보(冶父)선사도 금강경을 읽다말고 본문 곁에 한 줄 시를 낙서처럼 남긴 뒤 길을 떠났나보다.
기즉손(飢則飡)이요 곤즉수(困則睡)라.
출출하면 (휴게소에서) 밥을 먹고
피곤하면 (졸음쉼터에서) 눈을 붙인다.
원철 스님(조계종 불교사회연구소장)
강원도 정선 가리왕산
강원도 정선 가리왕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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