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조 탯자리인 준경묘 영경묘를 찾아가다
입구부터 경사는 가파르다. 시멘트로 포장된 바닥은 여름장마로 인하여 물을 잔뜩 머금었다. 게다가 군데군데 물이끼까지 끼어 미끈거린다. 자물쇠가 채워진 차단기 앞에서 몸을 돌리다가 바닥에 떨어진 고염(자연산 작은 감)을 밟았다. 길가에는 군데군데 익지도 않고 떨어진 도토리도 보인다. 오전까지 세차게 내리던 비가 잠시 소강상태다. 오후에는 비올 확률이 30%라는 일기예보를 믿고 길을 나섰다. 눅눅한 습기를 제외하고는 겹겹이 짙은 구름은 아예 해를 가려주는지라 오히려 산행하기 더없이 좋은 조건이다. ‘옛길’이라는 표지판과 함께 계단난간이 보였지만 경사도가 더 심한지라 신작로가 편할 것 같아 그냥 그대로 걸었다. 땀이 비오듯 흐른다. 무릎이 블편한 도반은 길을 지그재그로 천천히 걸었다. 3km는 족히 될터이니 체력을 잘 안배하라는 당부도 잊지 않았다.
포장길이 끝나면서 경사도 끝나고 이내 평평한 흙길이 나타났다. 옛길과 신작로가 합해지는 자리에서 잠시 땀을 식혔다. 주변을 둘러보니 듬성듬성 서있는 황장목이라 불리는 궁궐용 소나무들이 비로소 눈에 들어온다. 경복궁 중수와 얼마 전 복원된 숭례문 대들보를 이 지역에서 공급했다고 한다. 다시 길을 따라 걸었다. 잠시 내리막인가 싶더니 이내 평평한 길이 이어지면서 갑자기 눈앞이 환해진다. 믿기지 않을 만큼 넓은 평지가 나타나면서 옅은 안개 속으로 멀리 홍살문이 보였다. 누가 봐도 범상치 않는 터에 재각과 비각 그리고 나지막한 무덤이 그림처럼 조화를 이루며 자리잡고 있다. 아! 하는 감탄사가 저절로 나온다. 태조 이성계의 5대조인 이양무(李陽茂)장군의 무덤이다. 드디어 조선왕조의 탯자리에 도착한 것이다.
고려말 이씨집안은 부득이한 사정으로 전주에서 삼척으로 주거지를 옮겼다. 그 무렵 5대조 어른의 상(喪)을 당했고 묘자리를 찾아 다녔다. 지나가던 스님이 “대지(大地)로다. 길지(吉地)로다. 왕손이 나올 곳이로다”라는 혼잣말을 우연히 멀리서 귀동냥으로 듣게 된다. 장례 후 몇 년만에 다시 식솔들을 데리고 또 함경도로 옮겨가야 했다. 자연히 묘자리는 잊혀질 수 밖에 없다. 조선건국 이후 조정에서 뿌리찾기 차원에서 그 자리를 찾고자 나섰다. 하지만 이미 몇몇 자리와 함께 여러 가지 말이 분분한지라 결정을 미루어야만 했다.
1899년 고종이 대한제국을 선포한지 3년째 되던 해다. 조선왕조는 이미 내리막길로 접어들었다. 국호를 바꾼 뒤 시도한 갖가지 제도개선은 구호로 그칠 뿐이였다.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조상의 음덕에 기대고자 한 것인가? 주자가례(朱子家禮)에 따라 이성계 이전의 4대조까지 위패는 이미 종묘 영녕전에 모셔져 있다. 그럼에도 날로 쇠약해지는 국운을 상승시키는 비책을 찾은 것인가? 드디어 고종에 의해 5대 조부모 무덤 위치의 논란에 대한 종지부를 찍고서 성역화 작업이 이루어졌다. 준경묘(濬慶墓) 영경묘(永慶墓)라는 왕릉에 준하는 이름을 부여했다. 조선개국 500년만의 일이다. 그 과정을 기록하고 의궤까지 남겼다.
모르긴해도 조선이 계속 정치 경제 사회가 안정적으로 운영되었다면 이 자리는 잡목과 풀 그리고 소나무만 무성한 채 그대로 잊혀졌을 것이다. 하지만 처방이 너무 늦었던 모양이다. 발복(發福)하기도 전에 11년 뒤 조선왕조는 문을 닫았다. 그럼에도 왕릉급 지위를 부여받은 후 120여년 동안 지역사회의 성지로 자리매김 되었고 종친들과 주민들의 관심과 보호를 받으면서 오늘에 이르렀다. 조선왕릉이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될 때 ‘끼워넣기’를 시도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는 아쉬움도 뒷담화로 들었다.
왕조의 기운이 서린 샘물이라는 안내문이 적힌 진응수(眞應水)를 들이킨 후 다음 목적지로 향했다. 부인 평창이씨 의 영경묘역이다. 가는 길에 있는 재실까지 들렀다. 언덕길을 넘어가는 차에서 바라보는 재실은 미음(ㅁ)자형 대형건물이다. 관리인은 말할 것도 없고 두 무덤을 지키는 수호군까지 두었다니 이 정도 규모는 되어야 할 것 같다. 건물을 빙둘러 가며 10여개의 굴뚝을 사각형 나무로 만들고 덮개까지 씌웠다. 워낙 특이한 모습인지라 ‘왕의 굴뚝’이라고 즉석에서 이름을 붙였다.
다시 차로 이동하니 곧 '영경묘200m'표지판이 나타난다. 걸어서 재각과 비각을 지나 다시 100m를 가니 무덤이 보인다. 경사지 끝부분에 매달려 있다시피 하다. 앞은 바로 절벽이다. 재각과 비각이 무덤과 거리를 둘 수 밖에 없는 지형이다. 당연히 혈(穴)이 뭉친 자리라는 해설이 뒤따랐다. 준경묘에 올리고 남은 커피를 다시 영경묘 공양물로 올린 후 음복(飮福)삼아 일행과 함께 나누어 마셨다. 당시에는 왕릉도 아니었을텐데 부인무덤이 이렇게 차를 타고 한참 이동해야할 만큼 멀리 떨어진 곳에 조성한 이유도 궁금하다. 신랑무덤은 터도 넓기만 하던데. 하긴 김해에 있는 가야국의 김수로왕릉과 허황후릉도 거리가 만만찮지만 이렇게까지 멀지는 않더라고 함께 입을 모아서 흉을 봤다.
여름 낮은 길다. 긴 오후일정을 마쳐도 어둠은 저만치에서 멈춰섰다. 늦게 사찰로 돌아왔다. 이틀 밤을 신세진 이 절도 준경묘 영경묘의 성역화가 이루어진 1899년 그 해 조포사(造泡寺)로 지정되었다. 제사 때 두부를 만들어 올리는 역할을 부여받은 것이다. 지금도 지역에 따라 두부를 조포라고 부르기도 한다. 대한제국 천자의 은혜를 입은 절이 된 것이다. 그래서 절이름도 천은사(天恩寺)로 바뀌었다. 대한민국 시대에도 왕릉 제사상에 두부를 올리는 일은 사찰의 몫이다. 그렇게 역사는 이어진다. 왕릉의 원당(願堂) 주지로 부임한지 십년 만에 왕릉황후릉에 인사를 마친 덕분에 마음의 빚을 조금이나마 덜게 되었노라고 안도했다.
용비어천가의 시작인 여섯 용의 첫 자리는 묘 주인공의 아들인 목조(穆祖) 이안사(李安社)로 시작된다. 그 명당터를 잡고 장례를 주관한 공덕일 것이다.
해동 육룡(六龍)이 나시어 일마다 천복(天福)이니...
뿌리 깊은 나무는 바람에 아니 흔들리지 않고...
샘이 깊은 물은 가뭄에도 그치지 아니하니....
원철 스님/ 조계종 불교사회연구소장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