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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심정 벗님글방

노을이 아름다운건 구름이 있기때문이다

등록 2020-09-21 09:43수정 2020-09-21 09:59

꿈 언덕

노을이 아름다운 것은

구름이 있기 때문이다

언덕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평화로워지던 시절이 있었다. 심지어는 언덕이라는 글자만 보아도 마음속에서 나비가 날아다녔다. 우리 학교 뒤에 언덕이 있었다. 내 짝꿍 집이 그 언덕에 있었는데 나는 그것이 그렇게 부러울 수가 없었다. 초등학교 2학년 때였다. 학교 수업을 마치고 그 동무 집에 놀러 가는데 소나기를 만났다. 비에 흠뻑 젖은 우리를 보고는 동무 어머니가 옷을 벗기고 아궁이 앞에 앉혔다. 그리고는 수제비를 만들어 주었는데 우리는 싱글벙글 국물까지 맛있게 싹 먹어 치웠다. 비가 그친 뒤 우리는 벌거벗은 채로 언덕을 뛰어다니며 놀았다. 그 언덕에서는 아랫마을이 훤히 내려다 보였다. 어떤 때는 멀리 기차가는 것도 볼 수 있었다. 나는 그것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풍경이라고 생각했다. 나도 기차를 타고 어디론가 떠나고 싶었다. 언제쯤 나는 저 기차를 탈 수 있을까? 언덕을 내려오면서 우리 집도 언덕 위에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기차를 타고 새로운 세상을 보고 싶어 했던 그 마음은 이제 지워지고 없다. 기차를 바라보던 그 언덕도 없고 내가 타고 싶어 했던 그 기차도 없다. 이렇듯 그리운 것들이 사라진 세상에서 나는 또 무엇을 그리워할 수 있을까. 하루하루 흘러서 예까지 흘러왔건만 그마저도 스스로 걸어서 온 것이 아니라 바람에 떠밀려 흘러왔다는 것이 나를 쓸쓸하게 만든다. 그래서 그런가, 나는 지금도 내 인생이 가엾다. 어쩌다 언덕이 나타나면 반가운 마음에 쓸쓸함이 사라지곤 했는데 막상 그 언덕 위에 올라가 보면 황막한 세상만 보였다. 그럴 때마다 나는 어린 날의 언덕이 그리웠다. 어린 날의 그 언덕에서 기차를 바라보며 꿈꾸던 아이는 어디로 사라진 걸까? 흐린 기억이라도 떠올랐으면 좋겠는데 전혀 기억이 나지 않는다. 그때 그 아이는 무슨 꿈을 꾸고 있었을까?

사람들은 누구나 자기 인생의 버팀나무가 있다. 미처 몰랐다면 조용히 생각해 보라. 분명히 자기를 지켜 주는 그 무엇이 있을 것이다. 그것이 사랑이든 시 한 구절이든 어떤 믿음이든 말이다. 나의 버팀나무는 슈만의 ‘트로이메라이’다. 아니 어쩌면 하느님이 ‘트로이메라이’로 둔갑하여 나의 버팀나무가 되어 주었는지도 모르지. 언제 그 음악을 알게 되었는지는 모르겠으나 내가 선택한 것이 아니라 그 음악이 나에게로 온 것이었다. 처음엔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는데 내가 지치거나 외로울 때면 어김없이 나타나 나를 위로해 주었다. 하지만 그 음악의 이름도 알지 못했고 누가 만들었는지도 알지 못했다.

중학교 3학년 땐가, 어느 날 밤 컴컴한 이불 속에서 트랜지스터라디오를 듣고 있는데 그 음악이 흘러나오는 것이었다. 피아노 선율이 내 마음 아픈 곳을 어루만져 주었고 나는 그 손길이 너무 다정하여 눈물을 흘리고 말았다. 비로소 나는 그 음악의 이름과 만든 사람을 알게 되었다. 그때부터 나는 저절로 그 음악을 사랑하게 되었고 나를 지켜 주는 수호신이라고 생각했다. 실제로 내 인생의 큰 고비가 있을 때마다 그 음악은 바람처럼 나타나서 나를 지켜 주었다.

그런데 언제부턴가 그 수호신이 나타나지 않았다. 나는 내가 유리벽에 갇혀있다는 생각을 자주 하곤 했었는데 혹시 유리벽이 너무 두꺼워서 뚫고 들어오지 못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의욕상실증이라고 해야 하나 우울증이라고 해야 하나? 세상은 시끄러운데 아무런 소리가 들리지 않았고 보이는 것이 보이지 않았다. 나는 점점 더 무기력해지고 숨이 막혀 죽을 지경이었다. 그 병은 꽤 오래 지속되었다.

1992년 가을에 독도에서 며칠을 보낸 적이 있었다. 하루는 비추섬(서도)에 있는 ‘꿈 언덕’에서 비박을 하려고 일찌감치 올라가 자리를 잡았다. 가파른 계단 위에 자그마한 평지가 있는데 거기가 바로 내 자리였다. 모아섬(동도)이 바로 눈앞에 보이고 서쪽 하늘과 먼 바다가 한눈에 들어오는 곳이었다. 침낭을 펴놓고 술 한 잔에 이 생각 저 생각 하고 있는데 어느새 구름들이 붉게 불타고 있었다. 누가 구름더러 정처 없이 흐른다고 했을까. 독도에서 바라본 구름은 아름다운 노을이 되려고 하루를 열심히 흘러온 것처럼 보였다. 아니, 어쩌면 뜨거운 노을 속에 제 몸을 태우고 싶었는지도 모르지. 나는 그런 용기조차 없어서 오늘도 무기력의 늪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는 거지.

그때였다 갑자기 하늘에서 음악이 쏟아졌다. 음악 소리는 순식간에 독도를 뒤엎었고 내 마음 깊숙한 곳까지 파고들었다. 세상의 그 어떤 음향기기도 이 보다 더 좋은 소리를 낼 수 없을 것 같았다. 아, 이것이 몇 년 만인가. 드디어 슈만의 ‘트로이메라이’가 두꺼운 유리벽을 깨트리고 내 마음속으로 들어왔다.

그 순간 알게 된 보물 같은 진실, 노을이 이름다운 건 구름 때문이라는 것. 나는 새로운 그 무엇을 발견한 과학자처럼 놀란 기쁨에 사로잡혀 있었다. 구름이 불타는 것이 아니라 슬픔이 불타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 그 슬픔이 바로 기쁨이라는 것을 깨닫는 순간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인생이 아름다운 건 꿈이 있기 때문이지. 나는 왜 단 한 번도 꿈을 사랑하지 않았는가? 가엾은 내 인생에게 미안하다는 말조차 못하겠구나.

세상 모든 이치가 그렇다. 기쁨은 슬픔의 꽃이라는 것. 그래서 슬픔은 아름답다는 것. 울어라, 울어라 마음껏 울어라. 눈물이 빛난다는 건 아직 꿈이 있다는 거지. 이 빛나는 눈물을 위해서라도 나는 다시 걸어야 한다. 오, 아름다운 슬픔이여!

노을이 아름다운 건

구름 때문이지

너의 눈물이 빛나는 건

꿈이 있기 때문이야

간절히 원한다면

이루어진다네

슬픔은 노을구름처럼

기쁨이 될 거야

다시 일어나 떠나자

빛나는 눈물을 위하여

저 하늘 붉게 타오르는

슬픔을 보라

노을이 아름다운 건

구름 때문이지

너의 눈물이 빛나는 건

꿈이 있기 때문이야

-「꿈 언덕」, 1992

글 한돌 작사가

***이 시리즈는 순천사랑어린학교장 김민해 목사가 발행하는 월간 <풍경소리>와 함께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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