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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심정 벗님글방

웃고있는 가면 속 모습을 다 드러내

등록 2021-02-07 15:00수정 2021-02-07 15:01

<방탄소년단>의 <러브 마이셀프> 유튜브 갈무리
<방탄소년단>의 <러브 마이셀프> 유튜브 갈무리

‘에피퍼니(epiphany)’라는 용어는 문학, 영화, 기독교의 세 장르에서 주로 사용한다. 기독교에서 에피퍼니는 주현절(主顯節) 현현절(顯現節) 공현절(公現節) 등으로 종파마다 다르게 번역하여 부른다. 한 마디로 에피퍼니는 예수께서 자기 본색을 드러낸 날이라는 뜻이다. 문제는 예수의 본색이 언제 드러났느냐 하는 것인데 종파마다 유리한 쪽으로 정의한다는 데 있다.

동방박사가 큰 별의 등장을 보고 그를 만나기 위해 왔다는 걸 강조하는 종파에서는 그 사건에 초점을 맞춘다. 세례를 강조하는 종파에서는 세례요한이 요단강에서 예수에게 세례를 주었을 때 일어난 사건에 초점을 맞추고, 금욕주의 종파에서는 예수가 광야에서 시험을 통과한 순간에 초점을 맞춘다. 개신교는 주로 첫 이적인 물을 포도주로 만든 사건에 초점을 둔다. 언제냐 하는 논쟁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사람마다 깨달음의 순간은 다르기 때문이다.

문학에서 에피퍼니는 영미문학에서 주로 다루는데, 제임스 조이스 (James, Joyce, 1882~1941)의 단편 모음집 《더블린 사람들》(1914)과 《젊은 예술가의 초상》(1916)을 분석할 때 등장한다. 조이스는 자신의 작품에서 ‘느닷없는 깨달음’이라는 에피퍼니 기법을 사용했는데, 지금도 영미문학 특히 소설 분석 방법론에서 가끔 사용되고 있다.

영화에서 에피퍼니 기법을 사용하는 건 쉽지 않다. 영화는 기본적으로 촘촘한 인과관계로 장면들이 연결되어야 하는데, ‘일상 속의 느닷없음’으로 나타나는 에피퍼니가 영화의 맥락과 흐름을 깰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브레이드 러너》(1982)에서 유니콘 등장처럼 과감하게 에피퍼니 컷을 사용한 작품을 만나면 신선한 충격을 맛보게 된다.

방탄소년단(BTS) 석진의 별명이 ‘에피파니’라고 한다. 미학과 출신의 방시혁 대표가 그렇게 지었을 거라고 한다. 석진은 <에피파니>라는 곡을 만들었다. 덕분에 요즘 거의 모든 초등학생들이 에피파니라는 단어를 안다. 여하튼 BTS는 여러모로 신선한 인간들이다. 그런데 이 노래의 가사에는 더욱 놀라운 부분이 등장한다.

사진 이정배 목사의 갈무리 모음
사진 이정배 목사의 갈무리 모음

“참 이상해/ 분명 나 너를 너무 사랑했는데 (사랑했는데)/ 뭐든 너에게 맞추고/ 널 위해 살고 싶었는데/ 그럴수록 내 맘속의/ 폭풍을 감당할 수 없게 돼/ 웃고 있는 가면 속의/ 진짜 내 모습을 다 드러내/ I‘m the one I should love in this world/ 빛나는 나를 소중한 내 영혼을/ 이제야 깨달아, oh, so I love me/....”

그리고 노래는 이어진다. “좀 부족해도 너무 아름다운 걸/ I’m the one I should love” 나는 분명 너를 사랑했는데 결국 나는 나를 알게 되었고 나를 사랑한다(so I love me)는 걸 깨달았다는 것이다. 그 흔한 ‘I love you’로 끝맺는 게 아니라 ‘I love me’ 라니, 그리고 자신의 아름다움을 깨달았다니, 할. 아무래도 BTS의 존재 자체가 에피퍼니다.

근본적으로 에피퍼니는 ‘일상 속 느닷없는 깨달음’을 의미한다. 신학적 논리나 문법적 인과관계를 깨뜨리는 직관적이고 순간적인 깨우침을 말한다. 느릿느릿 산책하다가, 문득 하늘을 바라보다가, 누구와 이야기하다가, 설렁설렁 책을 보다가, 빨래하고 청소하다가 불현듯 일어나는 깨우침이 내게 얼마나 귀중한지 모른다. 그게 살아가는 이유인지도 모른다.

글 이정배 목사/원주살림교회 담임 & 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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