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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심정 벗님글방

그저 자기다움에 만족하면 참 좋겠네

등록 2021-04-11 15:05수정 2021-04-11 15:05

경기도 고양시 일산 자택 인근 정발산에서 망중한을 즐기는 한돌. 사진 조현 기자
경기도 고양시 일산 자택 인근 정발산에서 망중한을 즐기는 한돌. 사진 조현 기자

시는 시로 남는 게 좋고

노랫말은 노랫말로 남는 게 좋다

어떤 시인이 자기 시에다 곡을 붙여 달라고 한 적이 있었다. 나는 잠시 고민에 빠졌다. 청을 들어주자니 시가 다칠 테고 안 들어주자니 서운하다 할 것이었다. 노래가 된 시는 다시 시로 돌아가기가 어렵다는 것을 진정 그 시인은 몰랐던 것일까? 생각 끝에 나는 정중하게 거절을 했다. 시인을 위해서라도 그리 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나는 시에다 곡을 붙여본 적이 없었고 그럴 실력도 되지 못했다. 그 시인은 알겠노라고 웃음을 지었지만 몇 달 뒤에 나에 대한 좋지 않은 소문이 들려왔다. 내가 되게 잘난 척 한다는 것이었다. 만약 내가 그 시인의 부탁을 들어 주었더라면 그런 소문은 들려오지 않았을 터인데… 아무리 뛰어난 작곡가라 할지라도 시인이 애써 지은 시를 망치지 않고 잘 만들 수 있을 거라는 보장은 없다. 만약 작곡가와 시인이 똑같은 생각을 한다면, 그러니까 곡도 빛나고 시도 빛날 거라고 생각한다면 그건 정말 바람직하지 않은 발상이다. 자칫 시를 배신하는 또는 그 배신을 도와주는 꼴이 되기 때문이다.

시는 시로 남는 게 좋고 노랫말은 노랫말로 남는 게 좋다. 만약 시가 노래가 되길 바란다면 처음부터 노랫말이 될 글을 써야지 그렇지 않고 써 놓았던 시를 노랫말로 둔갑시키면 무리수가 따른다. 생각해 보라, 시 자체가 노래인데 거기에다가 또 다른 노래를 입히게 되면 시가 지니고 있던 상상의 노래는 노랫말이라는 틀에 갇히게 되는 것 아니겠나. 옛 시인들은 그걸 알았다. 가곡에 시를 건네준 옛 시인들의 생각을 들여다보자.

박화목 시인은 <그대 창밖에서>를 자신의 시집에 싣지 않았다. 가곡으로 유명한 박목월 시인의 <이별의 노래>가 그의 시집에 없고, 역시 유명 가곡인 양중해 시 <떠나가는 배>도 작사자인 양 시인의 시집에 없다. 요즘 분위기로 봐선, 자신의 시가 노래로 만들어지면 시집을 만들 때 그 시를 더 부각시키려고 할 것 같은데 수십 년 전의 시인들은 요즘 시인들과는 생각이 달랐던 것 같다. 노랫말이 되었으니 시가 아니라고 생각해서 시집에 안 넣었을까? 아니면 노래가 된 자신의 시를 시집에 싣는 것을 점잖지 못하다고 겸연쩍게 생각해서였을까?(「가곡의 탄생」 이정식 지음, 반딧불이,2017)

윤형주가 6촌 형인 윤동주의 시에 곡을 붙이려고 하자 윤형주의 아버지는 시도 노래라면서 말렸다고 한다. 그렇게 하는 것이 윤동주의 시를 보호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실제로 노래가 된 시들을 보면 뭔가 시로써의 빛깔을 잃어버렸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하지만 노랫말로 변신한 시들이 쏟아지는 이 마당에 빛깔을 잃어버렸다고 한들 그게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어차피 시와 노랫말은 겉모습이 비슷하기 때문에 대중들도 거기에 대해서는 애써 구별을 지으려고 하지 않는다.

노래책을 보다 보면 어떤 노래는 ‘작사’라고 되어 있고 어떤 노래는 ‘작시’라고 되어 있는 것을 보게 된다. 노랫말이 시인의 글이면 작시라고 하는 것 같은데 처음부터 노래를 위해서 지은 시가 아니라면 ‘작’을 빼고 그냥 ‘시’라고 하는 것이 옳다. 그렇지 않을 거라면 그냥 ‘노랫말’로 하는 것이 어떨까 싶다. 시인에 따라서는 자기 시가 ‘노랫말’로 불리어지는 것을 싫어할 수도 있겠으나 노랫말로 표기했다고 해서 시의 품위가 떨어지는 것은 아니다. 혹시 자기 시가 노래가 되면 보편적인 작사보다 좋을 거라고 생각하는 건 아닌지? 만약 그렇게 생각한다면 그건 정말 옳지 못한 생각이다. 노래에 쓰는 말을 함부로 시에 갖다가 쓸 수 없듯이 시에 쓰는 말이라고 해서 노래에 쓰는 말보다 낫다고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예전에는 노랫말이라는 표현이 없었고 거기에 대한 논쟁도 하지 않았다. 그런데 요즘 들어 노래가 된 시가 많다 보니 시와 작사의 차별화만 생기고 말았다. 나는 굳이 그런 차별화가 생겨나서는 아니 된다고 본다. 작시, 작사 그것이 뭐 그리 중요한가. 그냥 대중들에게 좋은 노랫말로 남으면 좋은 것 아닌가? 그런데 최근 들어 시인들이 노래에 참여하는 것이 눈에 띄게 늘었다. 솔직히 나는 왜 그런 현상이 생겨났는지 잘 모른다. 시인들한테 물어보면 답해 주려나? 실제로 시인들과 작곡가들이 모여서 시 노래 발표회도 하는 그런 모임도 생겨났다. 작곡가들은 시에 곡을 붙인다는 것이 좋고 시인들은 자기 시가 노래로 만들어진다는 것이 좋았던 것이다. 하지만 막상 노래가 된 시들은 기대했던 것과는 달리 대중들의 호응을 얻지 못했다. 노랫말보다 시가 월등하다고 생각한 결과이다. 물론 몇몇 곡은 시를 알리는 데는 성공을 했지만 노랫말이 되기에는 뭔가 눈높이가 다르다는 것이 드러났다.

노래란 가사에 가락을 만들어서 부를 수 있는 것을 말하는 것인데 거꾸로 가락에다 가사를 붙이는 경우도 많다. 그러다 보니 가사를 짜 맞추게 되는 일이 흔해졌는데 자극적인 말을 쓰거나 반복된 말을 써서 관심을 끌려고 하는 노래들을 보면 그런 것이 종종 보인다. 하지만 음에는 거기에 어울리는 말이 있고 말에는 거기에 어울리는 음이 있으니 아무리 아름다운 말이라고 할지라도 음하고 어울리지 못하면 노래의 생명력은 떨어질 수밖에 없다. 노래가 된 시가 의외의 실패를 하는 까닭이 거기에 있다. 내 생각에는 살아있는 시가 수족관에 들어가서 풀죽은 노랫말이 되는 것보다 그냥 바다에서 빛나는 시가 되는 것이 옳다고 본다.

그림. 픽사베이
그림. 픽사베이

‘호박에 줄 그은다고 수박 되나.’라는 말이 있는데, 이 말을 호박이 들으면 얼마나 억울하겠는가? 아무리 위장을 해도 본질은 변하지 않는다는 뜻으로 이런 말을 만든 것 같은데, 내가 호박한테 물어보니까 자기는 수박이 될 생각이 전혀 없다는 것이다. 따지고 보면 둘 다 귀한 것인데 어쩌다 그런 말이 생겨났는지 모르겠다. 사람들이 은연중에 호박을 천하게 여기고 수박을 귀하게 여겼던 모양이다. 수박은 수박대로 호박은 호박대로 제다움이 있는 것이니 시를 수박이라 해서도 아니 되고 노랫말을 호박이라 해서도 아니 된다고 본다. 사람은 물론,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은 그 자체로 귀한 것 아니겠나?

말 나온 김에 호박에 줄긋는 사람들 얘기 좀 해 보자. 선거철 포스터를 보면 어쩌면 그렇게 하나같이 웃고 있는 얼굴들인지, 그래서 거부감이 든다는 것을 그들은 모르고 있는 모양이다. 그들은 악수하는 걸 좋아하고 현장에서 주인공들과 사진 찍는 걸 좋아한다. 모두 다 자기가 수박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우리는 언제쯤 호박에 줄긋지 않는 정치인을 만날 수 있을까? 노랫말을 시라고 해도 안 되지만 시집을 냈다고 해서 시인이 되는 것도 아니다.

언젠가 라디오 방송을 하는데 진행자로부터 이런 말을 들은 적이 있었다. “이 노래 가사는 시라고 해야 할 것 같아요.” 칭찬해 주는 건 좋지만 솔직히 그 말이 불편하게 들렸다. 그냥 좋다고 하면 되는 것을 좋으니까 시라고 하는 것은 왠지 수박 같은 호박이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노랫말한테도 미안하고 시한테도 미안했다.

‘밥 딜런’이 노벨문학상을 받는 걸 보고 저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평생 문학에 몸 바친 가난한 나라의 올곧은 작가들을 생각하면 정말 그렇게 하면 안 되는 것이다. 그럴 거라면 문학상을 줄 것이 아니라 음악상을 따로 만들어서 줘야 한다. 노벨상 주는 데에서는 밥 딜런의 노랫말을 시라고 생각해서 준 것인지 아니면 노랫말도 문학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해서 준 것인지를 설명해야 한다. 상을 받고 안 받고는 당사자의 문제이지만 밥 딜런에 대한 존경심이 사라지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아울러 노벨상의 권위도……. 시를 지으려면 처음부터 시를 지어야지 노랫말을 지어 놓고 시라고 하면 곤란하다. 하지만 아무리 말도 안 되는 노랫말이라도 음악적인 요소가 들어가면 시로 탈바꿈하니 세상에 이런 연금술이 또 어디 있겠는가.

작시, 작사 그런 것에 얽매이지 말고 그냥 좋은 노래 만들어 보면 어떠하리. 보수니 진보니 그런 거 하지 말고 백성들 편히 살게 해 주면 어떠하리. 차라리 보수를 좌파라 하고 진보를 우파라 하면 어떠하리. 도대체 좌파 우파가 뭐 그리 중요한가? 모두의 의견을 모아 간을 잘 맞추어서 맛난 비빔밥 만들어 주면 좋겠다마는 그게 그렇게 어려운 일인가? 동요든 가요든 사람들에게 위안을 주면 좋은 거고 노랫말을 쓴 사람이 어린이든 시인이든 사람들에게 즐거움을 주면 좋은 것이다. 생강나무와 산수유나무가 서로 비슷하다 하여 생강나무를 산수유나무라 우기지 말고 산수유나무를 생강나무라 우기지 말았으면 좋겠다.

그림 픽사베이
그림 픽사베이

디자인이라는 말이 언제부터 생겨났는지 모르겠지만 무릇 디자인이라는 것이 꾸미는 것인데 시나 노랫말이라는 것도 따지고 보면 말 가지고 그림을 그리는 것이다. 그런데 좋은 말들을 훔쳐다가 퍼즐 맞추듯 꿰어 맞추는 그런 시나 노랫말은 결코 좋은 그림이 될 수 없다. 간혹 사람들이 노랫말을 천하게 여기는 경향이 있는데 바로 퍼즐 맞추듯 노랫말을 지었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이런 뜻에서 디자인을 공부하는 사람들도 글 짓는 훈련을 하면 도움이 많이 될 것 같다.

시에 얽매이면 시 짓기가 어렵고 노랫말에 얽매이면 노랫말 짓기가 어렵다. 시가 되었든 노랫말이 되었든 정성들여 쓰면 그걸 접하는 백성들의 삶은 그만큼 높아지는 것이고 얽매여 쓰거나 아무렇게나 쓰면 백성들의 삶은 그만큼 낮아지는 것이다. 붓글도 잘 쓰려고 하면 잘 안 써지는 것이고 힘을 빼고 마음을 다하면 붓 가는대로 써지게 되는 것이다. 그러니까 백성들을 사랑하는 마음이 조금이라도 있다면 정말 정성들여 써야 하는 것이다.

나는 시와 노랫말이 서로 마주보며 웃었으면 좋겠다. 갓을 쓴 시가 노랫말 동네에 와서 가난한 노랫말을 하인 부리듯 하지 말았으면 좋겠고 돈 많은 노랫말이 가난한 시 동네에 놀러가서 우쭐대지 말았으면 좋겠다. 그리고 시가 노랫말인 척 하지 말았으면 좋겠고 노랫말이 시인 척 하지 말았으면 좋겠다. 제다움에 충실하면 시가 노랫말이 된다 해도 시로 남는 것이며 노랫말이 시가 된다 해도 노랫말로 남는 것이다. 사람도 제다움에 충실하면 어디에 살든 무엇을 하든 자기 인생으로 남는 것 아니겠나. 생강나무와 산수유나무는 제자리에서 사람들을 즐겁게 해줄 뿐, 생강나무는 마을로 내려가지 않고 산수유나무는 산에 올라가지 않는다.

산이, 산이 되면 좋겠네

강이, 강이 되면 좋겠네

우리네 사람들도

그냥 사람이면 좋겠네

빛이 어둠이면 좋겠네

어둠이 빛이라면 좋겠네

빛과 어둠이 춤추는

그런 세상이면 좋겠네

거친 이 세상길을

내가 걸어가네

먼지 나는 이 마음에

비가 내렸으면 좋겠네

내가 너였으면 좋겠네

너도 나였으면 좋겠네

우리 마음 하늘처럼

그냥 사랑이면 좋겠네

-「제다움」, 1993

한돌/ <홀로 아리랑>,<개똥벌레>, <조율> 작사·작곡가

***이 시리즈는 전남 순천사랑어린학교장 김민해 목사가 발간하는 <월간 풍경소리>와 함께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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