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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심정 벗님글방

행복은 당신의 행동에서 나옵니다

등록 2021-04-18 16:59수정 2021-04-18 17:22

사진 픽사베이
사진 픽사베이

-책을 읽다가 달라이라마 선생께서 했다는 말에 밑줄을 긋는다. ‘행복은 이미 만들어진 것이 아닙니다. 행복은 당신의 행동에서 나옵니다.’ 공감되는 말이다. 어디 행복뿐이겠는가?

수학은 없는 것을 있는 것이라 약속하고 시작한다. 관념이다. 관념은 관념을 낳는다. 소위 논리라 불리는 것, 그것이다. 이 논리는 다시금 추상이라는 다른 차원의 관념으로 발전된다. 직관이라는 영역과 함께. 관념, 논리, 추상 그리고 직관. 이 모두는 이미 만들어진, 고정된 것이 아니다. 관념, 논리, 추상 그리고 직관 등은 나의 행동 혹은 경험을 통해 완성된다. 관념이 관념으로 머물고, 논리가 논리로 머물며, 추상과 직관이 추상과 직관으로 머문다면 그것은 고통이다. 빛의 다른 형태 곧 어둠이랄까?

행복을 비롯한 위의 개념들은 모두가 나의 인식 곧 의식의 차원에서 경험과 함께 통합된다. 사람들과 의사소통 하는 도구로 사용하되 나의 인식의 차원에서는 행동 및 경험과 함께 나의 삶에 온전히 녹아들어 새롭게 태어나야 하는 그런 언어들인 것!

안식일을 ‘사바스(sabbath)’라 부른다지. 습관적으로 하던 일을 멈추고 잠시 하늘을 향해 마음을 모으는 일. 그것이 나에겐 안식일이다. 항상 반복되는 일상의 안식. 유수식견(唯須息見)이라 했던가? 잠시 생각을 멈추고 허공을 마주한다. 감사한 하루다.

-어제 고민했던 직관이라는 언어. 그 언어가 담고 있는 의미의 개별적 해석에 따라 하느님을 마주하는 통로가 될 수도 있다는 현자의 안내에 공감한다. 나의 주변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들 심지어 사물들마저도 고정된 언어로 담아내기엔 한계가 있기에 있는 그대로 바라보며 느껴지는 상황에서 하느님을 체험하는 경험은 감격스러움이다.

호불호의 삶이 때로 나를 왜소하게 만든다. 나의 경험, 생각, 두려움이 담긴 틀을 만들 땐 더욱더. 이런 주관적 호불호의 삶을 알아차리고 거기에 메인 삶에서 벗어나 나 자신을 온전히 내맡기는 삶, 거기에 집중하는 삶을 한 순간이라도 살아낼 수 있다면.

수학의 범주에서는 자연수에서 정수로, 정수에서 유리수로, 유리수에서 실수 그리고 복소수까지 수의 영역이 확장되면서 사람의 생각은 이전보다 확장되었다. 사고의 확장은 사람들에게 자유를 선물로 주었다. 수학의 본질을 자유라 부르는 수학자도 있다.

직관을 언어란 형식에 담는다. 그 형식은 다시 직관을 낳는다. 그리고 그 직관은 꾸준히 확장되어 하느님과 나와의 관계를 변화시킨다. 이 또한 자유라는 이름과 무관하지 않다. 신앙과 수학의 본질이 자유로 만날 수 있을까?

사진 픽사베이
사진 픽사베이

-온라인 예배 후 딸들과의 시간. 부모와 다른 교회를 다니는 두 딸. 큰딸은 대학생으로 딸들이 다니는 교회의 중고등부 교사의 역할을 하고 예배의 반주자로도 활동하고 있다. 둘째 딸은 고등학교 2학년 학생. 큰딸은 특목고(국제고)를 졸업했다. 고등학교 시절 교육과정이 인문사회계열이었기에 대학에도 그와 관련된 학과에 진학할 것을 예상했었다. 그러나 지금 큰딸이 전공하고 있는 영역은 공과대학. 부적응에 대한 걱정과 염려가 있었다. 그 영역도 거쳐야 할 과정이라 생각했다. 1학년을 마치고 휴학 결정. 그간 힘들었던 여정을 꺼낸다. 중학교 시절부터 고등학교, 대학 1학년에 이르기까지 하고 싶은 공부보다는 해야 했던 공부였기에 스트레스가 적지 않았다는 이야기와 그로 인해 발생했던 심리적 어려움의 상황까지 쏟아낸다. 자식의 힘들었던 상황을 듣는다. 부모로서 도와줄 방법이 많지 않음을 인정하니 답답하고 한숨이 나온다. 어찌해야 하나?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서로 다른 문제로 갈등이 일어날 때 한 사람이 다른 사람을 온전히 품어 안고 어루만질 수 있을 때 무한한 행복을 경험한다는 가르침이 떠오른다. 나와 하느님과의 관계가 그렇지 않던가?

큰딸의 힘든 과정을 내가 온전히 품어 안을 수 있다면 그것으로 큰딸의 치유는 이미 시작된 것이라는 생각에 다다르면서 내가 할 수 있는 사랑의 범주를 내가 아는 하느님께 내어드렸다. 그리고 딸의 모습을 지켜보며 기다리기로 했다.

큰딸은 커피숍에서 바리스타의 경험을 쌓고, 운전면허를 연습하고 있으며 자신의 일상을 벗어나 그동안 경험했던 일들과는 다른 일들을 마주하고 있다. 이와 함께 자신의 마음 상태를 지켜보는 연습도 병행 중이다. 바쁜 삶의 여정을 한걸음 떨어져서 지켜보는 연습. 그 과정에서 분명 새로운 변화가 일어날 것이라 기대한다. 코로나가 선물해 주고 있는 나의 가족에 대한 이야기다.

-온라인 수업을 진행하면서 문득 이런 생각을 주신다.

수학의 처음 시작은 관념이었는데,수학에서 점, 선, 면 등은 소위 무정의(無定義) 용어라 불린다-이 관념이 현실과 연결되어 이성이 발달하고 논리, 추상 등의 생각으로 발전되었다. 보이지 않고 존재하지 않으며 잡히지 않던 관념에서 비롯된 상상이 사람의 생각과 연결되어 구체화 되었는데 이 역시도 관념이다.

그런데 그 관념은 관념대로 이 세상에 적지 않은 영향을 주고 있음인데 분리와 파괴적 영향의 피해가 적지 않음은 문명의 다른 모습이요, 극복해 가야 할 숙제가 아닐 수 없음이다. 지금 우리가 겪고 있는 코로나 바이러스가 힌트를 주고 있음 아닐까?

머리에서 시작된 관념은 가슴까지 내려와 직관과 어우러져야 한다. 가슴의 소리, 직관은 수학의 역사보다 훨씬 오래된 영적 지혜와 맞닿아 있다. 머리와 가슴이 함께 작동되어 이성과 영성이 균형을 이룰 수 있다면, 서로 서로가 함께 어우러진 ‘하나’임을 온몸이 받아들여 이해할 수 있다면.

학생들에게 수학을 가르치면서 학생들로부터 지혜를 동시에 배울 수 있다는 것은 수학 교사로서 무한한 행복이자 감사다. 교사인 나는 수학을 통해 학생들에게 접근해 가지만 학생들은 가슴으로 교사를 대하면서 교사인 나를 끊임없이 배울 수 있는 존재로 다시 태어나게 이끈다. 교학상장(敎學相長)이라 했던가? ‘가르치며 배우며 함께 자란다’는 의미보다 ‘배우며 가르치며 함께 자란다’는 뜻이 더 깊게 와 닿는다. 온라인 수업이 진행되면서 학생 개개인의 생각을 들여다볼 수 있어서 이 또한 감사하다.

사진 픽사베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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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졸리면 잔다. 힘들면 쉰다. 내려놓음이다. 누가 나를 힘들게 하나? 바로 나다. 내가 만들어 놓은 삶의 법칙, 유위(有爲)가 나를 자주 옭아맨다. 그것을 스스로 알아차려 틀을 깨뜨릴 수 있겠는가?

어떤 학자가 쓴 글을 읽었다. 책을 덮어도 자꾸 머릿속에 맴돈다. ‘<논어>는 씹으면 씹을수록 맛이 우러나는 심산유곡의 칡뿌리 같고, <성서>는 입안에 넣으면 화아 했다가 곧 사라지는 박하사탕과도 같다.’

삶의 여정은 단순한 반복의 일상만은 아니란 생각이다. 단순한 반복 이면에 담긴 변화의 일상, 보이지 않지만 변화의 일상이 나를 전혀 다른 차원으로 이끌고 있음을 날마다 체험하기 때문이다.

칡뿌리는 칡뿌리대로, 박하사탕은 박하사탕대로 필요하다. 이 역시 구분될 필요는 없다. 두려움과 사랑이, 어두움과 밝음이 다름이던가? 두려움 다음에 사랑이 오는 그 순서, 어두움이 있어 밝음이 있음은 정해진 이치다. 그 이치를 알아가는 과정이 삶의 여정이라면 내가 만들어 놓은 삶의 법칙들은 나에게 있어 의미 있는 내적 선물인 셈이다. 나 스스로 일부러 옭아맬 필요는 없지만 옭아매어 있는 상황을 느끼고 알아차린다면 다음의 순서는 자유 아닐까?

자유에 대한 갈망, 호기심. 이미 내재해 있는 자유의 발견. 신바람 난다.

-성경 묵상 중 마태오복음 26장 35절에서 잠시 머문다.

‘베드로가 다시 “저는 주님과 함께 죽는 한이 있더라도 결코 주님을 모른다고는 하지 않겠습니다.”하고 장담하였다. 다른 제자들도 모두 그렇게 말하였다.’

이래서 베드로요, 이래서 제자들 아닌가? 스승께서 돌아가신다는데 어떤 제자가 “예. 그러셔야죠. 그게 하늘의 뜻이라면 따라야죠.” 이럴 수 있단 말인가? 스승은 제자가 있어 존재하는 것. 배움이 먼저 있어 가르침이 있는 것. 아직 스스로 서지 않았고 스승이 있어 배우는 중인데 베드로와 다른 제자들의 반응은 당연하지 않은가?

지금 나는 내 안에 모신 스승을 베드로처럼 진지하고 순박하며 배우는 자로서 진실함을 갖고 모시고 배우고 있는지 스스로 묻는다.

사진 픽사베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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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라는 공간 내에서 내게 주어지는 일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크게 두 가지로 나뉜다. 학생들과 교실에서 수학이라는 교과로 만나는 수업이라는 일과 선생님들과의 관계 속에서 협의하고 기록하면서 학교라는 전체 공동체의 방향성을 정하는 일이 그것이다.

수업이 수학이라는 과목으로 학생들과 만나는 연결고리요, 학교에서의 업무는 선생님들과의 관계에서 공통된 주제로 동료 교사들과 만나는 연결고리라 받아들인다면 이 모두는 사람들과 사람들 사이에 보이지 않는 연결고리로 연결되어 명사가 아닌 동사로 활동하고 있는 사랑이라는 값진 경험의 실습 현장이 펼쳐진 것이리라.

처음에는 두렵기도 하고 떨리기도 하며 살짝 설레는 그런 복잡 미묘한 상황이 펼쳐진다. 수학이 무엇인지를 알아가면서, 업무가 무엇인지 배워가면서 생각을 나누기도 하고 나와 상대의 경계를 분명히 세우기도 한다. 때론 다투기도 하면서. 그 과정이 지나야 한다. 상대방과 내가 하나가 된다. 학생과 내가 수학으로 하나가 되고 동료 선생님과 내가 업무로 하나가 된다.

어차피 이 모두는 나 혼자 할 수 있는 일들이 아님을 알아차리게 되면서 나의 영역을 넘어선다는 사실이 몸으로 느껴질 테니까. 그게 사랑의 작용이니까.

결국 사랑은 동사였다. 끊임없이 움직이며 작용하는 동사! 배우며 가르치며 함께 성장하는 장소, 그곳은 배움터다. 그 배움터로 향한다.

-내게 맡겨진 일을 묵묵히 감당해 낸다는 것, 나만의 십자가를 지고 스승 예수의 뒤를 따른다는 것에 대하여 잠시 생각한다.

경직된 마음으로 마땅히 그래야 한다는 마음으로는 도달하기가 어려워 알아차림의 차원으로 스스로에 몰입되어 십자가인지도 모르고 일을 감당하며 이루시는 분의 존재가 따로 계신다는 사실만을 안은 체 한참 뒤 그 섭리를 깨달아 감사하는 사람. 그리고 자신의 발자취가 자신의 것인지도 모르고 그저 웃음 한번 짓고 언제 그랬느냐는 듯이 뒤돌아 자신의 길을 가는 사람. 이미 알아차릴 대로 알아차렸고, 통찰이란 영역을 넘어서 경험으로, 온몸으로 알고 있으면서 누가 짐짓 눈빛과 몸에서 나오는 아우라를 알아볼까 슬금슬금 뒷걸음치는 그런 사람.나는 이런 사람을 만났다.나는 그렇게 살 수 있을까?

글 박진호(수학 교사)의 범용일기

이 시리즈는 전남 순천사랑어린학교장 김민해 목사가 발간하는 <월간 풍경소리>와 함께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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