숯을 하얗게 만들고자 열심히 씻었다
개울명칭이 특이하여 일부러 탄천(炭川)을 찾았다. 경기도 용인에서 발원하여 성남 분당을 거쳐 서울 송파구에서 한강과 합류한다. 이름에는 그만한 연유가 있기 마련이다. 우리말로는 ‘숯내’라고 불렀다. 성남 주변에는 탄리(炭里) 즉 숯골이라고 불리는 마을이 있었다. 조정과 민간에서 필요로 하는 숯을 생산했던 지역이라고 한다. 비가 오면 숯물이 골짜기를 따라 흘러 나오면서 냇가에는 시커먼 물이 흘렀다. 그래서 숯내(탄천)이라고 불렀다는 것이다. 중국 황하(黃河)처럼 늘 누른 물도 아니고 어쩌다 가끔 흐르는 검은 물빛이 지명이 될만큼 개천의 물이 맑았던 시절의 이야기다. 하지만 자연현상을 두고서 붙여놓은 이름은 모두가 ‘그런가보다’ 하고 귓전으로 흘러듣기 마련이다. 그런 사실보다는 좀더 그럴듯한 전설을 덧붙인다면 지명이 ‘더 있어’ 보일테다. 모두가 귀를 쫑곳 세울만한 이야기로 기존지명을 각색한다면 그것도 지역사랑의 방편은 되겠다. 그래서 천상세계와 인간세계를 마음대로 오가는 사람이야기가 첨부되면서 이름의 격을 그런대로 높일 수 있었다.
염라대왕 곁에서 심부름하는 이가 모종의 임무를 띠고 인간세계로 내려왔다. 냉큼 숯골로 달려가서 대량의 숯을 장만했다. 많은 이들이 오고가는 길목인 냇가의 돌다리 한 켠을 차지하고서 숯을 씻기 시작했다. 숯을 빨래삼아 씻고 있는 기이한 모습을 지나가는 이들은 의아한 눈빛으로 힐긋힐긋 쳐다봤을 것이다. 하루 이틀 시간이 흐르면서 검은 물이 흐르기 시작했고 그야말로 숯내(탄천)가 되었다. 비가 오는 것도 아닌데 검은 물이 흐르는 것을 이상하게 여긴 이가 냇물을 따라서 찾아왔다. 희한한 광경을 보고 그 까닭을 물었다. “숯을 희게 만들기 위해 씻고 있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그 말을 듣고는 “삼천갑자(1갑자는 60년이다)를 살았지만 그런 말은 처음 듣는다”고 했다. 그 순간 오랏줄로 묶힌 채 염라대왕 앞으로 끌려갔다는 이야기다. 죄명은 저승명부에 적힌 자연수명 60년을 몰래 삼천갑자로 조작한 혐의였다.
주인공의 이름은 동방삭(東方朔 BC154~92)이다. 그는 중국 전한(前漢) 시대의 무제(武帝) 때 관료였다. 한서 권65 ‘동방삭전’과 사기 골계열전 ‘동방삭전’에 기록이 남아있는 실존인물로 1갑자인 60여년을 살았다. 당시로서는 환갑잔치를 할만큼 장수했다. 그는 무제가 두어달에 걸쳐서 읽어야 할 만큼 많은 양의 자기소개서를 올려 스스로를 천거한 인물이다. 걸출한 외모와 함께 해학과 변재가 뛰어난 기인으로 주변에 많은 이야기를 남겼다. 법가(法家)가 득세하던 시대에 ‘옛사람들은 산 속에 은거했지만 자신에 도시에 은거했다’는 도가(道家)적 사고를 가졌기에 주변과 어울리지 못했다. 사마천(BC145~85)과 절친이었다고 한다. 이런 그를 사마천은 동방삭전에서 ‘물이 너무 맑으면 고기가 살지 못하고 사람이 너무 살피면 친구가 없다’는 촌평을 날릴 정도였다. 얼음과 숯이 한 공간에 같이 있을 수 없다는 ‘빙탄불상용(氷炭不相容)’이라는 말도 그와 연관된 것이다. 일찍이 ‘숯’이라는 글자와 인연을 맺은 셈이다.
어쨋거나 그는 늘 사바세계에 살면서 신선세계를 동경했다. 이런 동방삭을 기억했던 이태백(701~762)은 ‘옥호음(玉壺吟)’이란 제목의 시를 통해 두 줄로 언급했다.
세인불식동방삭(世人不識東方朔)이니 대은금문시적선(大隱金門是謫仙)이로다
세상사람들은 동방삭을 못알아 보지만 금문(한림원)에 숨어있는 귀양 온 신선이구나.
몇 천년 전 전한 때 인물이 어느 날 조선시대에 다시 등장했다. 하긴 사지가 멀쩡한 한량이 삼천갑자를 살았으니 갈만한 곳은 모두 돌아다녔을 것이다. 결국 조선 땅 탄천에서 마지막 행적을 남긴 뒤 하늘나라로 소환 당했다. 그런데 왜 하필 조선이었을까? 어차피 믿거나 말거나 한 옛날 이야기이니 현재의 상상력을 조금 보탠다고 한들 무슨 허물이 되랴. 본래 구전이야기란 시간이 지나면서 뺄 것은 빼고 보탤 것은 보태면서 그 내용을 보다 풍성하게 만들고 완성도를 높이는 집단창작물인 것을. 어쨋거나 문제를 푸는 열쇠는 두 글자로 된 ‘동방’이란 그의 성씨라 하겠다. 중국 쪽에서 본다면 동방은 당연히 조선땅이다. 신라 때 부터 한반도를 황해(黃海. 서해) 동쪽이라는 의미로 ‘해동(海東)’이라고 불렀다. 원효스님도 당신 책에 저자의 이름을 올릴 때 ‘해동사문(海東沙門. 사문:수행자) 원효’라고 했으니 그 명칭의 역사는 유구하다. 따라서 동방삭 역시 삼천갑자의 만년시절에 해동에서 머물렀다는 추정의 근거가 되었다고나 할까. 아무튼 귀화했다고 해두자. 한자도 자기글자처럼 사용하는지라 숯내도 마음놓고 ‘탄천’으로 바꾸었다.
사람의 이동은 문화의 이동이요 문자의 이동이다. 하늘세계의 문화가 땅으로 내려왔고 중원의 문자도 해동으로 이동했다. 숯도 시간적으로 공간적으로 그 역할을 이동시켰다. 주로 연료용이었지만 장 담글 때는 유해물질을 제거하는 용도로 간장독 안에 띄웠다. 요즈음 야외캠핑이 대중화되면서 타는 장작과 남은 숯불을 보면서 명상을 하는 세상이 되었다. 이른 바 ‘불멍’이다. 장작숯불이 ‘멍 때리는’ 매개체로 변신한 것이다.
얼마 전 사무실의 공기청정기 필터를 교환하기 위해 동봉한 설명서대로 분해했더니 마지막은 검은 판이다. 자세히 살펴보니 가로세로로 칸을 촘촘히 나눈 뒤 숯조각을 칸칸히 담아놓은 것이다. 오래 전부터 세면장에는 탈취제 삼아 대형 숯 몇 개를 놔두었다. 창문을 통해 들어오는 눈에 보이지 않는 미세먼지가 쌓였다고 생각될 때마다 주기적으로 숯을 깨끗하게 씻었다. 그래야만 제대로 기능을 발휘하기 때문이다. 알고보면 검은 숯이라고 하여 씻지않는 건 아니다. 물론 하얗게 만들려고 숯을 씻는 사람은 아무도 없겠지만.
일본 에도시대의 시인 간노 다다토모(神野忠知1625~1676)는 이런 하이쿠(俳句)를 남겼다.
이 숯도 한 때는 흰 눈이 얹힌 나뭇가지였겠지.
글 원철스님/불교사회연구소장
탄천 전경. 사진 경기관광포탈 갈무리
숯. 사진 픽사베이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